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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작성일 : 25-09-24 21:3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일흔 하나. 철학, 신학의 시녀인가? 신학, 철학의 시녀인가?


보에티우스는 하나님의 궁극적 계획으로서 ‘섭리’와 그 섭리의 인과론적 전개 과정인 ‘운명’의 뜻을 분명히 구분하면서 동시에 서로 조화시키려고 한다. 운명의 주요한 특징은 인간 경험을 지배하는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 연결고리가 있다는 점이다. 인과법칙이 지배하는 운명 안에서 인간은 자기 기준으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져야 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를 그는 ‘자유의지’라고 보았다. 그리고 자유의지를 합리적 이성 중심의 철학과 신적 계시 중심의 신학이 만나는 지점으로 이해했다. 철학과 신학은 분리된 두 학문이 아니라, 궁극적 진리를 탐구하는 두 길이며, 인간 이성과 하나님의 계시가 조화를 이루는 지점에서 서로 만난다. 이하에서는 이들 만남의 성격을 비판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보에티우스의 대표 저서 『철학의 위안』은 표면적으로 철학적 대화체 형식이지만, 그 기반에는 기독교 신학의 전제(하나님의 존재, 섭리, 최고선, 불멸의 영혼)가 깔려 있다. 그는 의도적으로 성경·그리스도·교회 용어를 배제하면서 보편적 이성의 언어로 궁극적 기독교 진리를 논증하고자 한다. 보에티우스는 신앙인으로서 계시, 성경, 그리스도를 확고히 믿었다. 하지만 앞의 책에서 계시 없이 자연 이성만으로 하나님의 존재·섭리·최고선·영혼 불멸을 논증할 수 있다는 점을 시도했다. 후대 스콜라 철학(특히 아퀴나스)의 자연 신학의 원천을 만든다. 철학적 논리에 의해 기독교 신앙의 보편화를 꾀하므로 이교 지식인·로마 귀족층 누구에게나 기독교 진리가 전달될 수 있다고 보았던 보에티우스는 목숨이 경각(頃刻)이 달린 시간 속에서도, 신앙의 진리를 철학의 보편적 언어로 해석함으로써 죽음 앞에서 ‘이성으로도 도달 가능한 위안’을 시도한다. 성경·그리스도·교회 등의 핵심 개념들을 배제한 이유는 분명하다. 합리적 이성에 대한 확신으로 기독교 신앙을 보편화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특별한 신적 계시 없이 이성이 하나님의 섭리와 최고선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철학과 신학의 만남을 다루면서 보에티우스는 먼저 철학의 출발점은 이성(Reason)과 경험이며, 방법으로는 논리학·변증론·형이상학적 사유이고, 목표는 최고의 선·진리·행복에 있다고 보았으며, 이 모든 것은 최고선(Summum Bonum) 개념에서 종합된다. 반면 신학은 그 출발점이 계시(Revelatio)와 성경이며 방법은 신앙 고백과 교리이고, 목표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이며, 만나는 지점은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다. 이러한 구도에서 보에티우스는 철학적 사유가 계시의 진리를 확인하고 조명하는 역할을 하며, 계시는 철학적 사유가 완성될 수 있도록 바로잡고 최고선의 완성에 이르게 한다. 『철학의 위안』에서 그 만남의 장면을 보면, 철학(Philosophia)이라는 여인이 등장해 보에티우스를 위로하면서 변덕스러운 운명보다 불변의 최고선을 추구해야 함을 가르친다. 그 최고선은 모든 선의 원천이자 완전한 존재, 곧 기독교의 하나님을 뜻한다.

