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원형
기독교 신앙의 원형
1. 문제 제기
2. 문제의 원인
1) 신앙 정체성 혼미의 원인
2) 신앙 정체성 혼미의 양상
첫째, 신앙의 세속화이다.
둘째, 신앙의 도덕화이다.
셋째, 신앙의 도구화이다.
3. 신학적 치유의 방향
1) 서구신학을 넘어서, 그 기여와 한계
2) 성경적 신학정립에 의한 신앙의 정체성 확인
4. 결어
2. 문제의 원인
2) 신앙의 정체성 혼미의 양상
셋째, 신앙의 도구화이다.
신앙의 내용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확인하지 못하면, 즉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알아 가는 신앙의 정체성을 성도들이 자기의 삶속에서 누리고 최고의 삶의 가치로 확인받지 못하면 신앙은 변질된다. 자연히 그런 의미의 신앙은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가 된다. 말하자면 신앙이 인간적 삶의 행복과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된다. 이는 주객전도의 현상이 된다. 이것이야 말로 세속주의적 가치관 앞에 신앙의 절개와 가치가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이야 말로 우리 신앙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이며 유일한 가치이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그 신앙을 가지고 경외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기까지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 감사하고 경외하는 삶의 원리이다. 그 신앙의 고귀함은 이 세상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이다.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증거 함으로 신앙의 궁극성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 3:7~9).
이런 바울의 고백처럼 성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는 신앙이 이 세상의 가치와는 결코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이다. 바울은 이를 깨달았기에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믿는 가치를 위해 기꺼이 버릴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위대성이요,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힘이라고 했다(히 11:38). 그러므로 이런 기독교 신앙은 관념적인 수준의 환상이나 자기도취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역사 섭리와 언약에 신실하심과 자비로우심을 믿기에 역경 중에도 담대하며 범사를 통해 하나님을 인정하며 감사하는 인생이 되어가는 실제적인 힘을 가진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이런 살아계신 하나님, 그리고 참으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받고 경험하지 못하면 성도의 신앙은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 기개와 긍지를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자연히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능적 욕망이 앞서며 신앙은 그 욕망의 성취를 위한 수단적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신앙의 타락이 아닌가!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의 기도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런 현상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기도란 도무지 무엇인가? 기도는 인간의 자기 욕구가 이루어지길 기원하는 주문이 아니다. 기도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단마디로 하나님의 언약된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의, 그리고 우리 성도가 먹어야 될 하늘의 신령한 양식을 구하는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박해받고 고난 받는 것도 불사하는 삶을 구하는 것이 기독교의 기도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해석하여 전달 받지 못하면 자연히 기도는 이방종교의 주문처럼 변질한다.
“기도는 만능이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아직도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기도의 부족이다”, 이런 근거 없는 허탄한 무속적인 의미의 기도가 아직도 한국교회의 저변에 깔려져 있다. 이러 현상이 바로 신앙의 도구화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앙의 도구화 현상은 그런 저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매우 고상하게 보이는 차원에서도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기독교 교회가 사회정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오도하여 신앙을 도구화하기도 한다.
사회정의는 교회의 교회됨의 부산물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 될 수 없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진리의 수호와 전승에 있다.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복음진리가 바르게 증거 됨으로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런 인생이 사회에서 건실하게 살아감으로 사회에 빛이 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인생은 진리가 아니면 어떤 경우에도 바르게 될 수 없는 죄인이다. 교회는 그 진리의 진리 됨을 간직하고 변질 없이 증언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한다. 말하자면 진리에 입각한 바른 신앙을 키우고 장려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요, 모든 삶의 근본적인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의 진리에 입각한 신앙이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신앙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가정생활도, 사회생활도 하게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성도의 신앙을 단련시키기 위해 세상의 악한 정부를 통해서 핍박을 가하기도 하신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 제국이 그랬고, 한국교회 초기에 일제의 박해가 그랬다.
요컨대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자기행복, 사회정의, 세속적 차원의 교회성장과 같은 세상에 속한 가치들의 도구가 아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과 교회의 진정한 성장은 진리 안에서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규정되며 그것들은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그분으로 만족하는 아름다운 신앙의 부산물들이다. 때로는 하나님은 인간적 불행을 통해서도 교회가 무너지는 어려움을 통해서도 당신의 능력과 은혜의 깊이를 드러내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이점이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신앙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세속적인 가치를 위한 수단이 되는 비극과 혼돈이 일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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