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09-06-08 17:5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제1권 제7장 성경의 권위


칼빈은 7장에서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의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밝힌다.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성경의 권위가 A.D.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27권의 목차를 결정한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으며, 손상되지 않고 전수되어 왔다고 보장할 수 없으나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정경으로 확정했기 때문에 권위가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오늘날 지극히 해로운 한 가지 오류가 전반적으로 퍼져 있다. 곧, 오로지 교회의 동의가 있어야만 성경이 무게를 지니게 된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영원하고 침범할 수 없는 진리가 어떻게 사람들의 결정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기독교 교회가 그 시초부터 선지자들의 글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터를 두었다면, 그 가르침이 어디서 발견되든 간에 그것을 받아들인 일이 -그것을 받아들인 일이 없었다면 교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임으로- 교회보다도 시기상으로 앞서는 것이 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판단하는 권세가 교회에게 있어서 성경의 확실성 여부가 교회의 동의에 달려 있다는 식의 논리는 전혀 허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칼빈의 주장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가 있는 것은 교회가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터 위에 교회가 세워졌고, 말씀이 교회보다 앞서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성경의 진리성 근거에 대해서는 “성경이 진리라는 확신의 근거를 인간의 추리나 판단, 혹은 이성보다도 더 높은 것에, 즉 성령의 은밀하신 증언에 두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식의 주체로써의 성령에 대해서는 “모든 이론을 다 합친 것보다도 성령의 증언이 훨씬 더 훌륭하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말씀에 대해서 적절히 증언하실 수 있으므로, 그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확증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성령의 내적증거의 결과에 대해서는 “성령께서 내적으로 가르침을 주신 사람들은 진정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과, 또한 성경이 과연 스스로를 확증하므로 성경을 감히 증거와 이론에 예속시켜서는 안 되며, 우리가 가져야 마땅한 완전한 확신은 성령의 증거(증언)를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조명을 받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우리 자신의 판단이나 혹은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판단을 뛰어 넘어서, 성경이 사람들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입 그 자체로부터 우리에게 흘러나온 것임을 완전한 확신으로 -마치 하나님의 위엄 그 자체를 눈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확신의 의미에 있어서는 “이론을 따지지 않는 확신이요, 최고의 이성이 동의하는 그런 지식이다. 어떠한 이론을 가질 때보다 더 안정되고 더 든든하게 마음이 안식을 누리는 그런 지식이요, 또한 끝으로 오직 하늘의 계시에서만 나오는 그런 느낌인 것이다.”라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성경의 권위에 관한 문제는 오래 전부터 있어온 신학적인 이슈였으며, 이 점은 성경의 진리성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분명한 정리가 필요하다. 칼빈의 견해는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를 동일시하려는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의 주장을 일축한다. 칼빈은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인증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교회(공의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세워졌기 때문에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는 이론적인 증명보다는 성령의 조명에 의한 내적 증거로 확증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권위에 있어서 교회의 인증이나 전통적인 권위에 의한 해석 및 해명이 필요하지 않으며, 성경자체가 명확하고 확실하며 해석자는 성령이다. 그러나 칼빈의 논증은 ‘성경의 자증’이나 ‘성령의 내적조명’이란 명제는 정확하지만 체계적인 내용전개가 허술하다. 즉, 성경이 스스로의 권위를 입증하려면 어떠한 원리에 의한 논리체계가 구성되어 있다고 진술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칼빈의 주장은 설득력 없는 구호에만 머물게 될 것이며, 이런 칼빈의 취약점을 파고드는 반대이론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 칼빈과 반대되는 이론을 살펴보면, 첫 번째,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성경의 권위와 진리성을 ‘교회의 권위’ 아래 둔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게 된 원인은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회관에서 기인한다. 어거스틴의 교회관은 동서방 교회를 총칭하며 교파를 초월한 카톨릭을 의미할 뿐 아니라 교회의 권위에 철저하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그는 카톨릭 교회가 나에게 그렇게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면 복음에 대해 어떠한 신빙성도 부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며 성경의 권위보다도 교회의 권위에 더 큰 비중을 둔다.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교회(교황)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보다 우위에 두고 공의회에도 동등한 권위를 부여(附與)한다. 이런 배경에서 합법화된 교회가 A.D. 397년에 개최된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어거스틴의 주도하에 신약성경 27권의 목차와 내용을 결정한 것이다.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은 정경에 대한 인증의 문제를 주교들의 회의인 공의회의 결정에 두고, 이런 사안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리화하여 명시하기에 이른다. 카톨릭 교회는 사도전승에 따라서 어떤 문서들이 성서 목록에 포함되어야 할지를 판단했다. 이렇게 결집된 목록을 성서의 정경이라 부른다. 이 목록에는 구약성서 46권과 신약성서 27권이 들어있다. 이 헌장의 내용을 제임스 기본스(H. E. James Cardinal Gibbons, 1834~1921) 추기경이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 놓았다.

