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조(列祖) 시대의 역사 : 서언(序言)
구약 배경사 산책(4)
Ÿ (B.C. 123)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며 오직 아버지만 아심(마 24:36)을 명시하셨음에도 세대주의자들은 성경 중의 숫자를 액면 그대로 수용해 종말의 때를 알 수 있다는 허언을 일삼는다. 6일간 창조하시고 다음날 안식하신 창세기의 기록을 뼈대로 하루가 천년 같다는 베드로의 글을 살붙여 6천 년에 천 년을 더한 구조를 도출한 이들은, 주후 2000년을 전후한 재림 및 천년왕국의 시작을 믿었다. 그 6천 년의 근거는 17세기 성공회의 어셔 대주교가 산출한 아담 탄생 연도(B.C. 4004)였고, 이에 신약의 2000년을 더했던 것이다. 아직도 상당수 고대 근동 도시들의 위치 파악조차 힘겨운, 제한된 증거의 고고학상으로 그나마 신빙성 있는 연대의 상한선은 B.C. 2000년 즈음의 아브라함 때까지로 파악된다.
성경의 신적 영감(靈感)과 통일성에 의문을 제기한 19세기 문헌비평의 권위자 벨하우젠은 모세 5경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거부하였다. J·E·D·P로 명명된 여러 문서가 독립적으로 집필되었고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최종 편집된 것으로 보았던 그는, 예수와 바울에 의해 5경의 기자로 모세가 확언된, 곧 신구약이 상호 근거를 이루는 성경의 자증(自證)을 인정치 않았다. 하지만 그의 학설에 따르자면 문서의 ‘편집’이 있을만한 시기인 B.C. 2세기 후의 사해 사본이 오늘날의 성경 형태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 B.C. 10세기 이후 소멸된 것으로 알려진 근동의 여러 풍습들(장자권의 매매, 구두 유언의 효력 등)이 모세 5경에 등장하는 사실 등은 네 개의 문서 중 어느 것도 발견되지 않은, 문서가설의 허구성을 방증(傍證)한다.
근자의 고고학이 성경의 역사성에 공헌한다 하더라도 이를 과신함은 자칫 주객전도(主客顚倒)일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마지막 장자 죽음의 재앙 후 열렸던 파라오의 마음이 어떻게 다시 닫혔는지 고고학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함무라비의 행보가 일반 근동사에서 큰 관심의 대상일지언정 성경은 이를 취급하지 않는다. 1600여 년간 40여 명의 기자들을 일관된 논리로 감동케 하신 기록 목적은 본질상 사망의 죄인을 오직 영생의 은혜로 찬양케 하실 하나님의 자기계시이며, 이를 위한 도구적 방편으로 필요한 역사적 사실만을 성경에 등장시키신다. 열조 시대 근동의 복잡다단한 역사를 살핌은 그 자체로 진리인 성경 기사의 어쭙잖은 증명이 아닌, 기록하신 시대의 사회적 혹은 문화적 맥락 속에 보다 심도 있는 이해를 구하는 데 있을 것이다.
서양사 개론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주전 13세기부터 서술되는데, 이는 이집트 19왕조의 파라오 메르넵타 비문에 그의 공격 대상 중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하는 고고학적 증거에 근거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그 이전의 아득한 역사를 웅변하고 있으며, 아울러 열조들의 연대에 해당하는 고대 근동의 문헌과 유적들은 아브라함 등 족장들의 생활상이 당대와 유사한 역사성을 갖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형상화된 신기루’ 같은 후대(B.C. 8세기경)의 문학적 허구로 아브라함을 간주한 벨하우젠의 이론은 결국 궁색함을 드러내고 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음(전 3:1)을 가르치신 여호와께서는 악과 선을 일반으로 다루시는 절대 주권으로 기왕의 역사를 진행하셨다. 르네상스 당시 인간 이성에 가치를 둔 합리주의적 판단이 유행할 시기에 루터와 칼빈을 들어 성경 중심의 신본신앙을 세우셨으며, 성경 기사의 비사실성을 신랄히 공박하던 실증적 자료비평이 준동할 무렵 근대고고학 및 성서고고학이 형성되도록 하셨다.
인본주의·다원주의·자연주의로 대별되는 세속주의의 만연 가운데, 성경 자체의 내장된 논리에 주목하는 개혁을 일으키신 섭리의 의미를 새삼 되새기며 아브라함 시기의 역사적 배경을 다음 글에서 살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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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재규 집사(자유기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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