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5-08-02 15:1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모두가 꿈꾸는 그곳’, 마을?


“학교는 지역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교육은 학부모와 교사와 학생의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학교는 공동체의 가치 기반인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풀무학교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풀무학교는 충남 홍성에서 50년 넘게 마을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실체다. 2012년부터 시작한 서울시의 마을공동체사업이나 경기도교육청의 마을교육공동체사업 등은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혹자는 새로운 교육감의 등장으로 기존의 혁신교육이 약화되고 또 다른 사업의 시작으로 현장의 혼란을 부채질할 것이라는 부정적 견해를 내놓는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단위학교의 혁신학교로 시작해서 주변의 학교들을 묶으면 ‘혁신클러스터’, 지역을 묶으면 ‘혁신교육지구’ 하듯이 혁신교육지구를 마을단위로 분화시켜 내실화를 기하자는 것이다.
 마을교육공동체의 표면적 시작은 학교와 지역이 협업하여 학교 밖 교육을 활성화한다거나 지역의 커뮤니티 중심으로서 학교의 역할과 기능의 주목에서 나왔다. ‘마을을 통한 교육(learning through community)’이나 ‘마을에 관한 교육(learning about community)’, ‘마을을 위한 교육(learning for community)’으로 요약할 수 있다. 말하자면 마을의 교육인프라와 인적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교육하고,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에 대해 좀 더 이해하여 애향심을 기르게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완성되었을 때 학생들은 마을에 도움이 되는 인적자원으로서 선순환의 주요 접점이 될 것이다. 학생들을 학교라는 섬에 한정시켜 경쟁을 통해 ‘각자도생’시키지 말고 지역 차원에서 ‘우리’라는 공동체로 함께 나아가자는 취지다.
 이러한 정책의 이면에는 학생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현실에서 마을이 ‘행복 찾기’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시작되었다. 행복의 전제가 마음의 평안이라고 한다면 마음의 평안은 진리의 수용에서 얻어진다. 하지만 공교육은 접근방식이 다르다. 정책을 통해 문제를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기존의 정책들은 왜 실패해 왔는가. 이는 중앙집권방식, 선출직 후기의 레임덕 현상, 하향식 문화, 연결성과 분절성 문제, 정량지표와 표준화 등으로 인한 다양성과 독립성 훼손 등과 관련이 있다.
마을교육공동체 정책도 예외는 아니다. 다른 정책과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마을’ 정책은 ‘구별 짓기’라는 거대 장벽이 있다는 점이다. 올 초에 안동에서 있었던 초등학교 신입생 예비소집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고급아파트, 임대아파트, 주택 등으로 나뉜 줄서기에서 많은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상처를 받은 것이다. 학교 측이야 행정적 편의성에서 그랬다 하지만 이는 무의식적으로 내재한 구별 짓기의 단적인 사례다. 얼마 전 필자가 거주하는 지역 커뮤니티 블로그에 올라온 상처받은 엄마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소아과에 대기하고 있는 와중에 비슷한 또래의 엄마가 친구하자는 취지로 말을 건넸다고 한다. 흔쾌히 받아들이고 정담을 나누는 도중에 사는 곳이 어딘지를 물어보더란다. 주택이라고 하자, 상대방은 안색이 변하고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분은 복잡한 감정에 눈물이 나왔고 생각할수록 슬펐다고 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도 전이된다. 필자가 여러 지역에서 근무했지만, 아이들도 아파트의 평수를 따지며 차량이 무엇인지를 따져 구별 짓는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심한 ‘집단 따돌림’도 구별 짓기의 일종이다. 농어촌 학교의 경우, 학부모들 간의 알력은 사는 곳이 전원주택이냐 아니냐에 달린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표가 나지 않지만, 학부모회장과 같이 감투를 쓴 학부모가 추진하는 일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민원은 어떤 주택이냐에 달린 경우가 흔하다.
현재 경기도에서는 50개 내외의 마을교육공동체를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그것의 성패는 위의 ‘구별 짓기’라는 퇴행적 현상을 어떻게 극복하는지에 달려있다. ‘모두가 꿈꾸는 그곳’은 ‘자이’가 아니라 ‘마을’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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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원형
제사 회복과 경건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