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제1권 제12장 올바른 예배의 대상
칼빈은 신(神)에 대한 형상화와 우상숭배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경배의 대상을 확고히 한다. 특히 교황주의자들의 성자숭배사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은 신들의 아버지요 통치자 밑에 여러 무수한 신들을 두었고 또한 그 신들은 제각기 자기의 서열에 따라서 최고의 신과 천지의 다스림을 공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몇 세기 전부터는, 이 세상을 떠난 성자들이 하나님의 협력자의 위치로 격상되어, 하나님을 대신하여 경배를 받고, 기도와 찬송을 받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유일하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기를 바란다면, 그의 영광을 티끌만큼이라도 우리가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 속한 것은 완전히 그가 지니셔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칼빈의 주장은 근본적인 종교개혁사상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구호와 일치한다. 그의 말처럼 로마 카톨릭의 성자숭배사상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대상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위배된다. 그런데도 로마 카톨릭교회는 성모 마리아나 위대한 성자들에게 ‘성(聖)’이란 칭호를 붙여 신성(神聖)시하며 경배한다. 이것은 영광의 대상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영광의 가치를 보편화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신(神)의 본질을 훼손시키는 이단적인 획책(劃策)이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은 그 자체가 영원하기 때문에 인간이나 우상이 도용하거나 왜곡시킨다고 해서 훼손되거나 약화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나 거짓 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으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 표현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이 경배하는 강도(强度)에 따라서 농도가 변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도용한다고 해서 훼손되는 상대적인 성질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이방종교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방종교에 심취한 자들의 영혼이 피폐해지고, 그들의 종교행위에 허탈감만 가중시킬 뿐이다. 여기에서 성자숭배사상이나 우상숭배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올바른 종교관을 확립하고 경배의 대상을 바로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영광에 문제가 발생되거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흔히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라는 표현을 쓴다. 엄밀히 말하면 이런 어법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맞지도 않는다. 인간의 손으로 태양을 가린다고 태양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말과 행동이나 환경변화에 따라 반응하는 상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영광’은 사전적으로는 ‘빛나는 영예’를 뜻하며 빛과 관련된 의미로도 사용된다. 구약성경 히브리어는 카보드(d/bK)이며 ‘무겁다, 힘겹다, 짐(부담)이 되다, 영화롭다, 존귀하다, 견고하다’를 의미한다. 신약성경 헬라어는 독사(dovxa)이고, 도케오(dokevw)에서 유래했으며 기본 의미는 ‘생각하는 것, 의견’ 이 두 가지 형태를 취하는데, ‘나는 생각한다’라는 의미에서 ‘내가 가지는 의견’, ‘나는 ~라고 간주한다’라는 말로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가지는 의견’을 뜻하며 좋은 평판, 명성, 빛, 광채 등이다. 즉, ‘영광’에 대한 직접적인 의미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상대방의 평가에 나타난 명성이나 영화로움을 뜻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명성이나, 상대방을 통해서 평가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보유하고 계신 하나님의 본래적인 것이다. 즉, 영광은 하나님 편에서는 스스로 보유하고 계신 존귀, 영화, 빛, 광채의 본질이며, 인간 편에서는 하나님께서 계시(啓示)하고 선포하신 결과를 통해서 발견한 명성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역사 섭리를 통해서 선포된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심으로써 전능하신(엘로힘) 영광을 보여주셨다(시19:1). 전능자가 인류의 시조와 이스라엘의 열조와 언약을 세우시고 성취하심으로써 여호와의 영광을 증거해 주셨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번성시키시고 애굽에서 구출하실 때 드러났다(출애굽기). 하나님의 영광은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보호하고 인도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심으로서 드러났다(민~삿). 하나님의 영광은 언약대로 다윗의 왕국을 창건하게 하심으로써 드러났다(사무엘). 하나님의 영광은 언약대로 이탈왕조를 망하게(열왕기) 하시고 다윗의 왕조를 보호하심으로써(역대기) 드러났다. 하나님의 영광은 언약대로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민족을 바벨론의 포로에서 회복시켜주셨고, 파괴된 성전을 재건케 하시고 단절된 제사를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드러났다(선지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의 역사 섭리를 언약대로 이루심으로서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시가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의 속성을 찬양한다. 욥기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언약대로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 시편은 복과 유업을 언약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 잠언은 나라를 언약대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의 영광을 찬양한다. 전도서는 해 아래서의 행사는 헛되지만 하나님의 행사의 영원하신 영광을 찬양한다. 아가는 무조건적이며 한결같이 자비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파멸과 회복을 예언대로 이루어 주심으로써 명백히 선포되었다.
