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09-06-08 17:5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제1권 제8장 성경의 신빙성


성경의 신빙성을 논하기 전에 성경의 형성과정과 정경(正經)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성경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신․구약성경 66권으로 구성된 정경의 중요성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성경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단초가 된다.
  성경의 사전적 의미는 종교상에 있어서 신앙의 최고법전이 되는 책이나, 기독교의 성경, 불교의 팔만대장경, 유교의 사서오경, 이슬람교의 코란 등과 같이 일반적인 종교의 경전으로 사용된다. 경전(經典) 역시 변하지 않는 법식(法式)과 도리나, 성현(聖賢)이 지은 것으로서 성현의 말이나 행실을 기록한 책이나, 종교의 교리를 기록한 책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기독교의 성경은 문헌(정경)이며 책으로 엮어져 있지만, 보편적인 종교의 법전이나 규범서가 아니며 단순한 성현들의 말과 행실의 기록물이 아니다. 기독교의 성경은 유일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위한 특별계시문서란 점에서 다른 정경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성경의 유래를 보면, 성경은 영어로 바이블(The Bible)이라 한다. 영어의 바이블은 라틴어의 비블리아(Biblia)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그리스어 비블로스(biblos)의 복수형이며 ‘책’을 의미한다. 고대에는 종이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갈대의 줄기를 엮어서 필사 재료로 사용했던 파피루스에 기록하였기에 비블로스 라고 한다. 그리고 비블로스는 고대 지중해 연안의 베이루트 북쪽에 있는 항구도시 쥬베르를 가리키며, ‘언덕’이라는 뜻의 그리스 지명이다. 이곳은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교역의 중심지이며 특히 이집트산 파피루스의 집산지였다. 비블로스는 기원전 2천 년대에 지중해 지역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알파벳이 파피루스에 기록되어 그리스에도 전달되면서 책을 의미하게 되었다. 후대에는 책 중의 책이라는 뜻에서 ‘성서(聖書)’를 가리키게 되었다.
  성경 66권을 정경(正經, canon)이라 한다. 정경이란 진리와 신앙의 척도가 되는 최고의 텍스트를 말한다. 정경을 의미하는 라틴어 ‘카논’은 ‘칸나(canna)’에서 유래했으며, 갈대를 뜻하는 명사이다. 갈대가 전혀 다른 의미의 ‘정경’과 연결된 이유는 길이를 재는 ‘자’가 대중들에게 보급되기 이전 갈대를 측정기구로 사용한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갈대를 꺾어 ‘자’ 대신 사용했던 ‘칸나’는 이런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를 의미하는 ‘정경’이란 단어와 결합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카논’은 보편적으로 삶의 잣대나 표준적인 규범과 지침 또는 기독교의 신앙과 행위의 가장 기준이 되는 책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진리’라는 의미로 규정해야 한다. 즉, 신․구약 성경 66권이 기독교의 정경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택된 진리라는 것이다.
