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09-06-08 18:0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제1권 제13장 한 본질과 삼위의 하나님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는 초기기독교시대부터 논쟁의 불씨가 되었으며, 하나님을 소개하는 중요한 명제이면서도 신학적으로 난해한 주제이다. 삼위일체는 용어개념에서부터 수학적인 원리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숫자를 통해서 사물과 이치를 인지하는 보편적인 인식체계로는 이해의 한계가 있다. 즉, 숫자의 1과 3은 엄연히 다른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1과 3의 개념을 혼용해서 이해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한 분 이신데도 불구하고 성부, 성자, 성령의 세 분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한 분과 세 분을 바르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숫자를 초월한 개념정립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삼위를 강조하면(삼신론) 유일신사상에 위배되고, 유일신을 강조하면 삼위로 나타난 하나님의 정체성이 흐려진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주의자들과 이방종교에 심취한 자들을 향해서 하나님과 우상을 면밀하게 구별하여 논박했으며 참 신(神)은 하나님 외에 존재하지 않음을 천명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 상에 나타난 실제적인 역사(歷史)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신빙성을 확고히 세우고자 했다. 칼빈은 이러한 관점에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네 개의 단원으로 구분하여 논증한다. 즉, 삼위일체 교리의 해명을 위하여 사용된 용어들의 문제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신성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구별성과 일체성을 논거한 다음 삼위일체를 반박하는 이단들에 대해서 강한 어조로 논박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과 그 안에 삼위(三位)가 계심을 설명하기 위해서 첫째, 삼위일체 교리의 해명을 위하여 사용된 용어들의 문제를 정리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essence)과 본체(hypostasis)를 구분해서 이해함으로써 일체(一體)와 삼위(三位)의 개념을 정리한다. 먼저 신성(神性)이 모든 개체에 주입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범신론자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을 통해서 공박한다. 즉,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잣대로 그를 제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며, 또한 그가 영(靈)이라는 사실은 그에 관한 어떤 세속적이며 육신적인 상상에 빠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하나님은 하늘을 자신의 거처로 자주 말씀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분이셔서, 동시에 땅 위에도 충만히 거하신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의 의인화(擬人化)를 주장하며, 하나님을 이목구비(耳目口鼻)를 갖춘 사람으로 묘사하는 자들에게는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무한히 낮게 내려오셔서 말씀하신 것이다.”라는 의미로 정리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유일하신 분이심과 동시에 삼위(three persons)로 제시하면서 본질(本質)과 본체(本體)의 의미로 풀이한다.

본체를 본질과 동등한 의미로 생각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조잡스럽고 어리석은 해석일 것이다. 하나님의 실체는 하나요 나누어지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은 그 자신 속에 전체를 -어떤 분할이나 축소가 없이 완전한 상태로- 포괄하고 계시므로, 성자를 그런 의미에서 성부의 인(印)으로 본다는 것은 부당하며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성부께서는 그의 정당한 본성 속에서 구별되어 계시면서도 성자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시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본체를 성자 안에서 나타내신다고 말해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이다.

  칼빈은 본질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세 본체가 계신 것이”라는 의미로 정리한다.
  둘째, 삼위 하나님의 구별성과 일체성을 논의함으로써 삼위일체의 타당성을 개진한다. 칼빈은 먼저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구별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활동의 시작과 모든 일의 근원과 원천은 성부께 있고, 또한 지혜와 경륜과 모든 일의 질서 있는 시행은 성자께 있으며, 또한 그 활동의 능력과 효력은 성령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성부의 영원하심이 곧 성자와 성령의 영원하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와 능력이 없이는 절대로 존재하실 수 가 없다. 그리고 영원 속에서는 전과 후를 찾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 하나님의 순서를 살피는 것이 전혀 무의미하다거나 쓸데없는 것이 아니므로, 성부를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그에게서 성자가 나신 것으로 생각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두 분에게서 성령이 나오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각 본체 안에 신(神)적 본성이 있음을 통해서 다음과 주장한다.

성자는 동일한 성령을 성부와 함께 공유하시므로, 성부와 한 하나님이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시므로 성부나 성자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존재가 아니신 것이다. 단 한 가지, 각기 자기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보유하신다는 조건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각 본체(위격) 안에 온전한 신적 본성이 거하시는 것이다. 성부께서는 온전히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온전히 성자 안에 계시다. 그는 친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요14:10)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교회의 저술가들은 삼위 하나님의 각 위가 서로 본질이 달라서 다른 위로부터 분리되어 계시다는 논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칼빈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유일하신 본질로써 삼위의 일체성이 있음을 아래와 같이 증거한다.

