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5-08-23 12:0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기독교 신앙의 원형


1. 문제 제기
2. 문제의 원인
1) 신앙 정체성 혼미의 원인
2) 신앙 정체성 혼미의 양상
첫째, 신앙의 세속화이다.
둘째, 신앙의 도덕화이다.
셋째, 신앙의 도구화이다.
3. 신학적 치유의 방향
1) 서구신학을 넘어서, 그 기여와 한계
2) 성경적 신학정립에 의한 신앙의 정체성 확인
4. 결어


2. 문제의 원인
2) 신앙의 정체성 혼미의 양상
첫째, 신앙의 세속화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성경 진리에서 확인받지 못하면 설교는 자연스레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쪽으로 흘러간다. 이것이 설교의 세속화이며 그것은 그대로 성도 신앙의 세속화로 이어진다. 많은 경우 한국교회 성도는 세상의 성공이 마치 신앙이 좋은 것처럼 간주한다. 반대로 세상에서 실패가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곧바로 대입한다. 이는 신앙의 타락이며 변질이다.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시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땅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경외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풍요의 신으로 상징되는 바알 신을 섬기는 것과 방불하다.
현대인들의 가치관은 철두철미 자기 행복이다. 그야말로 행복이 현대인들의 우상인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자기 행복 추구는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현대에 와서 물질적 여유가 생겨나면서 이 추구의 방식이 더욱 노골화되고 더욱 이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정신적이고 규범적이며 형이상학적 추구를 하던 과거의 가치관이 붕괴되면서 현대인들에게 남은 것은 물질주의적이며, 육체 중심의 쾌락주의적 가치관이다. 이는 교회에 대한 강력한 도전의 세속주의인 셈이다. 그리하여 교회 생활이 자기에게 직접적인 세속적 유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세태가 되었다.
이런 현대인의 그릇된 가치관을 거슬러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깨달아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일이며, 오히려 이웃을 위해 땀 흘리는 사랑의 수고와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 속에서 참된 삶의 보람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진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교회는 가르쳐야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은 지극히 유혹적인 현대적 바알 신, 즉 세속주의의 망령에 휘둘리고 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그의 엄위하심보다는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입맛에 더 민감한 강단은 성도들의 신앙에 거짓 약속의 복음을 심어주고 있다. 인간이 진리를 떠나,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의 깨달음을 떠난 자기 행복의 추구가 얼마나 행복의 덫이 되는지를 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점차 흐려지고 결국 세속화 된다. 자신의 심리적 만족과 위안을 얻기 위해 교회를 나오고 그것이 신앙 내용의 중핵을 이룬다. 그래서 삶의 예기치 못한 시련이 오면 신앙의 근본이 흔들리게 된다. 교양강좌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마음 조절법, 혹은 어떻게 해야 세속에서 잘 살아갈 것인가라는 일종의 처세법, 예수를 믿었더니 성공했다고 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간증들, 참으로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강단은 변질되어 가고 성도들의 신앙은 세속화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간다. 도무지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하늘의 참다운 신앙의 기쁨을 잃지 않았던 신앙의 선진들의 기개와 기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둘째, 신앙의 도덕화이다.
이는 강단의 도덕화로 말미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 관계의 아름다움을 포함하되 그것이 우선적이거나 근본은 결코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위대한 선포 앞에 하나님을 알아 경외하는 삶이 근본이다. 모든 인간관계의 갈등과 고통은 인간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므로 비롯된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죄악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수직적 차원의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와 순복이 중핵이며 이것이 이루어지는 만큼 진정한 의미의 인간관계의 아름다움, 즉 기독교 윤리적 차원의 결과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한국교회 강단이 그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위대하심에 대한 선포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얼핏 들으면 좋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엄밀하게 말해 앞의 세속화 현상 못지않은 복음의 변질이다. 오히려 더욱 심각한 변질일 수가 있다. 세상의 도덕이란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규범체계일 뿐이다. 예수님 당대에 가장 의로운 척하며 살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장 예수님의 대적하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성도를 두신 것은 세상의 의와 자기 자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살아가게 하심에 그 목적이 있다.
성경은 참으로 하나님의 의가 아니면 인간이 얼마나 죄인이며, 그 죄를 언제나 감추기를 힘쓰며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살아가려는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적나라하게 밝힌다. 그런 인생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절실하며 소중한 것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 강단은 계시적 복음에 충실하지 못한 채 점점 인간 행동의 촉구와 권면의 차원으로 빠져 들어간다. 성경, 특히 바울 서신 후반부에 나타나는 성도생활에 대한 권면은 세상에서의 도덕적 차원의 교훈과는 천양지차로 다르다. 말하자면 전자는 복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삶의 열매이기에 타락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성도의 마음에 역사하여 이루시겠다는 것을 증거하는 계시적 권면이지만, 후자는 인간 스스로가 도덕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있다는 전제아래 인간의 자기 의를 추구하는 허탄한 열심의 산물이다.
신앙의 도덕화가 낳는 폐해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 성도들은 점차 자신의 약점과 허물을 성도 교제에서 내놓지 못한다. 그래서 진정 허물 많은 인생에게서 드러나는 약점들을 서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진지하고 속 깊은 교제가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생활에서 점차 그럴듯한 겉모양을 갖추어야 하고 그 결과 교제는 형식적으로 겉돌며 피상화된다. 심한 경우 서로 자기 행위의 자랑과 경쟁으로 이어진다. 고린도교회의 양상과 같이 서로 파당을 만들어 시기하고 분쟁하는 것은 자신의 도덕적 의와 자기 자랑의 허망함을 충분히 벗어버리지 못함에 있었다. 한국교회 안에도 이런 양상과 어려움은 만연되어 있어 보인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경우 한국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진실성 혹은 신앙의 본질을 하나님과 관련시켜 이해하기 보다는 드러난 행동에 의해 자신의 신앙의 진실성을 확인하려고 한다. 일차적이고 본질적인 신앙의 내용이 확증되지 않은 채 신앙의 문제를 드러난 행동의 차원에서 확인하려고 할 때 그것은 신앙의 본질을 대단히 왜곡하게 되는 위험성을 가지게 된다.
타락한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사고와 행동을 통한 자기의 도덕적 의의 드러냄과 그를 통한 자아실현이다. 또한 그런 자기 의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결코 아니다. 즉 불신앙적 삶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므로 모든 죄악된 인생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과 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와 능력을 믿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는 것으로 특징지어 진다. 성경은 이를 허탄한 자기 자랑이요, 악이라고 규정한다(약 4:16). 우리 인생은 말씀의 능력에 의해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언제나 이런 유혹에 쉽게 빠져 들어 간다. 심지어는 신앙의 미명아래 자신의 도덕적 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연약한 우리 인생의 모습인 것이다.
한국교회, 아니 우리 자신은 언제나 이 점에서 허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나님이 한시라도 붙들어 주지 않으시면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눈보다는 인간의 눈을 먼저 의식하고 표정관리와 외형의 치장을 하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죄된 우리 인생의 뚜렷한 특징인 것이다. 진정한 신앙은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도덕적 행동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아는 지식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서의 내면의 평화와 감사라는 인격적인 특성으로 규정되는 신령한 실체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은 알맹이를 상실한 껍데기가 될 뿐 아니라 자칫하면 외식으로 치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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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의 개막
‘모두가 꿈꾸는 그곳’,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