성서에 기록된 사실이 과연 계시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또 성서가 주님의 말씀 전부인지 아닌지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또 그동안 위경(僞經)이 성서 행세를 하기도 했으므로 신자들은 그 진위(眞僞)를 분별하기가 어려웠다. ……정경․위경 판정의 난공사는 이제 끝나 주님의 말씀만을 실은 성서가 세상에 나타났다 하자.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번역인지 그릇된 번역인지를 또 누가 판단할 수 있겠는가. 성서의 원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 정통한 자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성서 원어 정통자가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되는가. 그러므로 성서를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려거든 유일한 성서 보존자인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는 길밖에는 없음을 알아야 한다.

  위에서 말한 기본스의 증언은 정경에 대한 결정 사항이 공의회의 권한이고, 그 합법성은 베드로에게서 계승되어온 카톨릭 교회에 있으며, 카톨릭 교회만이 진리를 결정하는 데 절대적인 권세와 정통성이 있고, 합법화된 공의회의 권위는 사도권 계승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한다. 스트라렌은 “공의회는 그 본질에 있어서 로마 성좌와 일치한 주교들의 회의이며, 주교들은 교황과 더불어 교회의 교도직(magisterium)을 형성하고 동시에 교회의 최고집행 통치기관이 된다. 그 결과 공의회는 교의(敎義)의 결정을 행함과 동시에 실제적인 법규도 정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본질은 공의회에 출석하는 주교들도 사람의 아들이고, 인간적 방법을 쓸 수밖에 없지만, 공의회를 다른 인간의 회의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공의회의 권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기본스나 스트라렌의 논조는 공의회가 사도적 권세를 계승한 주교들의 권위 있는 모임이며, 치리권을 겸비한 최고의 통치 기관이고, 입법 단체로서 성(聖)스러운 회의의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카톨릭주의자들의 오도(誤導)된 신학사상은 교회에 절대적인 권위가 부여되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공의회의 권위를 보장받고, 이 권위를 계승한 성전(聖傳)의 권위를 합법화 시키려는 데 있다. 즉, 기독교의 근간인 성경을 자기들이 결정한대로 인증(認證)하여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교황, 성전)의 권위를 상위에 두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주후 397년의 카르타고 회의에서 결정된 정경의 합법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경의 진위(眞僞)여부가 공의회의 판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공의회가 선언한 것뿐이지 인증(認證)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교회가 정경을 인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면, 인증받기 이전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정성이 불투명하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 인간의 이성이나 조직의 권위에 의해서 판단되고 결정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남는다.
  두 번째,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이 교회의 권위로 성경의 권위를 인증했다면,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인 잣대로 성경의 권위를 인증하려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대전제가 인문주의자들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붕괴되었으며 그 시발점은 종교개혁 이후 17세기 과학혁명으로 볼 수 있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황의 성경해석권한이 상실되면서 누구든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경향을 띄게 되었고, 나아가서 성경 본문에 대한 비평작업도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발흥한 과학혁명은 성경관 정립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운동은 자연신학(自然神學)에 기초한 것으로서 17세기 영국의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의 경험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와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대한 부정과 함께 인간의 이성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한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이 성경 계시의 척도(尺度)가 되어, 이성으로 증명하고 확인 될 수 없는 것은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라는 사실에 대하여는 무관심하면서, 오히려 성경의 기적과 예언 등을 비판하는 성경비평의 선구자 집단이 되었다. 당시 자연신학사상이 만연되어 있던 상황에서 인식의 주체로 부각된 이성의 기능에 대한 오류는 성경의 권위를 결정적으로 실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이성은 신앙에 우선하는 것이며 또한 신앙의 계속이기도 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을 믿으려면 먼저 자신이 믿는 바를 명백히 규정해 볼 필요가 있으므로 “이성이 신앙에 우선한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의 의미는 이성으로 납득되지 않는 부분은 우선 믿고 나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거스틴의 이론은 알고 믿어야 하느냐 믿고 알아야 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는 이성이 신앙에 우선하기 때문에 이성의 위치를 신앙 앞에 두었다가,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부딪히면 이해하기 위해 믿어야한다며 신앙을 먼저 호소하는 상충된 입장을 취한다.
