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3-11-10 19:1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다윗 왕국의 건립을 준비케 하신 자, 사무엘

성경 속의 인물 (15)


‘사람들은 신(神)이라는 단어를 통제, 압제, 독선과 동등하게 생각한다’라며 영국의 한 청년이 TV 화면 속에서 이야기한다. 이미 이천년 전의 일인 십자가 구원 따위는 오늘날 필요 없다는 자신에 찬 확언은 수년 전 방영된 SBS 스페셜 ‘신의 길 인간의 길’의 제작 의도를 명확히 함축한 것이었다.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어야 한다는 절대성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종교 간 협력을 지향하는 신학자의 발언을 통해 열린 시대에 뒤쳐진 세뇌 받은 자로 그려진다. 방송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정도가 가장 높은 성조기(星條旗)의 나라가 살인율과 청소년 낙태율 또한 가장 높다는 그래프를 제시하면서, 성경의 절대권위를 강조하는 주장을 패권주의의 위선적 독단과 교묘히 일치시킨다. 이의 대표격으로 등장하는 모 대통령이 ‘내 마음을 변화시킨 예수 그리스도’라 고백한 인터뷰는, ‘종교란 추악함을 가리기 위한 핑계’라는 한 시민의 인터뷰와 대조를 이루며 슬며시 비난의 날이 세워진다.

구약의 대적은 이방 세력들이었으나, 신약의 대적은 사단의 사주를 받는 육신의 교만한 소욕들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근원적 죄성을 가진 군상들이 선악의 기준은 각자의 개성과 상황에 따를 뿐이라는 상대주의의 시류에 허우적대는 오늘날은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삿 21:25)’ 과거와 너무나 흡사하다. 그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던 시절에 다윗에 기름을 부어 왕국을 준비한 사사 사무엘이 출현한다. 자식이 없어 멸시받던 한나에게 은혜로 출산케 하셔서 죽이심과 살리심, 낮추심과 높이심을 전적으로 주관하시는 절대자께 올리게 하신 감사의 기도는 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심에 기뻐한 마리아의 송가(눅 1:48)로 이어진다. 모친의 서원대로 여호와께 드려진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 밑에서 훈육되어지는데, 직접 여호와께 선지자의 소명을 받은 은총 깃든 성장 과정은 불량자로 표현된 제사장의 두 아들과는 구별된 것이었다.

가나안의 산당처럼 성소를 타락시킨 자식을 엄히 책망치 못한 엘리의 나약한 사랑은 결국 두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우월한 철기를 보유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경건의 모양만을 갖춘 홉니와 비느하스는 실로에서 가져온 언약궤를 메고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내면적 계시의 말씀보다 외형적 나무 법궤와 돌판의 계명을 숭상했던 그들을 여호와는 철저히 패망시키신다. 오늘날 성경 원본을 없애버리셨으나 이는 엘리의 두 아들처럼 외형의 물질을 우상처럼 숭배치 못하도록 하심이었으며, 나아가 계시의 ‘모든’ 말씀(눅 1:37)은 능치 못하심 없이 이루신 언약 성취의 역사로 흠결 없는 원본처럼 신약의 성도에게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여호와의 언약을 기억하도록 깨우친 영적 스승이자 블레셋과의 악연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였던 사무엘이 어느덧 늙고 두 아들은 부패하자, 백성들은 왕을 세워줄 것을 요구한다. 사무엘의 경고는 수립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열방과 같이’라는 왕권의 성격 및 여호와의 택하신 자(신 17:15)를 기다리지 못하는 인간 기준의 조급함을 지적한 것이었다. 백성들의 첫 환호는 그보다 더 준수한 이가 없던 사울이었고, 사무엘의 첫 판단은 뛰어난 용모를 가진 이새의 장자 엘리압이었으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의 예정된 선택은 외롭게 양떼를 돌보던 막내 다윗이었다. 그 유다의 계보에서 언약대로 오신 메시아께서 당부하신, 그리고 걸어가신 길은 넓고 화려한 ‘인간의 길’이 아닌 좁고 초라한 ‘신의 길’이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재규 집사(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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