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09-06-08 17:5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제1권 제11장 하나님에 대한 형상화와 우상제작 배격


칼빈은 신(神)의 형상화(形象化)와 우상숭배의 발전적인 관계를 신학적으로 명확하게 진술한다. 신(神)을 형상화하려는 시도는 인간 욕심의 발로이며 무지의 소치이고, 허구임을 밝힌다. 결국 인간의 욕망과 허영심은 우상을 제작하고 숭배하게 됨으로써 절정에 달한다고 증거한다. 칼빈은 형상에 대한 판단과 교황의 오류에 대한 성경적인 반박 그리고 형상을 추구한 결과로 자행되는 우상숭배를 엄격하게 비판한다.
  첫 번째, 성경을 통해서 신(神)에 대한 형상화를 다음과 같이 배격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탐구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사색에 집착할 때 반드시 빠지게 되는 어리석음을, 아니 정신 나간 상태를 더 확실히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런 배타적인 확고한 정의(定義)를 성경 도처에서 접근하게 되는데, 바로 그 정의가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각을 근거로 자기들을 위해서 만들어 내는 모든 신관념을 완전히 제거시켜 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유일하고도 참된 증거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을 통해서 찾고자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임을 우리로 분명히 알게 하시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을 형상화하려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본성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구체적인 표징을 통해서 그의 신적 위엄이 임재하심을 보여 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 주신 그 모든 표징들은 그의 가르침의 계획의 일환이었으며 동시에 그의 본질이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측량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려 주기 위한 것이었다.

  칼빈의 주장대로 구약 백성들은 하나님의 실존을 증거하는 표징에 대한 본질보다는 초자연적인 현상 자체에 치우치는 경향을 나타낸다. 또한 칼빈은 신(神)을 형상화하려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은 자신이 덧없는 존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신격화(神格化)시켜 놓은 물질 조각이 신(神)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칼빈은 신(神)을 형상화시키려는 인간의 의도와 심리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비판한다. 인간의 사색에서 출발하여 필요에 따라 조작된 신(神)관념은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계시를 바르게 인지하기보다는 보이는 현상에 심취하게 되며, 결국 인간의 손으로 제작한 물질을 신격화하기까지 이르는 인간의 무지함과 나약성을 드러낸다. 종교는 인간이 신(神)을 찾고 자신의 구상에 따라서 신을 형상화하거나 신격화시켜놓은 상태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종교는 하나밖에 없으며, 인간의 요청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신(神)의 일방적인 뜻에 의해서 계시되어 형성된다. 더욱이 참 신이신 하나님은 시공형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구상(構想)대로 형상화되거나 조작될 수 없다. 이러한 칼빈의 사상은 교황주의자들의 형상지지론(形狀支持論)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이런 해괴한 것들을 세워 놓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이 성직자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그림이나 조각들이 있는데, 그것들이야말로 지극히 뻔뻔스러운 사치나 외설의 실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날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기본정신을 망각한 채 이미 하나님을 형상화한 행태가 만연되어 있다. 강단이 제단으로 변모하며 강단에 구약적인 형상이 가미됨으로써 예배의 본질을 흐린다. 구약의 제단을 모방하여 강단에 촛대를 설치하고 성경책을 배치해 놓는다든지 십자가의 형상을 제작하여 강단 정면에 부착해 놓음으로써 본래의 의미는 퇴색되고 십자가 자체를 섬기려는 양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기능은 시공형을 통해서 체계화되었으므로 보이지 않는 신을 형상화하려는 작업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이러한 욕구에서 제작된 우상은 인간의 상상력에 의해서 형상화되었지만, 그 안에는 생명력이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데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신(神)을 형상화하려는 인간의 굴절된 종교성을 알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라고 제일 계명을 엄명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았던 놋뱀의 사건과 흡사하다. 놋뱀을 통해서 죽음에서 구출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놋뱀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천여 년 동안 놋뱀 자체를 음란히 섬긴 사례가 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교회의 강단은 제단이 아니며, 교회는 어떠한 형상이나 상징물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거나 인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경외하게 되는 것임을 확고히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긴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어 하나님에 대한 형상화와 우상화의 욕구에 종지부를 찍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떠한 형상과 결부해서 이해하려 하면 안 되는 이유는, 첫째,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시공형(時空形)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를 형상화한다는 것은 영원하신 존재를 피조물의 자리로 전락시키는 결과가 된다. 