  중세 카톨릭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이성의 우월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성이 신앙에 우선하며 자연적인 이성도 자연의 법칙을 변별할 수 있고 자연에 미치는 하나님의 영향을 알 수 있다.

  아퀴나스의 주장은 인간의 이성으로 자연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로서, 인간의 자율성(自律性)을 앞세워 이성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는 것으로 특별계시인 성경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론이다.
  이성의 권위를 철저하게 신봉하는 자들에 반하여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새로운 방법을 채택한다. 그는 안셀무스의 ‘신앙은 이해를 찾는다’라는 말을 근거로 하여 이성을 진리인식의 기초에 둔다. 그리고 루터와 칼빈의 신앙주의(信仰主義)를 수용하고, 또한 계몽주의(칸트학파)의 이성주의(理性主義) 노선도 수용한다. 그래서 이성으로 수납되지 않는 초자연적 사건과 비과학적인 것들은 신앙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수용가능한 자연적인 것과 과학적인 사건들만 이성으로 이해한다. 바르트의 이해 방식은 신앙과 이성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처리한 것 같다. 즉, 신앙의 문제인가 이성(이해)의 문제인가를 놓고 한쪽을 선택하기보다는 양자를 수용한 조합의 결과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성으로 수납되지 않는 부분들을 단순히 신앙의 문제로 취급해도 되느냐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바르트는 역사와 초(超)역사 또는 시간과 초(超)시간으로 분류하여 처리한다. 즉, 이성으로 수납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시간 밖의 사건 또는 역사 밖의 사건으로 처리해 버린다. 즉, 시간과 역사 밖에서 발생한 사건은 실제사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바르트는 입증하기 난해한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역사와 시간을 초월한 개념으로 정리함으로써 실제적인 사실로서의 성경의 역사성은 배제(排擠)했다. 이런 바르트의 신학적인 시도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이성과 과학적 한계에 예속시킨 결과로 보여진다.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의 권위를 인증하려는 것에 대해서는, 인간의 이성은 타락으로 인해 영적 기능이 상실되었으므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어진 특별계시를 단순히 이성으로 판별할 수 없다는 것이 바른 답이다. 또 하나, 과학적 검증들을 거쳐야 진리(사실)로 판정된다는 실증주의(實證主義)자들의 주장도 허구적이다. 과학이란 어떤 가정(假定)에서 일정한 인식 목적과 합리적인 방법에 의해 세워진 체계적인 학문으로, 실험과 분석을 통해서 발견된 지식이다. 반면에 비(非)과학이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지식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은 무모한 주장이 아니겠는가. 과학적 연구란 자연 현상을 탐구하는 것이지 그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과학과 비과학의 범위를 환산해 보더라도 인간이 발견하여 정리한 과학적인 분야보다는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부분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타난 현상에 의해서 본질의 진위를 판별한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상식 밖의 발상이다. 즉, 백(100)을 알고 하나의 의미를 규정해야지, 하나를 이해한 상태에서 백의 의미를 판단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무모한 태도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과학자들 중에는 시대마다 표준과학이 있고 그 표준과학에 의해서 과학적 설명이 가해지지만 그 표준과학 자체가 변화될 가능성은 항상 있기 때문에 자연 과학을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과학 철학자 포퍼(Karl Popper) 역시 “모든 과학적 이론이 잠정적(임시)으로 진리라는 것을 함축한다.”라고 하는 ‘오류 판명 가능성의 원칙’을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현재의 과학적인 것이 언제든지 오류가 드러날 수 있고 비과학적이라 해서 사실이 아니거나 진리가 아니라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과학이란 근본적인 한계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불완전한 과학을 기준으로 성경의 내용들을 분석하고 검증하여 그것에 대한 진리성의 진위를 결정한다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비과학적인 내용들이 있다고 해서 성경이 사실이 아니라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주장은 억지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타락한 인간의 이성으로 판별한다거나, 인간의 경험을 위주로 검증한다거나, 과학적 잣대로 분석하여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방법인가를 검토해 보았다. 이와 같이 인간의 경험이나 이성으로 성경의 진리성을 판단하려는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을 지식의 근본으로 규정하지 못하고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적 지식을 근본으로 이해하는 무지의 소치에서다. 둘째, 하나님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색이나 경험적 종교의 현상을 고찰하는 종교심리학(이론, 간증, 체험)의 범주이다. 셋째, 성경이 절대적인 진리의 표준이 아니고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나 경험이 진리의 표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기독교의 역사를 사실로 이해할 수 없으며, 기독교를 계시종교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닌 보편종교의 관점에서 접근하게 된다. 그 결과 성경을 인간의 저작물, 문서, 종교적 산물로 간주하며 일반 서적과 동일시하는 성경관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들의 주요한 쟁점은 기본스의 글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성경 자체로서 입증해내지 못한 것에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정경성의 문제나 사본 상의 문제 그리고 번역 상 오류나 역사상 사실 여부의 문제 등이 계속하여 난제로 남게 된다. 