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5-08-02 14:2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제사 회복과 경건의 길

banner

ƴڻ罺 (̶ ũ νŽ )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가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으로 쓰임받기를 소원한 바울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도록 연습하기를(딤전 4:7) 당부했다. 구약에 덧붙여진 유대적 전통의 신화들은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한 것이라 단정하는 영지주의(Gnos-ticism)로 나아갔는데, 바울은 이러한 미혹을 경계하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평강을 향한 연단을 받도록 격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절대 주권자께서 그 영광의 계시를 위해 인생의 모든 형통과 곤고를 일반으로 섭리하심을 수긍하는 전적 신뢰란 쉽게 형성되지 않는다. 진퇴양난의 절망 중에 홍해를 가르신 권능으로 사백 년 동안 참 아버지를 잊고 살던 이스라엘 자손의 거국적 찬양이 터지게 하셨으나(출 15:1), 엄청난 기적을 목도한 직후의 몰골이란 마라의 쓴물에 대한 현실적 불평이었다.
 불가능이라 체념했던 날에 성전과 성곽을 다시 세우시고 유다 자손을 보호하신 신실한 손길을 생생히 경험했다면 무언가 달라질 법도 하련만, 말라기 선지자의 책망은 앞선 어리석음의 반복을 통렬히 드러냄이었다. 또다시 처음의 열정은 시들었고 여호와 신앙은 습관적인 일상의 안일한 매너리즘으로 전락해 갔다. 대체로 느헤미야의 활동기와 겹치는 말라기의 시대는 아하수에로의 아들 아닥사스다(Artaxerxes I. 주전 465~424)의 통치 후반기에 해당하는데, 일반 문헌에서 감정 기복이 심한 권위주의적 폭군으로 묘사된 아닥사스다의 마음은 여호와의 특별한 섭리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에게는 호의적으로 작용하여 2·3차 귀환이 이루어졌고, 특히 에스라에 내린 조서는 사법권까지 부여한(스 7:25) 파격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여전한 정치적 지배 아래 백성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성전이 재건된 지 어언 백여 년이 흘렀지만, 과연 여호와의 존재가 어떤 이로움을 가져다주었는지에 대한 세속적 회의는 환멸, 나태, 방종으로 흘러갔다. 더러운 제물을 바치면서도 외려 귀찮아하는 뻔뻔함, 약한 동족을 돕기는커녕 착취하고 노예로 부리는 가증함, 조강지처를 내치고 이방신을 섬기는 여인과 잡혼하는 역겨움, 견책해야 할 제사장조차 레위 언약을 파기한 채 편파적으로 율법을 집행하던 몰상식보다 더 심각한 근원적 병폐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영적 불감증이었다. 어쨌거나 성전 제의는 올리지 않느냐 식의 껍데기 신앙은 왜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투정, 베푸신 사랑의 신령한 은혜를 잊은 채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느냐 따지는 속물적 불평으로 표출되었다.
언약 성취의 소망이 희미해지던 때,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보내신 말라기는 ‘나의 사자(使者)’의 뜻을 가진다. 이는 도저히 구제 불가능한 이스라엘을 위해 보내실 언약의 사자(말 3:1), 곧 구약 백성이 대망하던 메시아로 이어지며,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빛을 비출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귀결된다.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욥의 찬양처럼, 말라기는 여호와께서 영원한 순금이 되도록 성도를 연단하셔서 메시아처럼 의로운 제물로 살게 하시리라 예언했다. 열 가운데 하나가 온전함으로 나머지 아홉도 거저 온전해지는 십일조의 원리는 우리가 회개했기에 용서하심이 아니라 당신께서 조건 없이 용서하심이 우리를 감격의 회개로, 나아가 영적 예배의 삶으로 이끌게 되는 아름다운 은혜의 논리와 상통한다.
부정한 제례로 내가 그들을 더럽혔음은 멸망케 하여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였음이라는(겔 20:25~26) 해석은 제사 부패와 회복의 주체 모두가 한 분임을 밝히나, 한편 닦아줄 눈물을 왜 굳이 흘리게 하는지의 반문이 제기된다. 극단적 선악이원론의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란 그 자체로 악한 것이므로 거룩한 그리스도의 성육신 및 부활은 모순이라 주장했으나, 성경은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가현설(假現說)을 철저히 논박한다. 돼지우리의 눈물 아니고서는 극진한 사랑을 확신할 수 없는 탕자를 위한 아버지 기도의 이슬이 은혜만을 구하는 걸음을 재촉하였듯, 참 신이자 참 인간이신 예수께서 사랑하는 자기 사람들을 위해 올리셨던 심한 통곡과 눈물의 간구와 소원(히 5:7)은 고단한 매일을 걷는 우리를 창세 전 예정하신 경건의 선한 길로 인도할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재규(자유기고가)

‘모두가 꿈꾸는 그곳’, 마을?
영적 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