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제1권 제5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명백성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종교성만으로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아무도 복을 접하는 데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미 앞에서 논의한 종교의 씨앗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 놓으셨을 뿐 아니라, 우주의 구조 전체 속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셨고 또한 날마다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눈을 뜰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본성은 사람이 파악할 수가 없고, 그의 신성은 인간의 지각의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지으신 만물들 속에 자신의 영광의 흔적들을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새겨놓으셨으므로, 전혀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조차도 무지를 핑계삼을 수가 없는 것이다.
위의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종교의 씨앗을 주셨고, 피조만물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몰랐다고 핑계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아래와 같이 논거한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창조 세계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고 가르치지만(롬1:19), 사람의 분별력으로 그런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사실로 인하여 사람이 핑계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일 뿐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칼빈의 말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종교성을 주셨으며,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완전성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몰랐다는 핑계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창조의 역사 즉, 자연계시 만으로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내적 계시에 의한 신앙의 조명이 필요하다고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피조세계가 그 지으신 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렇게도 많은 등불을 밝히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그저 헛될 뿐이다. 그 등불들이 그 밝은 빛으로 우리를 온통 적셔주고 있지만, 그것들 자체로서는 결코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가 없는 것이다.
칼빈의 이론을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종교의 씨앗(종교성)을 주셨다. 창조를 통해서 계시된 것만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그 불신에 대한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그리고 심판 등을 통해서 명백한 신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계시(창조)에 대한 칼빈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서 당신의 완전함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신인식의 -하나님에 대한 불신- 문제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고, 타락 이후부터는 자연계시를 통한 신인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내적 계시의 조명(신앙)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칼빈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내용이 틀리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좀 더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먼저, 계시의 성질과 방법에 대한 이해이다. 칼빈은 자연신학자들의 인식론을 염두에 두고 논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계시에 대한 모호성이 있다. 즉,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를 ‘자연계시’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신학자들의 철학적 개념인 ‘종교성’을 설명하고 있다. 자연계시의 철학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내재(內在)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이후에는 피조물을 초월해 계시기 때문에 피조세계는 자연법칙에 따라서 운행되고 보존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신학자들은 자연의 법칙을 통해서 증거된 창조와 섭리를 과학적인 이성이나 합리적인 이성으로 분석-실험-이해-판단하여 그 결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으로서의 자연계시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연신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칼빈은 자연계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종교성이 씨앗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칼빈의 의도는 인간이 타락한 이후부터는 인간의 자의적인 의지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자연계시를 말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칼빈은 자연신학자들이 사용하는 ‘자연계시’를 다른 개념으로 규정해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자연신학자들은 피조물(창조)의 존재개념을 자연법칙 즉,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것에 기초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과학적인 지식을 통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신(神)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으며 신에 대해 알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계시에 대한 용어개념을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각자가 규정한 ‘자연계시’의 개념으로 신인식의 유무(有無)를 논한다는 것은 논리상의 모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자연과 초자연이란 용어보다는 보편과 특수(기적)라는 말이 신학적인 의미로 볼 때 타당하며, 굳이 쓴다면 ‘자연계시’라는 단어보다 일반계시라는 표현이 의미상으로는 더 적절하다고 본다. 자연계시는 창조가 자연적(보편)인가 아니면 초자연(특수)적인가를 설명하는 계시방법상의 특성에 해당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칼빈의 논점대로라면 자연계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표현보다 일반계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어법이 더 명확하다. 이것에 대한 계시의 내용을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 본다.
계시는 성격상으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된다. 일반계시는 하나님께서 택자나 불택자 할 것 없이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구별 없이 주신 것이다. 즉, 창조와 심판을 통한 일반적인 방법으로써 우주와 역사 그리고 인생들을 심판 때까지 주관하시며,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서 자연적(自然的)이며 보편적 방법이나 초자연적(超自然的)인 특수한 방법을 동원하여 섭리하신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저주가 덮여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알기에 불충분한 성질을 갖고 있다. 반면에 특별계시는 하나님께서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자들에게만 특별히 주시는 것이며, 계시의 절정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것으로써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또한 특별계시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을 성취하시는 계시방법으로서 하나님의 권능과 역사로 이루시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보편적인 방법(자연현상)과 기적적 방법(초자연현상) 모두를 포함하는 용어이다.