이런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써 칼빈 이후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자증적인 원리에서 찾았다. 하지만 성경의 자증(autopistia)원리를 구사하는 데 있어서, 이론적인 증명을 통해서 논증하기보다는 어떤 가설을 전제(前提)로 이미 정해 놓고 결론적인 명제만 주장하는 입장을 채택함으로써 칼빈의 명제를 보완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며 진리라는 사실을 어떠한 원리로 증명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전제에 의한 방법은 결론적인 명제만 주창하거나 또는 성경 본문의 단편적인 성구 인용에 불과하므로 ‘성경의 자증’에 대한 타당성을 구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증(自證)이란 엄밀히 말하면 성경 자체가 신(神)적인 속성을 드러내며, 그 속성은 성경 자체의 논리를 통하여 증명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자증의 요건을 확보하지 못하면 전제주의나 순환논리의 한계에 봉착하여 결국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게 된다.
  성경의 권위를 입증하기 위한 신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칼빈이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성령의 내적 가르치심을 받는 자는 진정으로 성경을 의지하게 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성경 자체의 특성으로 스스로를 확증하고 있기 때문에 증거와 이론의 범주에 예속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주장의 초점이다. 칼빈은 자신이 집필한 주석을 통하여 자증 이론의 합법성을 정당화하려 했지만, 인식의 주체인 성령의 사역에만 치중할 뿐 자증성 이론에 대한 성경 자체의 논리체계를 입증하는 것에 매우 취약했다. 또한 증거와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는 주장을 함으로써 성경의 진리성에 대한 증명과 검증의 방식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는 인상을 준다.
  자유주의 신학자 제임스 바르(James Barr)는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을 의식하면서 성경의 영감성과 자증이론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반박한다.

이 모든 것이 넌센스이다. 신(神)적으로 영감 되었음을 주장하는 성경이란 없다. ……여타 질문에 완전한 권위로 답변하는 성경의 자증 같은 것은 없다. 보수주의의 전통적 변증의 이 모든 측면은, 목청을 돋우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의 자증으로 답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바르의 논점은 성경의 진리성을 입증할 수 있는 체계가 미흡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의 문서설을 주장하고, 역사비평을 학문화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비성경적인 이론에 대한 반론으로서 간하배 교수는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우리가 성경의 무오성을 추인하는 근거는 증명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의 자기 증거에 설복되었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종종 순환 논법을 포함한다고 비난받았다. 그렇다 우리는 신앙의 궁극적 권위 자체의 성격을 논할 때에도 그 궁극적 권위를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논증이 바르(Barr) 등이 비꼬듯이 단지 “성경이 무오한 것은 자기가 무오하다고 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서의 특성을 증언하고 기독교인은 그 증언의 견실성을 인식하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그 증언이 진실임을 고백한다.

  간하배 역시 칼빈과 같은 맥락에서 논증하고 있다. 즉, 성경의 권위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특성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증방식은 전제주의의 전형이며, 검증되지 않는 명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답답함을 가중시킬 뿐이다. 전제(前提)란 논증에서 결론의 근거가 되는 판단을 뜻하며, 전제주의(presuppositionnalism)는 성경을 단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제하고 연구하는 방법론이다. 이 이론은 전제 자체를 정당화(입증)할 수 없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다. 전제주의에 대한 문제점을 간파한 자유주의자들은 말씀의 특성이나 전제 자체를 체계적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물론 어떤 이론이나 명제를 체계적인 논리로 증명해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하다고 본다. 성경의 진정성을 논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증명할 수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 고유한 특성을 당연히 보유하고 있으며, 그 자체의 논리체계에 의해서 증명되고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레이몬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라는 어거스틴(A. Augustine)의 인식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특별계시인 성경이 전 신학작업(the total theological enterprise)의 근거를 제공한다는 전제 하에 성립되는 체제이다. 이런 명제 하에 구성된 전제주의의 이론은 첫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이해에 선행한다.(히11:3), 둘째, 체계를 명확히 하는 것(elucidation of the system)은 신앙에 따라 나타난다. 셋째, 종교적 경험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해야만 한다. 넷째, 인간의 부패성은 자율적인 이성이 그 진리주장을 객관적으로 확실한 어떤 것에(만족스럽게) 근거하도록 할 수 없게 한다. 다섯째,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특별사역은 기독교 신앙과 교훈에 있어서 불가피하다.

