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9-06-19 19:2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여호와의 영광


구약성경의 분량은 신약성경에 비교하면 거의 세 배에 이른다. 이런 분량의 차이 때문에, 대체적으로 성경에서의 중요한 용어들은 구약성경에 많이 들어 있다. 그중에서 성경적으로 매우 중요한 ‘영광’이란 단어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분량을 고려한다면, 신약성경에서 더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영광을 분석하고 종합하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호와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집약되고 완성된다. 이렇게 간단하고 분명하지만, 성도들은 실제 생활에서 영광과 관련되어 많은 혼선을 겪게 된다. 그것은 현실적인 생활에서의 생각과 행동은 우선 인간인 자신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분석하고 점검하고자 한다면 성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창세기에는 이 여호와의 영광을 직접적으로 한 번도 표현하지 않았다. 표현이 없다고 해서 여호와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창조부터 시작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이와 같음을 강조함으로써 여호와의 영광과 인간의 영광을 근본적으로 구분하여 분류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권세와 하나님의 영광은 다른 어떤 내용보다 밀접하게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 서로 간에 결과나 근거를 주기 때문이다. 권세는 힘과 연관 지어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영광을 들여다보면 결코 쉽지 않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여호와의 영광을 성경적으로 폭넓게 이해하고자 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권세에 결부시키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의 권세와 영광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영광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나누어 좀 더 구체적으로 짚어보고자 한다. 구약성경은 구조면이나 내용면에서 크게 세 가지로 되어 있다. 그것은 역사서와 시가서와 선지서이다. 내용이나 용어의 표현상에서 여호와의 영광은 선지서와 더 크게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점을 중시하여 소제목의 하나로 설정하여 간단히 분석하고, 그다음에 신약성경에 연결시켜 보고자 한다.

1) 선지서와 더 관계 깊은 영광

선지서 곧 이사야서부터 말라기서까지는 이 “영광”이 역사서와 시가서를 합친 만큼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선지서가 담고 있는 내용과 관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때리시고 싸매실 때에 여호와의 권세와 영광이 결코 배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나라를 멸하고 성민나라를 세우심(다니엘서)에도 권세와 영광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에도 여호와의 영광은 반드시 드러난다. 역사서에서의 여호와의 영광은 솔로몬의 성전과 밀착되어 있다.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殿)에 가득하다. 이것은 바로 여호와의 성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예표하기 때문이다. 시가서에서의 여호와의 영광은 시편에 집약되어 있다. 여호와의 성실성은 여호와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과 함께 진정한 주(主)로서 찬양되고 있다. 이러한 내용과 더불어 사용되는 여호와의 영광은 안성맞춤이다. 전(殿)과 제사를 회복하는 것은 오로지 여호와께만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다. 구약성경 마지막 부분에서는 참 선지자요 왕이신 제사장을 보내시는 분 곧 여호와 하나님께만 영광이 충만하심을 “만군의 여호와”로서 확증하고 있다.

2) 그리스도께 집중된 영광

신약성경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을 선포함으로 구약성경의 그 모든 여호와의 영광이 확증되었다. 이렇게 영원한 영광은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분에게로부터 나와서 그분에게로 돌아간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형상이며 영광이다. 성도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光彩)가 성도들의 마음을 비추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세가 들어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힘을 입었기 때문에, 고난받는 성도들은 오늘도 살며 참음에 이르게 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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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 화해자, 그 안에서 인식되는 창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