계시의 방법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로 구분된다. 자연계시는 보편적인 방법으로서 창조법칙에 의한 우주-자연-동식물 등의 자연현상을 통해 주어진다. 초자연계시는 특수한 방법(이적, 기적)으로서 자연법칙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현상을 통해 주어진다. 하지만 자연적인 방법과 초자연적인 방법 모두는 하나님의 창조능력에 의한 초자연적인 계시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계시의 구분에 있어서는 방법상(자연, 초자연)의 분류는 큰 의미가 없으며,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다.
자연계시는 계시방법중의 하나로 분류된다. 그러나 칼빈은 자연계시를 혼란스럽게 사용한 결과 일반계시와 자연계시 그리고 특별계시와 초자연계시가 하나의 범주로 오해될 소지를 남겼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대상과 성질에 따라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되고, 방법상의 특성에 따라서는 자연적인 방법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구분된다. 일반계시로 드러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그리고 심판의 역사에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특별계시로 드러난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의 사역에서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방법이 포함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계시’란 베일에 가리어져 있던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그리고 사역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창조의 법칙과 능력으로 드러난 일반계시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어두워졌기 때문에 특별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실재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섭리를 뜻한다.
두 번째, 종교성에 대한 문제점이다. 칼빈은 인간에게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종교의 씨앗(종교성)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종교성은 있으나 구원의 효능은 없다는 주장을 하고, 믿음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그리고 심판의 사역을 통해서 신지식이 명백해진다고 논증한다. 칼빈의 주장대로라면 구원의 효능이 없는 종교성 때문에 불신(죄)의 책임을 인간에게 부과한다는 말인데, 이것은 구차한 발상이다.
인간의 종교성은 타락으로 이미 말살되었고, 영적인 죽음으로 참 종교적인 기능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즉, 영적으로 죽은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된 피조만물을 보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죄의 책임은 타락의 결과인 종교성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아담(인간)의 범죄에 있다. 즉, 아담이 범죄 했기 때문에 아담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역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지만, 하나님은 절대자이기 때문에 상대자인 인간이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자이기 때문에 상대자인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일반계시를 통해서 계시하셨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없었다는 핑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바울의 말은 타락 전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고, 핑계할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가 일반계시로 만물에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었기에 믿지 못했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성과 관련된 신인식의 문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특별계시의 방편으로 주어진 성경의 내용에는 초자연적,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윤리적인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런 문제들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첫째,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신앙지상주의자들에 대해서이다. 이들은 하나님은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믿어야 하며, 알고 믿는 것을 누가 믿지 못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는 이성으로 수납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신(神)을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이것이야말로 맹신이다. 그러다보니 신앙의 척도는 인간의 열심과 정성 또는 충성도에 따라서 가늠할 수밖에 없는 주술적인 방법으로 전락한다. 바울은 사도행전 17장 23절에서 경배의 대상을 인지(認知)하지 못하고 신앙하는 자들을 향해서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라고 말하면서 신앙의 대상에 대해서 확실하게 인지해야 할 것을 엄명한다.
둘째, 자유주의신학자는 타락한 인간의 이성으로 신(神)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신(神)과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인간에게 주어진 종교성으로 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성은 대화하는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관하여 사실로 일어나는 대화를 신지식으로 간주하며, 인간의 이성으로 자연법칙을 변별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에 미치는 하나님의 능력과 존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들이 말하는 자연신학은 자연법칙에 기초한 것으로서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이성으로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신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이성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미 객관성을 상실했으며, 영혼의 기능인 계시인식의 능력이 소멸된 상태이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의 이성으로 신(神)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은 인간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서 신(神)의 본질이 다양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神)이 인간을 찾아오신 계시종교의 절대성은 희석되고 신과 인간의 만남으로 형성되는 상대적인 보편종교로 전락하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이론이다.