바울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라는 말로써 영원하신 존재자를 보이는 형체 속에 예속시킬 수 없음을 증거한다. 또한 “하나님은 영(靈)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라는 말에서도 언급하듯이, 영(靈)은 보이는 물체가 아니며, 어떤 형태로 표시하거나 제작할 수 없는 신령적이며 생명의 근본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공기나 인간의 생명을 어떤 형태의 그림이나 조각으로 형상화하여 실제화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영원하신 존재자를 형상화하여 숭배한다는 것은 곧 우상숭배이므로 존재자에 대한 모독이라 볼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은 실존(實存)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는 전능자로 나타났으나 이제는 여호와로 증명해 주겠다고 선언하신다. 이 말씀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이심을 증거하려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의 실존을 계시하며 증명해주는 특별계시 역사이다. 그래서 구약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열조와 언약을 세우시고 성취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의 실체를 계시하는데 있다. 전능자로 존재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셨고, 여호와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열조와 언약(자손, 땅, 통치)을 세우시고 언약대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해 주셨고, 유다 지파에서 다윗을 출생시켜 통일왕국을 건립해 주신 것이다. 이러한 특별계시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유일하게 살아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증명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단지 상대적인 존재로 전락시켜 물질로 형상화한다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며 무지의 소치이다. 더욱이 아무 능력도 없는 우상을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두고 종교행위를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셋째, 하나님은 질투(嫉妬)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질투는 상대적 관계에서 사용되는 심리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성을 인간적인 어법으로 사용한 것이다. 성경의 예를 보면,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시킨 최초의 사건은 아담의 타락이다. 아담의 범죄는 단순히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했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도전한 것이었다. 그 결과 아담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 것이며, 그 이유 또한 하나님의 절대성에 도전함으로써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한 것에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중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놓은 뒤 성문법으로 규정함으로써 확고해진다. 율법은 우상을 만들지 말고 피조물의 그 어떤 것을 모방하여 형상화 하지 말며 그것에게 절하거나 섬기지 말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그 당위성을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밝힌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교회와 관련이 있다. 즉,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는 신랑이며, 성도들은 그의 신부로서 한 몸을 이룬다. 그런데 신부인 교회가 타락하여 세속화될 때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따라서 ‘질투’는 세속적인 관계에서의 인간적 심리현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타락은 종교성의 변질을 초래했고 이것은 외적으로 우상숭배로 나타났으며 내적상태는 탐심으로 작용한다. 여기에서 탐심은 죄이며 죄는 선악을 아는 것에서 기인된 것이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싫어하심’인 악(惡)과 관련이 있고, 우상숭배나 인간의 욕심은 악한 것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악행에 따른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며, 하나님의 절대주권성을 역설적으로 증거하는 반어법이다. 하나님의 절대성은 능력을 통해서도 증거되고,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심으로도 표현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질투’는 인간적이며 상대적인 관계에서처럼 약한 자가 느끼는 심리적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의 좋아하심과 싫어하심을 그대로 표출할 수 있는 적극적인 표현으로써의 하나님의 절대성을 계시적 용어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형상화하거나 다른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질투)에 의해서 마땅히 심판을 받는다.
  두 번째, 신(神)형상화에서 진일보한 우상숭배를 비판한다. 칼빈은 우상숭배의 기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말하자면 영구한 우상의 제조 공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는 자기를 닮은 어떤 허상을 확보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알고 거기서 위안을 찾기 전에는 언제나 불안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일상적인 체험에서 잘 배우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 거의 모든 시대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어두운 욕심에 복종하기 위하여, 상징물들을 세워 놓고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들의 눈앞에 나타나셨다고 믿어온 것이다.