  정경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구약성경은 다른 종교도 공유하는 특성을 가진다. 셈족 언어권에서 형성된 기독교의 성경과 유대교의 탈무드 그리고 이슬람교의 코란은 각각의 정경 안에 구약성경의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정경과 다른 종교의 정경이 동등하다거나 같은 범주에 속한다는 말은 아니다. 기독교의 정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절대적인 진리라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성경의 형성배경을 살펴보면 구약성경은 약 30명의 기자들이 약 1천년의 기간을 통해서 기록하였다. 구약은 초기에 율법(모세오경)과 선지서로 양분되었다가(마 5:18), 그 후에 3부 24권으로 나누어졌는데, 율법(토라)이라는 모세오경과 선지서(느비임)이며, 이는 전(前)선지서와(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후(後)선지서(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소선지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성문서(케투빔)인데, 이것은 다시 시가(시편, 잠언, 욥기)와 두루마리(아가, 룻기, 예레미야애가, 전도서, 에스더) 그리고 역사서(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이 39권으로 확정된 것은 주전 200년경의 70인 역(LXX)이 만들어진 이후였고, 주후 90년경 얌니아(Jamnia)에서 열린 유대 랍비들과 학자들의 권위 있는 회의에서 확정되어 그 수가 오늘날의 구약성경의 책들과 꼭 같은 것으로 낙착되었다. 이렇게 천여 년의 역사를 거쳐 구약성경은 39권으로 구성된 하나의 거룩한 총서로 형성되었다. 현재는 모세오경(창세기~신명기), 역사서(여호수아~에스더), 시가서(욥기~아가), 선지서(이사야~말라기)로 분류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약 9명의 기자들이 반세기에 걸쳐 기록한 것으로서, 내용은 사분되어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예언서로 되어 있다. 신약성경은 기자의 편지가 수신자인 교회나 개인에게 전달되었고, 이것이 초대교회에서 회람으로 각 지(枝)교회에서 읽혀지다가(골 4:16), 그 사본들이 집성되어 한 권의 책으로 형성되어 갔다. 이 운동은 교회의 자연적인 요청이었으며 영지주의나 마르키온주의와 같은 이단설에 자극되어 더욱 촉진되었다. 신약성경의 형성 작업은 주후 1세기에 시작되어 초기에는 사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 베드로전서, 요한일서 등이 먼저 집성되었고 나머지는 후대에 첨가되었다. 정경구성의 계기는 동방교회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 있었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에 의해서 마련되면서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주후 367년에 자기 교구의 여러 교회로 부활절 서신을 보내면서 오늘의 신약성경 27권과 동일한 목록을 제시하여 확정하였다. 그 후 어거스틴의 주도하에 주후 397년 제3회 카르타고 총회에서 구약성경 39권과 신약성경 27권이 정경으로 공식 확정되었다. 이렇게 확정되기까지 정경은 강압적이거나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의 수납으로 이루어졌다.
  정경결정의 원리는 구약은 유대인의 정경을 기초로 했으며, 신약은 사도가 저작했거나 사도성이 있어야 하며, 신․구약 성경은 공히 보편성과 영감성을 지녀야 한다는 기준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정경으로 확정된 66권이 외적인 배경과 그 영향에 의해서 신빙성이 부과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의 신빙성은 성경자체의 논리적인 통일성과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한 논점은 성경관에 대한 신학적인 이슈이며 가장 핵심인 사안으로 쟁점화 되어왔다. 그 이유는 성경신학의 체계를 구성하고 정립하는데 있어서 성경관과 성경의 권위 그리고 신빙성의 확보가 골자가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성경의 신빙성에 관하여 성경의 독특한 위엄과 감동, 이적과 예언에 관한 반론들에 대한 반박, 신약의 단순성과 신(神)적 특성, 교회의 동의와 순교자들의 충성 등의 내용을 통해서 인간이 이성적으로도 납득할 수 있는 일반적인 차원의 입증자료를 제시한다. 칼빈은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사람의 믿음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주장한다. 그래서 성경의 권위를 믿음으로 수용하는 것이 성경의 확실성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단 우리가 성경의 위엄에 합당한 대로 그 권위를 열렬히 받아들이고 또한 그것이 그저 일상적인 것들을 초월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그 전에는 성경의 확실성을 우리 마음에 심어 줄 만큼 그렇게 강력하지 못하던 여러 가지 논증들이 이제는 아주 쓸모 있는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또한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자체로서 충족하게 스스로를 드러낼 때에 비로소 진리가 모든 의혹을 물리치고 진리로서 든든히 서게 되는 것이다.