  전제주의의 핵심이론은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예수의 계시를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문제는 예수의 계시에 대한 내용의 진정성을 명백히 규명해야 된다는 것에 있다. 즉, 성경내용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과 그것이 진리로서의 타당성이 있는지를 먼저 입증해야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라는 식의 논증방식은 선전제(先前提) 자체에 대한 증명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없으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질문과 같은 순환논법에 편승하게 된다. 따라서 순환논리적인 전제주의의 자증이론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제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의 진정성 입증에 대한 한계에 봉착한다. 성경의 자증성을 입증하는 논리체계는 성경해석이라는 엄격한 분야에 굳건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에는 틀림없지만, 자증성에 대한 입증이 전제주의 방식에 기초하여 순환논법으로 전개되어서는 안 되며, 그 이론 자체의 분명한 논리체계가 구성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신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는 성경의 통일성과 다양성의 문제를 극복해야 하며, 신구약 성경전체의 논리적인 통일성을 확보해야 한다.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서 스스로 확보되며, 이것이 사실로 판명될 때 확고해진다. 성경은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낸 사실적인 진리이며 드러난 내용을 통해서 증명할 수 있는 자체의 체계가 분명히 구성되어 있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신학자들이 이 부분을 오해한 것 같다. 카톨릭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성경을 교회가 인증했기 때문에 권위가 부여된다면 성경 스스로의 절대적인 권위가 실추된다. 자유주의자들의 말대로 인간의 이성으로 말씀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다면, 타락한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영감에 대한 진위를 판단하는 결정권자가 된다. 이것은 마치 피조물이 창조주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객이 전도(顚倒)된 모양새이다. 이런 주장에 맞서는 보수주의자들은 아예 성경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 증언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증명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성경이 어째서 하나님의 말씀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순환논법 자체의 한계이다. 물론 성경의 권위는 인간들의 회의를 통한 주관적인 결정이나 판단에 의해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축된 절대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이 스스로의 권위를 어떻게 입증하고 있는지를 밝혀내면 되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입증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도구이기 때문에 진리로서의 요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계시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문제는 진정성에 대한 부분과 신존재증명으로 직결되는 신학의 핵심이며 기독교 진리의 근간이 된다. 성경이 한권의 책으로 완성되면서부터 성경 66권에 대한 신빙성이 제기되어왔으며, 그에 따른 통일성과 다양성의 조화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성경에 대한 보편적인 견해는 신․구약성경의 기록기간이 1,600여 년이며, 시대적인 배경과 기자들의 사상과 문체가 다르다는 데 있다. 또한 성경의 각 권은 그 내용에 모순이 있거나, 문화적, 윤리적으로 오늘날의 우리가 그대로 따르기에 불가능한 것도 있다. 성경에는 고대근동의 종교적인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고, 신화적인 요소도 있으며, 여러 자료를 모아 편집한 것도 있다고 본다. 성경에 대한 이런 관점들이 성경의 본문을 비평하게 되고 역사비평학이란 학파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학이 주류를 이룬 신학계의 풍토에서 성경의 진정성에 대한 입증의 문제는 성경의 권위 확보는 물론이고 신학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중요 과제이다. 역사비평학자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성경의 진정성과 권위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성경이 자증(自證)하는 진리체계이다. 성경의 논리체계는 1,600여 년의 기간과 40여 명의 기자들 그리고 다양한 시대 배경과 독특한 문체 그리고 각 권의 각기 다른 주제와 장르를 초월하여 하나의 통일성을 확보하고 있다. 성경의 논리적인 통일성은 진리구성의 근본요소이며, 성경의 진정성을 증거하는 관건이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통일성의 구조에서 보아야 바른 뜻을 알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통일성의 체계나 구조에 대해서는 논증하지는 못하고 당위성만 주장할 뿐이다.