책 말미에서 보에티우스는 하나님의 전지(omniscientia)와 인간 자유의지 문제를 다루는데, 철학이 도달한 결론은 신학이 계시에 의존해 밝히고자 하는 하나님과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이러한 시도를 다른 분야에도 적용한다. 가령 『삼위일체론에 대하여(De Trinitate)』, (그리스도의) 『위격과 본성에 대하여(De Persona et Duabus Naturis)』 등에서도 철학의 주요한 사유 전략인 논리학·형이상학을 사용해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두 본성과 한 위격을 설명한다. 이렇게 보에티우스에게 철학은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로서, 이성의 빛을 통해 계시 진리를 이해하고 변증하는 역할을 한다. 철학과 신학은 진리를 향한 두 길이며,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 그리고 최고선에서 만나며, 철학은 신학을 이해·변호하는 도구로 신학이 궁극 진리에 이르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보에티우스에게 하나님의 전지하심(omniscientia)과 인간 자유의지(liberum arbitrium)의 관계는 고대와 중세를 통틀어 예지(豫知, praescientia)와 자유의지의 조화 문제에 대한 고전적 해답 중 하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전제와 그 반박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므로, 인간이 미래에 어떤 선택을 할지 미리 아신다. 그렇다면 그 선택은 이미 확정된 것이므로, 인간이 자유롭게 결정한다고 말할 수 없게 한다. 곧 하나님의 예지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보에티우스는 하나님의 인식은 ‘영원(aeternitas)’의 관점에 있기 때문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즉 과거·현재·미래가 하나님에게는 ‘모두 동시(tota simul)’에 현재로 존재한다. (그는 ‘철학의 위안’ 6장에서 ‘영원’을 ‘끝이 없는 삶의 전체를 동시에 완전하게 소유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사건을 순차적으로 경험한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사건을 한 번에 보고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이미 보고 계시신 것(praevisio)’이란 뜻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예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전체를 ‘동시에’ 관찰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예지는 인간의 선택을 강제하는 원인이 아니라, 마치 산꼭대기에서 길 전체를 내려다보듯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다. 가령, 우리가 내일 무엇을 선택할지 하나님이 ‘이미’ 보고 있다는 사실은, 그 선택이 우리의 자유의지에서 나왔다는 점을 배제·부정할 수 없게 한다. 보에티우스에게 자유의지는 스스로 정하는 이유와 판단에 의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며, ‘시간 속’ 인간 행위는 ‘자기 원인(causa sui)’에서 비롯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예지는 인간의 행위를 미리 알고 있을 뿐이지 강제하지 않는다. 모든 시간을 ‘한 번에’ 직관하는 영원한 인식인 하나님의 예지는 시간 속에서 자기 판단과 의지로 선택하는 자유의지와 충돌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예지는 전체를 동시에 관찰하는 차원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지 인과론을 강제로 집행하는 것을 말하는 바는 아니다. 보에티우스에게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 자유는 논리적으로 양립 가능하다. 이러한 논리는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에서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며, 중세 스콜라 신학에서 ‘영원한 현재’ 모델로 표준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이성 중심의 철학으로 계시 중심의 신학을 파악하려는 시도에서 우리는 ‘관찰에 기반을 둔 예지론’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작정 섭리에 기반을 둔 예지’를 약화하고 왜곡한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한다. 작정하시지 않은 것을 그냥 미리 보기만 한다는 판단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약화시킨다. 자유의지의 근거를 ‘자기 원인성’에 둔다는 주장도 용납할 수 없다. 피조물은 자기 원인을 가질 수 없다. 인과론 구조에서 아무리 분명한 원인 제공을 인간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자체를 자기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기 원인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작정 섭리 그 자체를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미리 보기만 하는 존재로 보는 ‘관찰자 신론’은 하나님 작정 섭리론에 나타난 신적 의지와 계시적 목적론을 약화시킨다. 하나님은 단지 알고 계시는 존재가 아니라, 뜻하신 대로 성취하시는 전능자이다. 또한 ‘예지는 강제가 아니므로 하나님은 인간 행위를 강제로 몰아가는 필연성을 갖지 않는다’라는 보에티우스의 주장에서, 하나님의 작정 섭리론에서 ‘필연’의 뜻은 본래 계획한 것을 반드시 성취하는 결과의 ‘확실성’을 뜻한다.



<280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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