  칼빈의 이런 주장은 전형적인 전제주의적인 입장을 표방했지만 성경의 자증이론(自證理論)에 대한 확신을 가진 논증이다. 물론 성경의 신빙성에 대한 성경의 자증이론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확고한 명제이다. 그러나 성경의 자증이론에 대한 논리적인 체계를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칼빈은 성경의 신빙성에 대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입증의 근거와 증거자료에 대해서는 ‘믿음’이란 통로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론이나 주장의 진정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근거와 그에 따른 증거를 확보해야 사실이나 진실로 판명된다. 성경의 신빙성(authenticity, credibility)도 믿고 의거할 수 있는 성질을 갖추기 위해서는 충분한 근거를 확보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근거를 확보한다는 것은 변증학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성경의 진리성과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본질적인 면에서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 다만 문제는 성경의 신빙성을 증명할 수 있는 ‘자증이론’의 논리체계와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다양한 증거자료를 확보하는 것이다.
  칼빈은 성경의 이적과 예언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선언한 예언의 확실성을 들어서 반박한다. “야곱이 유다지파에게 왕의 계보가 될 것을 예언(창49:10)한 대로 500여 년 이후 다윗에게 왕권이 부여된 것과 선지자들이 유다왕국의 포로생활과 회복에 대한 예언과 성취의 역사적인 사건을 근거로 제시한다.”는 칼빈의 논증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하기 위한 방법으로 확실하고 명백하다.
  혹자는 성경의 일관성이 후대에 어느 한 작가가 역사의 순서대로 맞추어 기록한 기록물이기 때문에 예언대로 성취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반박은 성경의 기록 연대와 저자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만 확보되면 쉽게 판별할 수 있다. 문제는 성경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것에 대한 예언 성취의 중요성과 사실성이다. 칼빈은 이러한 점에서 성경의 자증이론을 통한 신빙성 입증에 확실한 기여를 했다고 본다.
  어느 민족이 조상 때부터 하나님의 언약과 예언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건립과 분열 그리고 회복의 장래 역사에 대하여 모세를 통해서 큰 흐름을 미리 알려주셨다. 또한 그 약속과 예언들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근접한 시대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역사의 미래를 상세히 알려주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모세와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주전 1000년경에 통일왕국이 세워졌고, 예언대로 주전 930년경에 남북이 분열되었으며, 예언대로 주전 722년경에 북 이스라엘이 패망했고,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남 유다는 주전 609년경부터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으며, 예언대로 주전 538년경에 파사 왕 고레스에 의해서 포로에서 회복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 언약하고 예언된 대로 유다 지파의 계보를 따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오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구약에서 언약하고 예언하신 대로 성취된 역사이다.
  칼빈이 성경의 신빙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예언 성취의 방법을 통하여 논증한 점은 탁월했으나, 성경의 논리를 따른 체계적이며 구체적인 진술에 취약한 면은 다소 아쉽다. 앞의 단원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원리는 언약과 성취이며, 언약은 시대를 따라 등장한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더욱 확고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모든 예언의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것이며, 하나님의 언약은 성경의 논리체계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사실로 실증된다. 그리하여 구약의 역사 섭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며 그 언약이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서 역사적인 사실로 나타난 것이다.