  19세기부터 성경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관한 신학적인 문제는 학계의 이슈가 되었다. 어떤 학자는 다양성을 거론한 반면 또 다른 학자는 통일성을 주장했다. 이 학설은 다양성을 주장하면 통일성의 문제가 대두되고, 통일성을 주장하면 다양성이 희석되는 문제점을 표출시켰다. 그리고 통일성의 명분은 강조하지만 신․구약성경 전체를 포괄하는 중심주제와 일관된 논리의 근간이 되는 핵심개념을 포착하지 못했다. 이런 현상은 통일성의 중요성은 간파했으나 뚜렷한 논리체계를 확보하지 못한 채 21세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성경 66권에 대한 다양성의 조화(harmony)를 이루는 성경자체의 골격을 찾아내는 것이다. 즉, 음악에서 다양한 소리가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이 성경 66권이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관점과 맥락으로 관통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 자체가 증명하는 진리성이며 성경만이 가지는 절대적 권위이다.
  성경의 진리성은 그 자체의 권위로 논리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 점은 증명의 유무와 무관하게 이미 스스로 확보되어 있는 절대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성경의 자증적인 진리체계를 확보함으로써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재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리의 일반적인 의미는, 한편으로는 어떤 단어 혹은 문장의 의도된 주제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 단어 혹은 문장이 나타내는 사실의 성질이 서로 일치되는 것을 말한다. 진리는 히브리어 에메트(חםא)이며, 견고하고 변하지 않는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적인 성질이 아니다. 이것은 생래적(生來的)인 힘을 통하여 변하지 않고 완전하며 견고함을 유지해 나가는 능력을 암시한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자신을 다른 실체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그리하여 에메트라는 단어가 법률적인 용어로 쓰일 때는 ‘근거 없는 진술과 반대되는 사실적 행위 내지는 확인된 조건’을 가리키며, 다른 명사들의 수식어로 쓰일 때에는 올바르고, 정확하며, 참되고, 그들의 근본적인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에메트는 문맥을 따라 일관성, 불변성, 안정성, 견고성 등으로 번역되어져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은 내용의 일관성을 갖추고 있으며, 성경의 모든 내용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다른 어떤 진리보다도 견고성과 완전성을 갖춘 절대 진리가 된다. 이것은 다른 상대적인 이론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신(神)적인 힘(영감, 감동, 생기, 기운)에 의하여, 모든 피조 만물과 인간에게 그 영향력을 행사한다. 진리는 논리의 일관성과 함께 실제적인 사실성을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일관성은 명제에 대한 명료한 개념과 함께 이론 체계가 다른 진술들과 일치하거나 통일성이 구비되어야 하며, 사실성은 어떤 주장에 대한 근거와 증거가 입증됨으로써 이론과 실제의 조합으로 증명된다. 성경은 ‘에메트’(진리)의 속성과 같이 일관성을 갖추고 있으며 하나님의 실제적인 사역이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불변의 의미로서 인간에게뿐 아니라 만물에게까지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성경의 진리성이 스스로 입증되는 이론체계를 살펴보면, 성경 66권은 자체의 논리체계에서 통일성이 확보된다. 성경전체의 일관된 논리를 주도하는 체계는 원리적인 면에서는 언약과 성취의 구도이고, 내용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모형과 실체적인 전개이며, 방법적인 면에서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과 오신 메시야에 대한 성취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첫 번째로 원리적인 면에서 구약성경은 언약이며 신약성경은 성취로 구성되어 있다. 즉, 구약성경은 섭리로써 언약하는 역사서와 찬양으로 언약하는 시가서 그리고 예언으로 언약하는 선지서로 구성되어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성취로써 그리스도 자신이 성취하신 복음서와 성령으로 성취하신 복음서 이후의 내용으로(사도행전~요한계시록)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구조화된 언약(구약)과 성취(신약)의 논리체계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빙성과 권위를 성경 자체가 스스로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시작하여, 시대마다 지도자와 백성들에게 언약을 상기시켜주고, 때마다 선지자들을 동원해서 언약의 내용을 예언하게 하며, 선지자의 예언대로 역사 선상에서 확증시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서 언약하고 예언된 대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 성취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구약의 언약(예언)이 신약에서 성취됨으로써 언약과 성취의 틀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언약은 예언적인 성격과 함께 미래를 예고하는 성질을 갖고 있으며 성취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반면 성취는 언약(예언)의 결과로 나타난 사실로서 근거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단서가 된다. 언약과 성취의 구도는 성경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며 절대적인 요소이다. 그동안 성경의 통일성을 주장한 많은 학자들의 약점은 근거와 입증자료를 제시할 수 있는 원리체계가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약과 성취의 원리는 신․구약성경 상호간에 근거와 증거의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완벽한 진리입증의 체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박용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각각 언약과 성취라는 그 내용상의 특성을 갖고 있으면서 서로가 근거의 역할을 담당하여 진리성을 확증하여 줌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구약신학의 직간접 원천이 되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사이는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구약성경 66권은 근본적으로 그 자체 내용 이외에 다른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기독교적 계시진리의 특징으로써, 과학이나 철학적인 일반 학문과는 구별이 되는 것이다.