우리가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에, 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써 단일하고 유일하신 본질(essence)을 생각하며, 그 안에 삼위(persons) 혹은 세 본체(hypostasis)가 계시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그냥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는 경우는 언제나 성부는 물론 성자와 성령도 지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와 더불어 언급될 때에는 두 분 사이의 관계를 상정하는 것이 되고, 그리하여 두 위(位)들이 서로 구분되는 것이다. 그러나 각 위마다 고유한 특성들이 있으므로, 그들 내에서 하나의 순서가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어서, 성부와 성자를, 혹은 성부와 성령을 함께 언급할 때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특별히 성부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증한 칼빈의 주장을 정리하면, 첫째, ‘삼위일체 교리의 해명을 위하여 사용된 용어들의 문제’에 있어서는 먼저 하나님의 본성을 무한성과 관련지어 설명한다. 하나님의 무한성(無限性)의 의미는 하나님이 영(靈)적인 존재라는 뜻이기 때문에 육신적인 상상을 금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거처를 하늘이라 말씀하신 것은 하늘에만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땅에도 동시에 거하신다는 뜻으로 정리했다. 또한 하나님의 본성을 유일하심과 동시에 삼위(persons)로 제시하며 본질(essence)과 본체(hypostasis)로 구분했다. 칼빈의 의도는 하나님의 존재를 유일하시며, 충만하시고, 삼위로 사역하심을 바르게 증거하려는 것이 확고하다. 하지만 필자가 초두에서 밝힌 것과 같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을 정확한 언어개념으로 정리하지 못하면, ‘삼위일체’의 본래적인 용도를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다각적으로 발생한다.
  칼빈의 주장을 보면, 하나님은 영(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무한하시고 하늘과 땅 모두에 존재하신다고 말했다. 칼빈은 영적이란 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영적이란 말은 하나님의 본성을 지칭하는 말로서 생명의 근원이며 본질을 의미한다. 그런데 영적인 속성을 한계가 없다는 ‘무한(無限)’이란 용어보다는 시공형을 초월한 ‘영원(永遠)’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좀 더 근본적이며 포괄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칼빈의 의도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 모두에 충만히 거하신다는 사역의 범위와 완전성을 설명하려는 데 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라는 장소와 위치 그리고 공간과 결부된 용어사용은 자칫 하나님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칼빈도 물론 이러한 문제를 의식하고 그런 상상을 악한 생각이라고 일축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런 사고를 가지면 안 된다는 단편적인 주장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하나님의 거처가 하늘과 땅 모두에 충만하다는 이분법적인 표현방식은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 역부족인 면이 있다. 혹자는 성자(聖子)가 땅에서 사역하실 때 성부(聖父)는 하늘에 계셨는가 아니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에 하늘과 땅 모두에 계셨는가하는 상상과 질문을 할 것이다. 성부와 성자가 각각 다른 공간에 각기 존재했다면 유일신 사상에(일체) 문제가 발생하고, 하늘과 땅 모두에 존재했다면 두 분 중 누가 실체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로 인해서 발생할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고 개념을 바르게 정립해야 한다. 특히 삼위일체의 용어사용에 있어서는 더욱 확고히 해야 한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의 본성을 유일하심과 동시에 삼위(three persons)로 제시하며 본질(essence)과 본체(hypostasis)로 구분했다. 이것 역시 유일과 삼위 즉, 1과 3의 숫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에 대한 중요한 과제를 남긴다. 칼빈은 1과 3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을 본질(유일)로 3을 본체(위격)로 구분했다. 문법적으로 보면 본(本)이란 근본적인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하나이어야 함을 원칙으로 한다. 그런데 칼빈은 본질은 하나로, 본체는 셋으로 구분하여 본질과 본체의 상이성을 강조하려 했다. 물론 본체는 삼위의 격(格)을 의미하지만 어원상으로는 실체나 본이 되는 바탕이 셋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하나의 본질과 셋의 본체로 구분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용법상에 있어서 무리가 있다고 판단된다. 칼빈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본질을 유일성(唯一性)으로 규정하면 하나의 의미가 부각되고, 사역의 독자성을 살리기 위해서 삼위(三位)를 본체로 정의하면 셋의 계수가 설정된다. 물론 본질은 하나이어야 되기 때문에 유일성에 대한 문제는 제기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셋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는 삼위의 사역을 본체로 처리한다는 점에서는 이해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을 한 사람이 지닌 다양한 직책이나 활동으로 이해하려는 양태론의 경향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의 말대로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존재한다면, 언어적인 차원에서 본질이 하나이어야 하듯이, 본체의 의미도 하나이어야 한다. 물론 칼빈의 주장을 호도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용어 선택에 따른 개념의 혼란이 야기될 소지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숫자 1과 3의 개념상의 문제는 수적(數的)인 의미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상의 의문을 증폭시킨다. 그래서 이 점 역시 1과 3의 수(數)를 초월할 수 있는 ‘영원’과 ‘계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수(數)로 야기되는 난해한 문제들을 정리하고 이해하는데 적합하다고 본다.