  칼빈은 우상숭배의 기원을 인간이 실제로 숭배하는 현상적인 행위보다는 욕심에 둔다. 이러한 칼빈의 통찰력은 인간의 본성을 성경에서 말한 대로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그 상징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결국에는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을 신들로 여기지는 않지만, 그러면서도 거기에 무언가 신적인 능력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든 어떤 피조물이든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숭배하는 마음으로 그 앞에 엎드리는 순간 벌써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형상을 세우는 것을 금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를 조장할 만한 그 어떠한 비문이나 돌비를 만드는 것도 금하신 것이다(출20:25).

  이에 반해 로마 카톨릭 교회가 주최한 니케아 공의회(A.D. 787년)는 “교회당 내에 형상들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예배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고 했고, 콘스탄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서 신(神)의 형상화 및 숭배를 정당화하였다.

키프로스의 콘스탄스의 감독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는 스스로 형상들을 높이 공경한다고 공언하고, 자기는 그것들을 복되신 삼위 하나님께 합당한 그런 예로 형상들에게 경배할 것이라고 선언하였고, 자기와 똑같이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파문하며 마르키온파와 마니교도와 같은 부류로 여기겠다.

  칼빈은 당시의 기득권자인 로마 카톨릭교회의 신(神)의 형상화와 숭배사상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공박하였다. 즉, 우상숭배의 기원은 인간의 욕심에서 출발하며 기복적인 욕심의 발로에서 신(神)을 형상화하게 되고, 인간의 손으로 만든 조각물은 신적 대상으로 둔갑되어 숭배하게 되는 이방종교의 전형을 이룬다고 논증하는 것이다.
  칼빈의 주장과 같이 인간의 타락은 종교성의 변질을 초래하는데 이는 인간본위의 욕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는 그것 자체를 섬기는 것이며 인간 자신을 위하려는 욕심에 의한 행동의 발로이다. 이러한 행태는 인간의 죄악성에서 기인한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피조물을 섬기려도 태도에서 자명해진다. 우상숭배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자기 좋은 대로 하려는 무지(無知)한 욕심에서 시작된다. 그 결과 가인은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예물을 준비하여 제사를 드리는 최초의 우상숭배를 자행한다. 제물은 제사를 드리는 인간의 편의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판단하시며 결정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며 받으시는 제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은 대로 결정하여 드렸다. 이러한 행태는 인류의 발전사를 통해서 더욱 확고해 지며, 우상숭배의 동인으로 자리매김 된다.
  우상숭배의 동인은 ‘우리를 위하여’에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라고 언급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지체함을 보고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라고 요청했다. 여기에서도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간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는 신(神)의 제작을 요청한다. 이와 같이 모든 종교행위의 발로가 인간 자기를 위한 것에 있다. 인간의 존재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에 있는데, 인간의 죄악성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위하려는 데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신 다음에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야 할 것을 성문법으로 명시해 주신 것이다.
  우상(偶像)은 히브리어 페셀(ls,p,)이며, 아무짝에도 쓸모없음 또는 유추적으로 헛된 것  이라는 뜻이다. 헬라어로는 에이돌론(ei[dwlon)이며 나약하다는 뜻으로 ‘약해지다’, ‘굴복하다’ ‘자리를 내어주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우상은 거짓된 것이며 무용지물(無用之物)로서 자기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본래의 신(神)에게 내어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바울은 우상숭배에 대해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이라는 말로써 단정한다. 바울의 말과 같이 우상숭배는 인간이 자기 좋은 대로 선을 추구하려는 악한 생각 즉, 욕심의 발로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음으로 객체가 주체가 되어버린 형국이다. 이러한 인간의 타락성은 창조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지 못하고, 창조목적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며, 경배의 대상을 오판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인간의 욕심은 채울 수 없는 허구이기에 모든 대상을 탐욕의 도구로 삼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쫓게 되고, 하나님을 경배하기보다는 욕심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로 오판한 우상을 숭배하기 이른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아담이 타락한 이후부터 인간의 종교행위는 자기를 위한 우상숭배로 변모하게 된다. 인간의 타락 이후부터 인류는 우상숭배와 참 신(神)을 섬겨야 하는 종교적인 갈등구조 속에서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가인과 아벨에게 얽힌 살인사건도 제사로 인한 종교적인 충돌이 빚은 인류최초의 비극이었으며, 노아시대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려는 인간의 욕구와 선택된 혈통을 유지하게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충돌하는 종교적인 갈등상황이다. 바벨탑의 사건도 물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보다는 인간의 능력으로 홍수피해를 방어하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앙적인 인간의 심성(心性)을 드러낸다. 아브라함 이후에도 이방민족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민족도 끊임없이 하나님과 우상숭배 사이에서 갈등하며 충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미 익숙해진 애굽 문화권의 영향으로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제작하여 섬기기도 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우상숭배를 방지하기 위해서 가나안을 정복하면 원주민들을 몰살하라고 명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농사에 능숙한 원주민과 타협했고 결국에는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사사시대에도 사사가 사라지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곧바로 우상을 섬기며 불법을 행한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해서 건축한 성전임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그 성전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범죄를 자행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는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었으나 성전이 있는 남유다나 북이스라엘 할 것 없이 우상숭배가 성행했다.
