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9-09-18 20:0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역대기에서 에스더서로


구약성경에서 역대기부터 에스더서까지는 역사서의 뒷부분이다. 역대기와 에스더서 사이에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있다. 역대기는 다윗 왕조의 계승이고, 에스라서부터 에스더서까지는 다윗 왕조의 회복(박용기, 성경개론)이다. 이러한 의미 중심의 정리를 보면, 참으로 논리적이다. 의미 중심의 정리가 없다면, 성경을 보는 것은 참으로 난해한 일이다. 구약성경에서 역대기는 대개 재미없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 중의 중요한 한 가지는 아마 의미나 주제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의미 있는 것과 재미의 유무는 매우 밀접하다. 역대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에스더서에 큰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많이 두는 편이다. 내용이나 주제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역대기에서 에스더서까지에서 두 가지의 문제를 제기하여 언어를 중심으로 분석을  시도한다. 성경 해석에는 문법적 해석과 함께 역사적 해석과 신학적 해석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 점을 유의하여 도출한 두 가지 문제는 역대기 바로 뒤에 에스라서가 오는 문제와 에스더서가 에스라서 뒤에 놓인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문제는 서로 간에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 관계는 의미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볼 때, 의미를 중심으로 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의미를 중심으로 본다는 것은 위의 성경해석 원리와도 맥을 같이 한다.


1) 역대기에 붙은 에스라서

역대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두 인물은 다윗과 솔로몬이다. 이 두 사람은 다윗 왕조의 계승에서 핵심이기 때문이다. 역대하 36장에서는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 다음에 오는 문장 곧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로 끝난다. 신구약 성경 66권에서 앞의 내용을 그대로 다시 기록하여 연결해 가는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여기다. 에스라서의 시작은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신이시라”이다. 처음부터 “건축하라 하셨나니”까지는 두 곳의 표현이 동일하다. 이 동일한 문장 뒤에서 에스라서는 바로 재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고 강조하여 연결해 가고 있다. 이 동일한 문장에 주목하고 주시하며 주의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역대기 바로 뒤에 붙은 에스라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2) 에스라서 뒤의 에스더서

에스라서의 중심적인 의미는 성전 제사의 회복이다. 에스라서는 사로잡혔던 자손들이 돌아오는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차와 2차를 통하여 자손들이 돌아온다. 성전 제사의 회복에 자손들의 귀환은 필수적인 일이다. 이 에스라서보다 뒤에 위치하고 있는 에스더서는 에스라서보다 먼저 기록되었다. 그 내용의 사건들도 에스더서가 앞서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전통적으로 많은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크다고 한다면 클 수 있는 이러한 문제 앞에,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 그리고 에스더서로 구성되어 있는 성경의 부분을 당연시하여 막연하게 바라다볼 수 없다. 여기에서 그 대안은 성경 해석에서 의미를 중심으로 보는 신학적 해석까지이다. 에스더서에는 문법적으로 “여호와”나 “하나님”은 한 번도 표현되어 있지 않다. 성경 해석에서 문법적인 차원에서만 머물러 신학적인 해석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면, 에스더서의 주제가 여호와의 “유대 자손의 보호”임을 어떻게 포착해낼 수 있겠는가? 여기서 통치와 연계하여 에스더에서 문법적인 가치가 큰 용어를 굳이 하나 제시한다면, 바로 에스더 “왕후”이다. 의미 중심으로 에스더서를 들여다본다면 “여호와”나 “하나님”이 단락마다 또 많은 문장에 포함되어 있다. 에스더서가 에스라서 바로 뒤에 붙어 있지 않고, 그 앞에 느헤미야서가 위치하고 있는 것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거룩한 영 하나님
콘스탄티노플 신조 제2 조항에 대한 Barth의 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