  둘째, 칼빈은 삼위일체의 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삼위(三位) 하나님의 구별성과 일체성을 논의의 근거로 삼는데, 구별성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영원에서는 전(前)과 후(後)를 찾을 수 없지만 모든 활동의 시작과 일의 근원과 원천이 성부께 있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의 순서를 살핀다고 말했다. 그래서 성부를 먼저 생각하고,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오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정리했다. 일체성은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성령을 공유하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므로 동일한 존재라고 말했다. 칼빈은 삼위일체의 구별성과 일체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본질을 성부에게서 찾았고, 위격을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방식은 성부, 성자, 성령을 상호 연결시켜 일체성을 설명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으나, 삼위를 이해하기에는 개념상 시간과 공간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칼빈은 영원한 세계에서 순서는 별의미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삼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순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삼위일체에 대한 칼빈의 문제점은 영원과 시공간의 개념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있다. 특히 삼위의 개념을 바르게 정리하지 못하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숫자로 표현된 계시적 용어로 영원하신 본질에 대한 설명이 가능한가, 영원세계에 삼위(三位)라는 세 개의 격(persona)이 존재하는가,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는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되며 어느 시점에서 낳았는가라는 시간상의 문제, 성자가 성령을 보냈다는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되며 어디에서 보내었는가라는 공간상의 문제, 성자가 성령을 보내기 이전에 성령의 사역은 없었는가라는 숱한 질문이 발생한다. 이러한 질문과 이해의 장벽 앞에서 ‘삼위일체’를 어떠한 범주에서 연구해야 되는가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하다.
  보편적으로는 유일신 사상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이며 본체는 셋이라는 수(數)의 개념으로 출발하여 본질을 성부에게 두며 성자와 성령의 동등성과 일체성을 조화시키려 한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숫자로 표현한 것에 있다. 칼빈의 말대로 영원세계에는 순서가 없다고 했으나 순서만 없는 것이 아니라 숫자도 초월하는 세계이다. 그런데 영원하신 하나님을 한 분이란 수로 설정해 놓고 다시 세 분의 사역과 연계하여 동등함과 일체됨을 설명하려는 증거방식은 난해할 수밖에 없다. 삼위 사역을 강조하면 유일신 사상의 문제를 야기하며 삼위의 영광과 권능의 동등한 신격(神格)을 강조하면 삼위는 흐려진다. 그리고 삼위의 동등성에 대해서는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오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삼위의 동등성 운운하면서 출생적인 순차를 따진다면 동등에 대한 타당성이 있겠는가하는 의구심을 낳게 한다. 뿐만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을 시간적이나 공간적으로 구분하여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모순도 나타난다. 즉, 이 말은 존재론적으로는 삼위의 영광과 권위가 동등한데, 섭리 사역적인 관점에서는 순차적이며 시공간적인 차등이 있음을 자인하는 결과가 된다.
  하나님은 수를 초월해서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올바른 신학사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수(數)와 시간 그리고 공간을 초월하는 영원 개념이 도입되고 설정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형상화 될 수 없으며, 수(數)로 표기될 수 없으며, 시간적인 순서에 따르지 않고 초월하여 존재하신 분이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본질을 ‘영원’으로 설명하고 있다.
  영원은 시공형을 초월한 하나님의 근본 된 속성이며 본질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섭리 그리고 심판에 이르는 피조세계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들이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간, 공간, 형상, 숫자를 통해서 계시하신다. 그런데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의 문제는 수(數)를 초월한 하나님의 본질을 산술적인 숫자로 설명하려는 데 있다. 즉 영원하신 하나님을 한 분으로 설정하고, 한 분을 세분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본질은 하나인데 본체를 셋으로 구분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방법은 관점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하나님을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수를 초월해 존재하시고, 시공형(時空形)과 수(數)로 계시되는 피조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으로 인지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영원세계와 피조세계의 본래적 상태와 목적에 따른 의미를 바르게 알아야 설명이 가능하다.
  영원세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 자체이며 본질이고, 피조세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시간, 공간, 형상, 숫자의 개념을 통해서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수(數)의 개념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영원’과 ‘계시’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된다. 즉, 유일신(성부)의 의미를 영원하신 하나님의 본질에서 찾고, 삼위의 동등성과 일체성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시사역의 관점에서 정리하면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본질은 수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안 되고, 존재론적 관점에서 시공형을 초월한 영원의 개념에서 정립해야 한다. 계시적인 관점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형상과 수(數)라는 인간의 언어와 인식을 통해서 자기를 증거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은 영원한 것이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계시하는 방식은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의 삼위(三位)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사역을 「에베소서」에서 성부 하나님의 작정과 성자 하나님의 구속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보증으로 증거 하였다. 삼위일체론의 핵심적인 사안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본질과 계시사역상의 삼위의 구분이다. 이러한 계시방식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을 이해해야 하늘과 땅에 공존하시는 공간적인 문제나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는 등의 형상적(혈육적)인 문제 그리고 성부(聖父)가 성자(聖子)를, 성자가 성령(聖靈)을 보냈다는 시간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방식은 존재의 본질(일체)을 영원 개념으로 해명해야 하며 삼위는 계시적 차원에서만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음을 뜻한다. 삼위일체의 바른 이해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히 증명하신 것을 아는데 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제1권 제14장 하나님과 거짓 신(神)의 구별
제1권 제12장 올바른 예배의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