  신약에서는 변질된 종교성에 따른 엄숙주의 및 의식적인 종교행위에 대해서 엄격하게 경계하고 단호하게 배격할 것을 촉구한다. 예수께서도 인위적이고 외식적인 종교행위를 단적으로 비판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것을 엄명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진정한 종교심에 의한 종교생활보다는 율법과 전통을 중시하며 인간의 공적(功績)과 종교적인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특히 사두개파나 바리새파는 지배계층에 속한 부류로 자만과 외식(外飾)으로 포장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종교행위 역시 형식과 위선으로 속과 겉이 다른 이중적인 태도를 표방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참 종교의 본질과 예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이다. 종교란 최고의 가르침으로서 진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자신이 길과 진리요 생명이심을 천명한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말씀(logos)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심으로써 완전하게 계시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증거하며, 지식에 까지 새롭게 변화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란 하나님의 지혜(logos)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깨닫고 경외하는 것이다. 올바른 종교생활이란 인간의 욕심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선한 일을 위하여 먹고 마시며 즐겁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지상의 교회는 인간의 공로와 외식을 지향하는 유대주의를 경계하며(히브리서), 불의하고 난잡한 생활에 함몰되는 세속주의를 배격하고(약~벧후), 그리스도를 왜곡시키는 적그리스도를 대적하여(요일~유) 싸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올바른 종교는 인간본위의 도적적인 선을 추구하는 윤리종교가 아니며 규범에 따라 공과(功課)를 판단하는 공로주의 혹은 탐심을 채우기 위해서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기복주의나 인간의 편중된 요청에 따라 모든 종교적 경향을 공유하려는 종교다원주의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근거한 계시종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고 순복하는 신본주의에 기초한 절대종교이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는 기독교만을 지칭하며, 그 외에는 어떠한 전통과 권위나 교세를 확보하고 있다하더라도 종교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고 단정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기독교 이외의 종교형태는 모두 우상숭배에 해당된다. 물론 이 주장은 타종교에서 볼 때 독선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시며, 영원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다. 또한 예수께서도 자신만이 진리요 생명의 근원이심을 주장했으며, 바울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계시를 절대적인 것으로 확정한 것이다.
  종교의 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창조목적에서 귀결되는 인간의 순응이다. 그런데 문제는 창조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자체를 섬기려는데 있으며,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에 따른 목적에 있다. 결국 종교의 본질에서 이탈한 인간의 기복적인 종교행위는 물질숭배와 세속주의에 의해서 함몰되고 만다. 인간은 시공형의 제한된 공간 속에서 보이는 형상을 통해서 사물을 인지하고 조각하려는 기본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종교적인 대상을 형상화하거나 조각물로 제작해서 섬기고자하는 죄의 본성을 드러낸 것이다. 참 종교인 기독교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서 신(神)을 형상화하여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분변(分辨)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제1권 제12장 올바른 예배의 대상
제1권 제10장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