셋째, 이것과 비슷한 이론으로 신앙지상주의나 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한 ‘신앙하는 이성’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형이상학적인 부분에 대한 것은 믿음으로 수용하고, 자연과학적인 기준이나 합리적인 이해를 요하는 것들은 이성으로 처리한다. 즉, 신앙으로는 표적과 이적을 증명할 수 없지만 사실로 수용해야 하며, 이성은 합리적으로 믿어지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변호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신앙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약속의 진리에 대해서 성령이 인간의 심정에 각인시켜 주신 것으로서 ‘이해보다는 확신’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말하는 확신이란,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전제된 용어가 아니라 무조건 사실로 믿는다는 의미이다. 확신이란 인간의 인격적인 지정의(知情意)의 작용을 통하여 알고, 느끼며, 결단하여 나타난 결과를 말한다. 그러므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고 확신한다는 것은 무지의 소치로 맹목적인 신앙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성경신학적인 관점의 신(神)인식은 타락한 인간 이성에 의한 신앙도 아니고 무조건 사실로 간주하는 신앙에 의한 이성도 아니다.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영적으로 사망한 상태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자의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영적으로 사망한 것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총제적인 기능을 완전하게 상실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을 성경은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상태라 말하는데, 이 기능은 ‘종교의 씨앗’이란 형태로 신인식에 대한 개연성이 전혀 없음을 거듭 확고히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혼의 거듭남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의 인지(認知)기능은 이성(理性)을 통해서 작용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하고, 반드시 거듭나고 중생한 이성으로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계시의 절정이신 그리스도께서 믿기로 작정된 자들의 영혼을 중생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특별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그리고 하시는 일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신학적인 신(神)인식은 하나님의 예정대로 믿기로 작정하신 자들의 영혼을 중생시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깨닫게 하신 다음에 믿게 하신다. 중요한 점은 중생한 이성에 의한 인식을 의미하며, 맹목적이나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깨달아 믿게 되는 인격적인 작용’을 통해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중생한 이성으로 특별계시의 도구인 성경을 깨달아 느끼고 결단해서 확립된 확신신앙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특별계시로 주어진 성경을 통해서 확고해지며, 성경을 통해 습득된 신지식이 축적(蓄積)되어야만 그 지식의 렌즈로 일반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를 명백하게 발견할 수 있다.
칼빈이 주장한대로 창조와 통치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확고히 할 수 있다는 명백성에 관해서는 성경신학적인 재정립이 필요하다. 칼빈은 ‘종교성’에 대한 명제로 신인식과 구원의 문제를 결부시켜 설명했으며, 신(神)인식의 방법으로 ‘자연계시’를 언급했다. 그 결과 타락한 종교성으로는 구원은 얻을 수 없지만, 신을 인식할 수 있다는 개연성을 남겨놓음으로써 모호한 종교성과 자연계시를 통한 신(神)인식에 문제점을 남겼다. 또한 계시의 방법인 자연계시와 계시의 성격인 일반계시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용하여 사용함으로써 일반계시와 자연계시를 동일한 범주로 취급하는 혼란스러운 결과를 초래했다.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첫째, 인간은 타락함으로 인하여 일반계시(창조-섭리)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종교성이 마비되었다. 그리고 칼빈이 말한 타락한 인간의 종교성은 보편적인 이방종교의 성질을 의미하는 것이지 참 종교로서의 절대적인 종교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인간의 종교성은 타락 전후의 상태에 따라서 완전하게 차별화되어야 한다. 타락 전에는 인간이 영(靈)적으로 살아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일반계시-창조-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타락 이후에는 인간이 영적으로 죽은 육체의 상태이고 피조만물에는 저주가 덮혀 있기 때문에 일반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전혀 인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종교성은 타락 전후의 시점과 인간의 상태에 따라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확고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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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제6장 성경의 필요성 |
제1권 제4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결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