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바르트는 ‘성육신’을 ‘현실성’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칼 바르트에게 “전통적인 성육신은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바르트가 “성육신(Inkanation)”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바르트가 말하는 성육신은 전통적인 성육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심”이라는 개념이 없으며 부정한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이러한 개념을 도입한 기초에는 안셀름(Anselm, 1033-1109)의 사상이 있다. 안셀름의 인간이 되신 하나님(Cur Deus Homo)은 성육신의 신비를 제시하지만,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개념화된 오류가 있다. 안셀름은 성경 계시 없이 논리적 추론으로 기독교 교리를 증명하고자 노력한 것이다(fides quaerens intellectum). 바르트는 안셀름의 존재론적 신 증명(Ontological Argument)은 거부하면서, 성경에서 밖에서 신을 사색하는 방식은 수용해서 전개했다.
바르트의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바르트의 독창적인 사고이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학습한 철학과 신학 전체를 파악해야 한다.
Die uns durch die heilige Schrift vorgeschriebene Methode setzt nicht nur dies voraus, daß die Entelechie Ichseins nicht göttlichen Wesens ist, vielmehr zum göttlichen Wesens in Widerspruch. 영역(英譯)은 The method prescribed for us by Holy Scripture not only assumes that the entelechy of man's I-ness is not divine in nature but, on the contrary, is in contradiction to the divine nature(KD., 7-8, GG., 22, CD., 7).
바르트는 성경에서 “자아의 엔켈레케이아”가 “신적 본질”이 아니지만, 또한 “신적 본질”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는데, 명료한 규정이 아니라 함축적인 진술이다. 바르트가 사용하는 중요한 어법이다. 예를 든다면 “교회가 규정한 이단은 하나님의 편에서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단이 하나님의 뜻을 막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교묘한 문장이다.
바르트가 사용한 “엔텔레케이아(entelekheia, entelecheia)”는 완전 현실태, 완료 또는 완성한 상태를 의미하는 용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 술어이다.(위키백과) 엔텔레케이아는 운동이 종료된 상태이며, 에네르게이아(Energeia, 현실태)는 듀나미스(dunamis)로 현실태를 가능하게 한다. 바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한계를 극복한 것 같은 수사 문장이다. energeia는 actuality(현실태)로 번역한다. 엔켈레케이아가 완전한 상태(the state of being complete)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운동이 종료된 상태이기도 하다.
바르트는 전통적인 성육신을 “엔켈레키이아”와 “신적 본질”로 규정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묶이지 않는 ‘자유’를 전제시켰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주(主)이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 그리고 종”이라는 멋진 문장을 제시한다. 그런데 뒤에서 제시하는 문장은 바르트의 핵심 사상인데, “인간 자신이 마련한 이해의 원칙들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반역할 수 없게 되는 뒤따름”이라는 문장이다.
Darum ist auch ihr Verstehen ein Nachfolgen, bei welchem es nicht zu einem Aufruhr des menschen aüf Grund der von ihr mitgebrachten Verständnisprinzpien kommen kann, KD., 8, GG., 22, CD., 7
바르트의 제시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할 수 없는, 즉 인간에 의해서 침해받지 않을 자유가 전제된다.
바르트는 인간의 규정이 하나님의 결정과 계시를 침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주장에 예(Ja)라 하든지 아니오(Nein)라 하든지 하나님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예(Ja)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주장에 예(yes)라고 하면 종속된다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신천지는 이단이 아니라 사이비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한 교주의 교설에 맹종하기 때문이다. 이단은 그리스도 이해를 부당하게 이해한 교회 사역자이다. 기독교 사이비는 교주가 자기 교설에 그리스도를 수단으로 동원하여 신도들을 맹종시키는 것이다. 사이비의 특징은 예(Ja)를 유도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집단 ‘아멘’을 요구하기도 한다. 어떤 구조에 자꾸 예(Ja 혹은 아멘)라고 하면, 자기 사고가 자연스럽게 주장하는 자의 논리에 함몰된다. 이상하게도 바르트도 성경 문장을 동원하면서 그러한 수사를 사용하는 것 같다(KD., 5, GG., 19-20, CD., 4-5). 바르트의 논리인 "하나님의 자유(Freiheit Gottes)"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할 수 없다”에 대해서 “아니오(Nein)”를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단일 계획(God's single plan)이라고 제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유를 인정하기 전에, 전통 신학에서 “하나님의 자유”를 말한 적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전통신학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말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를 진행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빠진 것이다. 바르트는 인간은 하나님의 유일한 거대한 작정을 거부할 수 없다고 강변(强辯)한다. 그 주장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교회는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 양식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공급하는 기관인 것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을 먹어야 산다. 바르트의 주장이 매우 강력하지만 바르트의 주장에 예(Ja)라고 화답하지 말라. 화답하는 순간 그 논리의 순환 고리에서 나오기가 너무나 어렵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die Wirklichkeit Jesu Christi)”으로 연결시켰다(KD., 8-9, GG., 23, CD., 7-8). 현실성은 Wirklichkeit인데, Reality와 Actuality로 번역할 수 있다. 전자는 인지적(perceive) 개념이고, 후자는 사실적(truly) 개념이다. 가능태와 연결할 때에는 Actuality를 사용하고(아리스토텔레스적), 하나의 계기로 다른 존재와 공재하는 현실성, 신적 현실성은 Reality를 사용하는 것 같다. 영역(英譯)에서는 Reality라고 번역했다. 우리 번역에서는 두 의미를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바르트는 사실의 질문(Tatsachefrage)과 이해의 질문(Verständnisfrage)의 조건을 잠재했다. 그리고 가능성(Möglichkeit)이 아닌 신적 필연성(göttliche Notwendigkeit)을 제시했다. 바르트는 현실성의 판(der Tefel disser Wirklichkeit)을 가능성과 하나님의 자유로 삼았다. 이러한 바르트의 전개는 불가지론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제시이다. 바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를 탈피하려고 했지만 탈출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칸트와 헤겔 사이에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많은 연구자들은 바르트와 헤겔을 연관해서 연구했다(참고, 김균진, 『헤겔과 바르트』, 대한기독교서회, 1983). 헤겔에는 좌파와 우파가 있는데, 우파(노년 헤겔 학파)는 딜타이, 빈델발트, 크로체 등이 있고, 좌파(청년 헤겔 학파)는 브루노, 스트라우스,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등이 있다. 우파는 기독교를 옹호하는 경향이 있고, 좌파는 기독교에 비판적인 경향이다. 정승훈은 1992년 바젤에서 “칼 바르트와 헤겔 좌파”라는 제목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바르트는 성육신을 엔텔레키이아(Entelechie)에서 빌크리카이트(Wirklichkeit, 현실성)로 변경시켰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엔텔레키이아로 이해하지 않고 현실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엔텔레키이아는 과거에 대한 해석이지만, 현실성은 현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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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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