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원형
3. 성경은 죄인의 눈으로 읽을 때 진리의 세계가 보입니다. We can see the Word of truth only through the eyes of sinners.
지난 번 까지는 성경의 기록 목적과 성경 자체의 객관적인 논리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살폈습니다. 오늘은 조금 각도를 달리해서 성경의 객관적인 진리를 바라보는 독자인 우리가 어떤 자세와 태도를 취해야 하는 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이 점은 성경 그 자체에 대한 관점 못지않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절대 객관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책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접근하는 자의 태도에 따라서 성경 그 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무궁무진한 진리가 드러나기도 하고, 반대의 경우 오히려 감추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깨닫고 믿은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현상적인 이유를 분석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을 죄인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자칭 “의인”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하신 표적적인 사건들을 목도했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과 함께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거부하게 되며, 고린도전서의 표현대로 결국 걸림돌에 걸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주된 이유는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와 어리석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관한 책인 성경도 마찬가지의 논리가 적용이 됩니다. 성경은 마치 살아있는 인격적인 존재 같아서 성경에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진심으로 갈망하고 사모하는 영혼에게만 그것이 지니고 있는 아름답고 놀라운 진리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입니다. 즉 성경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어떤 인간적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들의 인위적인 방법과 접근에 의해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죄인의 눈으로 볼 때에라야 그 본질을 드러냅니다. 즉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죄 있는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신령한 계시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세상의 어떤 책과도 다른 특징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성경의 말씀 앞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임을 발견하고 오직 길과 진리로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과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는 멸망의 길이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스스로가 조금이라도 지혜와 덕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철저하게 가려지는 신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지는 것 자체가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자신이 어리석고 패역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복음의 지혜로 들어가는 입문이라는 놀라운 역설이 성립됩니다. 아담의 타락이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신령한 눈을 잃어버린 죄인인 인간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결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못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에게 접근하였고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복음서 전체의 기조는 인간의 죄성이라는 분기점을 중심으로 하여 구원과 멸망의 문제를 예리하게 갈라내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원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단히 자신이 구약에 언약된 대로 택한 언약 자손을 대속해 주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말씀과 표적적인 사건을 통해 증거 하지만 스스로를 지혜가 있는 의인으로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 예수님의 가르침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마태복음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 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5-27)
이처럼 성경은 참으로 신묘막측한 책입니다. 오늘날 일반 학문이 발달하여 성경을 역사학적, 문학적, 철학적, 교육학적 등의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기록되었으며, 인간의 문학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고 더 나아가서 교육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연구와 접근이 가능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접근들을 가지고는 결코 성경의 본질적인 의미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차원들은 성경의 본질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성경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한 현상적이고 지엽적인 혹은 방편적이고 도구적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 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기록된 신학적인 책, 즉 하나님을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몇 년 전에 한국에서 김용옥 교수가 대중매체의 강의를 통해, 그리고 캐나다의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가「예수는 없다」라는 책을 써서 전통적인 성경적인 예수님 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왔습니다. 그들의 입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택한 백성의 죄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성경적인 주장은 액면 그대로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군신화처럼 초대 교회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화적인 가공물이며 예수는 도덕적인 인물에 불과 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적인 사건들의 역사성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도덕적인 인물로서 설정해놓고 성경을 도덕적인 책으로 전락시킵니다.
그러한 주장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인의 눈으로 성경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학자의 눈으로, 그리고 스스로가 도덕적인 의인의 자리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님 당대의 일만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일어 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깨닫게 되는 길은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피조자의 자리에서, 죄인의 눈으로 보게 하셔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다음 번 글에서 왜 성령의 인도가 있어야 성경이 보이는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만날 때 까지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The reason for refusing Jesus as their Savior is that they do not realize they are sinners. You can see the essence of the Bible only if you read it through the eyes of a sinner. The only prerequisite for understanding the Bible is your awareness of your sinful state.
Now there are many Pharisee-like people who are blind to the truth. Such blindness could happen to any of us. We need to pray hard so that we can see the truth of the Bible. We need to pray hard so that God lets us see the Bible through the eyes of a si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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