  박용기 목사의 말은 성경의 진리성 입증이 성경 자체가 구성하고 있는 언약과 성취의 원리에 의해 상호간에 근거가 됨으로써 자증(自證)된다는 사실을 뒷받침한 것이다. 칼빈은 성경의 권위와 신빙성 입증에 대해서 성경의 자증원리를 주장했으나 그 근거를 확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언약과 성취의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명제를 열렬한 믿음으로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전제주의의 취약점을 넘어서는 완벽한 자증이론인 것이다.
  둘째, 내용적인 면에서 언약과 성취의 구조는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주신 복의 내용은 자손과 땅 그리고 통치로서 국가의 삼대 요소이다. 이 삼대언약은 노아와 아브라함까지 계승되어 이스라엘 국가를 통해서 증거되는 것이 구약성경의 내용이다. 구약성경의 역사서는 이스라엘 열조와의 언약대로 자손이 번창되고(창세기~신명기) 가나안 땅을 정복하며(여호수아~사사기) 이스라엘의 통일왕국이 건립되어 다윗의 왕조가 세워지고,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하고, 바벨론의 포로에서 회복되는(룻~에스더) 섭리역사이다. 이렇게 언약대로 성취되는 역사 섭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속성을 찬양하는 것이 시가서이며, 이스라엘의 분열과 포로생활에서 선지자를 통하여 나라의 회복을 약속하는 내용이 예언서이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나라 즉, 이스라엘의 건국과 분열 그리고 포로와 회복의 역사(歷史)를 통해 전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역사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하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시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증거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일관된 논리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신약성경의 논리체계는 교회의 기초(사복음서), 교회의 설립(사도행전), 교회의 양육(로마서~갈라디아서), 교회의 무장(에베소서~디도서), 교회의 투쟁(히브리서~유다서), 교회의 승리(요한계시록)라는 교회론 중심의 골격을 이룬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인 ‘이스라엘 나라’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신약성경의 내용은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실체인 ‘하나님의 교회’를 중심으로한 구조로 되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진술하면,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시조인 아담을 창조하시고 삼대언약을 세우셨다. 혹자들은 이 언약을 문화명령으로 해석하지만, 이것은 인류에게 문화적인 맥락에서 허락하신 보편적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원리이다. 만약 아담에게 허락하신 복이 문화명령이라면 오늘날에도 자손이 많고 땅(부동산)을 많이 확보하고 권세를 가진 자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가 되고, 그것은 인간이 이루어야 할 목표가 될 것이다. 만약 문화명령이 지상적이고 현세적인 복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기복주의나 물질주의의 단초가 된다. 기독교의 이상이 문화명령이며, 이 땅 위에서 이룩해야 할 세속적인 가치에 편중된다면 기독교는 계시종교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은 세속적인 가치나 인간의 욕망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삼대언약의 진정한 의미는 인류가 이룩해야 하는 문화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위한 원리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세우신 세 가지 언약은 국가의 삼대요소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실체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했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된다. 그러므로 구약성경 역사서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모형인 이스라엘 국가를 통해서 개진되고,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통해서 증거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내용적인 면에서 보면, 첫 아담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언약으로 시작하여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는 것으로 종결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원리적인 면에서도 ‘언약’과 ‘성취’의 구도를 통해 통일성을 구사하고 있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언약대로 성취됨으로써 논리적인 통일성을 확고히 한다.