  성경의 예언은 몇 가지 특수한 성격을 나타낸다. 첫째,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형식으로 사용된다. 일반적인 예언은 단순히 예언 자체에 신비성을 부여하거나 또는 인간의 미래사를 점치는 주술적인 성격을 띤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고 있으며, 언약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말씀(logos) 즉, 그의 뜻, 사상 계획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서 영원세계에서 간직하셨던 계획을 인류의 조상과 언약하심으로써 나타내셨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시대마다 필요한 인물들을 통해서 예언하시고 성취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의 예언은 하나님의 존재를 계시하기 위한 특수목적으로 사용된 도구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성경의 예언은 그리스도에게 집중된다. 보통 예언은 일반적인 사건이나 인생의 신후사 또는 종교구성을 위한 부분적인 자료로 활용된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로 성취된다. 구약성경의 역사서는 섭리로써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으며, 시가서는 언약 백성들의 찬양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선지서는 선지자들의 직접적인 예언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고하고 있다. 즉, 역사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언약하고 예언하신대로 섭리하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세우실 것에 대해서 예언하신 것이다. 시가서는 언약하고 예언하신 대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전능성, 신실성, 주권성, 영원성, 자비성-을 통해서 그리스도 보내실 것을 언약하고 예언하신 것이다. 선지서는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해방되는 역사를 배경으로 활동한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역을 직접적으로 증거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의 증거(사복음서)와 성령의 증거(사도행전~요한계시록)를 통해서 명백하게 입증된다. 이렇게 증명된 성경의 예언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특수한 성격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성경의 예언은 그 성취도에 있어 완벽하다. 일반적인 예언은 적중률에 큰 편차를 보인다. 예언의 신뢰도나 신빙성은 그 예언의 내용이나 횟수보다는 얼마만큼 적중하느냐에 달렸다. 이러한 면에서 대부분의 점술가나 예언가들의 예언은 성취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해프닝으로 끝나거나 신뢰성이 없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은 단편적으로 수백 가지에 달하지만 그것이 모두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가치가 있다. 물론 구약성경 전체가 예언의 성격을 담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중요한 점은 아무리 많은 분량의 예언이 수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예언의 성취도가 미비하면 신빙성은 약화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성경은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내용이 신약성경을 통해서 완벽하게 성취된다. 이렇게 한 치의 착오 없이 예언이 적중되어 명백한 사실로 판명된 것은 성경 외에 없다. 특히 사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족보, 잉태 방법, 출생 장소, 유년 시절, 삼년간의 공생애 사역, 죽음, 부활, 승천 등의 숱한 내용들이 구약에서 예언된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예언의 성취에 대한 적중률을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면, 그리스도가 유다지파에서 출생하는 확률은 12분의 1이며, 유다지파가 사는 지역이 백여 곳인데 그 중에서 베들레헴에서 출생할 확률은 100분의 1이다. 이 두 개의 예언이 성취될 확률을 산출하면 1200분의 1이 된다. 그리스도와 관련된 예언은 300여 개가 되는데 이것이 성취될 확률은 무한대분의 1에 가까우며, 우주 공간을 하얀 색종이로 채워놓고 그 중에서 검정 색종이 하나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라 한다.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는 비율을 산술적인 확률로 환산해 보더라도 그 신빙성은 가히 절대적으로 완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고 단 마디로 언급한다.
  칼빈은 신약성경의 신빙성에 대해서 기자(記者)의 신분을 통하여 부연 설명한다. 즉, 사복음서의 기자들이나 베드로 등의 비천하거나 평범한 신분을 나열하면서 그들이 기록한 신약성경의 심오함과 대조시켜 말한다. 또한 성경이 무수한 박해와 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다는 점과 다문화와 다양한 인종들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권위를 인정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과 현실을 통해서도 역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 그리고 칼빈은 성경의 신빙성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확신에 기초하여 성경의 확실성을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성경이 하나님을 아는 구원 얻는 지식을 주기에 충족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에게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해 주려고 하는 행위는 실로 어리석은 짓이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성경이 그렇다는 것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이 그렇게 중대한 문제에 대해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경건과 마음의 평안이 있어야 한다고 적절히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의 주장대로 성경의 신빙성은 역사적인 정황과 배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고, 성령의 내적인 확신에 기초해야하며 그러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성경이 악조건의 상황에서 보존되고 다양한 인종들에 의해서 인정된 일반적인 배경은 타당하다고 본다. 하지만 성경의 자증이론을 ‘성령의 역사’와 어거스틴의 ‘믿음’이란 단편적인 명제로 설명하기보다는 좀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논증이 필요하다. 성령의 역사는 추상적이거나 하나님의 말씀과 별도로 사역하는 이분법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고 이해하는데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핵심이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라는 의미는 말씀을 가르칠 때 말씀과 성령이 각각 따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인식 자체를 성령이 주관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개별적인 활동이나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성경을 통한 체계적인 이론과 인식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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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제9장 성경과 성령의 관계성
제1권 제7장 성경의 권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