구약의 역사 섭리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욱 확고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출현과 모든 생애는 구약에서 언약하고 예언된 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 처녀잉태, 베들레헴 출생, 애굽 피신, 나사렛 이주, 삼년간 공적생애, 죽음, 부활, 승천하심으로 예언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들은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직임으로(선지직, 왕직, 제사직) 성취하여 증거되었고, 마가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신분으로 성취하여 증거되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성취하여 증거되었고,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성취하여 증거된 것이다. 이와 같이 사복음서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시겠다고 언약하신 대로 오심으로써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의 영광을 확증해 주신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은 언약대로 이루시는 역사 섭리를 통해서 어둠을 밝히는 빛과 같이 드러났으며, 그 속성은 드러난 영광을 기초로 해서 확증된다. 하나님의 영광의 속성은 첫째, 절대성이다. 인간이 취득할 수 있는 영광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환경과 상대에 따라 가치평가가 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유하고 계신 영광은 어떤 것과 비교되거나 판단될 수 없으며 상대평가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독보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은 근본적으로 하나님만이 보유하고 계신 절대적인 것으로서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부과될 수 없다.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찬양하는 것인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되었으며 그 결과 영광찬양의 대상이 바뀌게 된 것이다. 즉, 바울의 말대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거나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 하나님을 영광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영광을 찬양해야 되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로 오신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죄가 된다고 정죄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취할 수 없는 것이며 취해지지도 않는 절대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 불변성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시대나 여건 또는 환경에 따라 훼손되거나 도용되지 않으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용하여 누리거나 영광의 대상을 바꾸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히 불변하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도용한다고 해서 도용되거나 훼손 또는 감소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취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거나 헛된 시도를 할 뿐이지 본질 자체가 변하거나 변질될 수 없는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사단이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할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게 해 주겠다고 유혹했으나 예수께서는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라고 단언했다. 하나님의 영광은 상대방에 의해서 취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보유하고 계신 본래적인 것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나, 인간의 방해 그리고 외부적인 변화에 따라 퇴락되거나 탈취되고 변질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본질적으로 자충족하고 불변적이며 때문에 본래의 상태를 동일하게 유지하며 존재한다.
셋째, 영원성이다. 세속적인 영광은 시간이 흐르면 잊혀 지거나 평가절하 될 수 있으며 바뀔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무궁토록 존재한다. 이유인즉, 하나님의 영광은 상대적인 평가나 인간이 부과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보유하고 계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 영광스러운 분이시므로 더 영광스럽고 덜 영광스럽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상대적인 존재나 피조물은 가변적이며 한계성이 있지만 절대자 하나님의 속성은 영원하다. 또한 영원하신 하나님의 본래적인 ‘영광’ 역시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영원무궁토록 그 농도나 광채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심판하시는 과정을 통해서도 확고히 선포되었으며, 그 영원하신 영광은 영원히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이다. 인간의 본분은 선포된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그 영광을 영원무궁토록 찬양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영광선포는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사실을 알며,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케 하는 목적을 담고 있다. 이 목적을 포괄하는 것이 ‘계시’이며, 하나님의 모든 섭리역사가 계시를 중심으로 개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인간의 본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인데, 바울은 로마서에서 체계적으로 진술한다. 바울은 로마서 1:~11:까지에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유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명백하게 밝혀준다. 11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의 영광을 고백하며 찬양한다. 그리고 12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한 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산제사 즉, 영적 예배에 대해서 설명한다. 바울은 영적예배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며 믿음의 분량에 만족하고, 은사로 봉사하는 총체적인 성도의 삶 그 자체로 규정한다.
이와 같이 올바른 예배는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고 어떤 모양으로도 형상화시켜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 그 분의 영광만을 찬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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