  셋째, 방법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구성된 언약과 성취의 내용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된다. 구약의 역사서(창세기~에스더)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대로 자손을 번창시켜 주셨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심으로 나라를 세워주셨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당신의 씨로 말미암아 신령한 자손을 번창시키고,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여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세워 다스리실 것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다. 이런 맥락에서 구약의 역사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섭리를 통하여 반드시 메시아 보내주실 것을 언약하시는 계시섭리이다. 구약의 시가서(욥기~아가)는 역사서를 통해서 계시된 내용으로서 메시야에 대한 언약의 말씀을 계시한다. 즉, 언약자손의 찬양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언약하신 말씀으로써 첫 아담에게 세우신 실체적인 삼대언약을 메시아로 성취하실 것에 대한 계시섭리다(롬5:14). 이것은 구약의 언약대로 메시아가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세워 통치하도록 섭리해 주실 것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이런 관점에서 욥기는 여호와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인류를 물로 심판하시는 전능하신 능력을 통하여 장차 보내실 메시야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도록 섭리하실 것에 대한 여호와의 언약계시이다. 시편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비롯해 그의 몸 된 교회로 여호와의 신실성을 찬양케 하실 섭리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잠언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지혜이신 메시아가 가르치실 신령한 지혜의 말씀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로서, 장차 하나님의 지혜이신 메시아를 보내실 것에 대한 언약계시이다. 전도서는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실 메시아를 해 아래 보내 주실 내용으로서, 만왕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의 유익한 행사에 대한 언약계시이다. 아가는 장차 메시아를 교회의 신랑으로 보내주실 것으로서, 택한 백성의 신랑 되실 메시아 보내주실 것에 대한 언약계시이다.
  선지서(이사야~말라기)는 선지자들이 유다 백성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과거에 언약대로 이루어주신 역사 섭리를 교훈삼아 현재의 역사를 해석해 주면서 앞으로 이루어주실 역사에 대하여 예언한 내용이다. 이것은 장차 참 선지자로 오실 메시아를 통하여 이루어주실 실체적인 섭리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이며, 참 선지자이신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에 대한 여호와의 언약계시다. 즉, 장차 오실 메시아가 택한 성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삼 일만에 부활하실 섭리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로서, 언약대로 죽었다가 부활하실 메시아를 보내 주신다는 예언적 성격을 지닌 언약계시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여호와에 대한 찬양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메시아 보내실 것을 언약하신 계시의 내용이다.
  신약성경은 구약에서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언약하신 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사역이다. 사복음서는 구약의 언약과 예언에 기초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언약한 대로 기름부음 받은 자로 오신 예수께서 선지직, 왕직, 제사직을 완수하여 성취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마가복음은 구약에서 언약하고 예언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로 오셔서 낮아지고 높아지는 신분상의 변화를 통해 성취하여 증거하신다. 누가복음은 구약에서 언약한 대로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사역을 성취하여 증거하신다. 요한복음은 구약에서 언약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가 가심으로써 본성으로 성취하여 증거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이 성취되어 완성된 이후에는 성령의 성취사역으로 예수께서 구약에서 언약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사도행전~요한계시록). 결국 신․구약성경은 메시아 보내실 것에 대한 언약과 메시아로 성취된 내용으로서 메시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성경의 논리체계는 메시아를 통해서 언약의 내용을 이루는 방법으로서의 통일성이 있음을 성경 자체가 확고히 한다.
  지금까지의 논거대로 신․구약성경은 원리적인 면에서는 ‘언약’과 ‘성취’로 일관된 체계를 구성하고 있으며, 내용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방법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실현된다. 그동안 신학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만 한정된 구속사신학으로 명명되어 왔었지만, 성경신학은 구속사를 포괄하는 총체적이며 입체적인 진리로 논증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언약과 성취의 원리에 의해서 일관된 논리체계의 골격을 갖추고,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사역방법을 통해서 완성되어 통일성을 이룬 완벽한 진리체계이다. 이렇게 확보된 성경의 통일성은 이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이방나라 그리고 교회의 실제적인 역사를 통해서 입증됨으로써 그 이론이 사실임을 확고히 한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는 논리의 통일성에 의한 이론체계를 구축하고, 성경의 역사가 사실로 판명됨으로써 명백하게 입증된다. 성경의 통일성 확보는 성경의 진리성에 대한 다양한 이론(異論)과 의구심 그리고 역사비평의 이론을 일축한다. 성경이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이유는, 이론상으로는 논리적인 통일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는 역사적인 사실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리성을 입증할 수 있는 체계 확립은 단 마디로 21세기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쾌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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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제8장 성경의 신빙성
제1권 제6장 성경의 필요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