성전 재건과 성곽 중건의 은혜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글귀는 시문과 매체의 표제로 즐겨 인용된다. 고3 시절 책상머리에 ‘복구자 비필고(伏久者 飛必高)’, 오래 엎드린 자 반드시 높이 비상하리라 붙였던 과거 역시 인내 뒤 결실을 바라던 소망이었다. 크고 작은 범사에 하나님이 도와주려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가 못 기다릴 것이 어디 있겠느냐는 설교자는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사 30:18)’을 들어, 감사함으로 믿고 기다리면 주님의 기적적 역사가 일어남을 역설한다. 주의 일에 힘쓰고자 하는 인간의 필요에 바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면 한없이 황홀할 터이나, 불행히도 성경의 다수 사례는 세속적인 잘됨 혹은 즉각적인 이룸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믿는 이의 수가 날마다 더하는(행 16:5) 형통이던 아시아의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쓴 바울의 뜻을 꺾고 감옥의 고난이 기다리던 유럽의 빌립보로 향하게 하신, 이천 년 후에야 아시아 동쪽 끝에 복음을 꽃피우게 하신 예처럼, 여호와 언약의 성취는 오랜 풍상의 소산이었다. 바빌론을 떠나 예루살렘 성전의 기초를 다진 옛 세대의 통곡에는 신실하심을 확인한 귀환의 감격도 있었겠으나, 한편으로 첫 성전의 화려함과 견주어 한없이 초라한 현실의 막막한 탄식도 있었을 것이다. 통솔을 맡은 유다 총독 스룹바벨 등이 직면한 더욱 심각한 문제는 전 건축에 참여하려던 대적들의 협조 제안이었으니, 과거를 거울삼아 혼합주의적 신앙을 가진 족속을 단호히 배격하였으나 앙심을 품은 그들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약 16년 간(주전 536~520) 전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주변 민족의 훼방은 둘째치고라도 낯선 땅에서의 출발은 만만치 않은 시련이었다. 페르시아 왕실의 지원은 점차 끊겼고 차일피일 미뤄짐 속에 처음의 열정은 식어갔으며 성전 건축은 요원해졌다. 설상가상 자신의 거처를 먼저 챙긴(학 1:4) 판단으로 고통스러운 궁핍의 징계가 임한 그때 학개 및 스가랴 선지자를 세우신 여호와의 가르침이 위로처럼 내려진다. 너희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오늘일지라도 나의 언약과 나의 신(학 2:5)은 너희 가운데 함께 있노라고. 인간의 능과 힘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체념일지라도 오직 나의 신(슥 4:6)은 모든 것을 이루어 가노라고. 다리오(Darius Ι. 521~486)로 하여 고레스 칙령을 찾게 하신 섭리를 통해, 전 재건을 가로막는 큰 산과 같던 이방 세력들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는 예언을 따라 역설적으로 전 건립을 돕는 처지에 놓인다.
성곽 중건의 과정에도 걸림돌을 두심은 여전했으니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은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 주위에 성벽이 세워지면 자신의 권세가 약화될 것을 우려해 집요한 방해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대제사장 엘리아십 가문과 사돈지간일 만큼 종교적으로도 깊숙이 간여하고 있었으나, 솔로몬의 범죄를 교훈 삼은 느헤미야는 앞서 2차 귀환을 지도한 에스라와 같이 이방과 통혼한 모습들을 타협 없이 쫓아내기에 이른다. 이를 구약의 모형적 사건, 곧 택함과 버림의 언약백성 여부를 전적 주권으로 정하심과 관련된 계시로 보지 않고 지금의 온정적 잣대로 접근할 경우 자칫 인종주의적 차별로 비칠 수 있겠으나,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결하신 그리스도 초림 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필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성전과 성곽 건립을 이끈 스룹바벨과 느헤미야가 속한 유다 지파로 오신 참 성전 그리스도의 신약 계보는 오히려 이방의 불결함을 드러낸다. 이방과의 혼혈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지 못하리라 이르셨으나, 모압과 여리고의 여인이 예수의 세계(世系)에 담김은 바울이 가르친 이면적 유대인의 은혜로운 의미를 알게 한다. 광야 40년간 그토록 꿈꾸던 가나안에서 성전까지 갖추고 살게 되었지만,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했던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훈육 방침은 품에서 떠나 그립도록 기다리게 하심이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각 지체를 단기 속성이 아닌 장기 숙성으로 충만케 하실 것을 예표한 포로, 귀환, 그리고 중건까지의 150여 년은 돌아와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신 30:8)을 성취하신 여호와 살아계심의 역사였으며, 환난 속 오랜 인내의 연단을 주심은 끝내 소망처럼 다시 오셔서 아름다운 하나를 성취하실 주 예수 은혜의 영광 기쁘게 찬미토록 하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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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재규 집사(자유기고가) |
캄보디아를 다녀와서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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