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계시의 현실성을 근거: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과 가능성
앞에서 칼 바르트는 계시를 객관적은 예수 그리스도, 주관적은 성령으로 구분해서, 계시하는 하나님, 그 계시가 현실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성 그리고 가능성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음을 밝혔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2, I권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의”이고, 2장 “하나님의 계시”, 2부분 “말씀이 육신이 되심”, 3부분 “성령의 부어짐”이고, 3장은 “성서”, 4장은 “교회의 선포”이다. § 13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유이고(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과 주관성), §. 16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유(성령,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과 가능성)이다. I/1권에서는 “계시의 삼중성”을 말했다면, I/2권에서는 “계시의 활동성”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다.
현실성(Wirklichkeit)과 가능성(Möglichkeit)은(reality and possibility)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개념이다. 유물론적 변증법에서 개념화한 어휘인데 바르트가 자기 논리를 구축하면서 도입시켰다. 일단 확인된 것은 현실성과 가능성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가능성 앞에 현실성이 위치한다는 것이다. 독일 관념론 철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1882-1950)은 <Möglichkeit und Wirklichkeit>(1938년)을 출판했다.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현실성과 가능성 어휘를 사용한 것이다.
바르트는 현실성에서 가능성으로 가는 구도를 제시했다. 하나님의 계시가 나사렛 예수에게 작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객관이 되었고, 나사렛 예수는 객관적 가능성으로 진행했다. 바르트에게 성육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논쟁은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성”으로 계시가 나사렛 예수 안에 활동할 수 있다고 제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최종호는 “말씀의 성육신 속에서 계시의 객관적 진리를 만난다. 왜냐하면 그는 계시의 현실성과 가능성이기 때문이다”라고 정리했다(『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읽기』에서). 바르트의 성육신 이해는 계시의 현실성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 계시의 현실성이 전통적인 성육신과 전혀 같지 않다. 바르트의 계시의 현실성은 칼 라너의 하나님의 자기 전달(Die Selbst-Mitteilung Gottes, God's Self-Communication)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서철원 박사는 라너의 사상을 “존재 통보”라고 제시했다.
바르트는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에서 가능성으로 전개한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이다”(Gottes Freiheit für den Menschen ist das Sein Jesu Christi. KD., 28, GG., 45, CD., 25).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을 통해서 현재인의 현실성을 말하려고 한다.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나사렛 예수,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이 사고의 지향점이고, 원점은 주관적 현실성과 가능성,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유”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유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을 구도화시켰다(KD., 30, GG., 47, CD., 27). 바르트는 사고를 구축하기 위해서, “현실성”으로 하나님의 계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된 존재를 해소했다. 그것에 대한 객관적 현실성과 가능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만든 계시의 사역과 작용(des Werkes und der Wirkung der Offenbarung)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증거로 삼는다.
바르트는 “계시”에서 인간의 눈이 멀었다는 사실, 그렇지만 계시가 하나님과 인간을 함께하게 하는 것(zusammenbring)으로 제시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창조자, 화해자, 구속자로 계시되며, 인간을 피조물, 죄인, 죽음에 넘겨진 자로 특성화한다.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선을 “계시”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회의론자나 무신론자가 아니라고 강변했다. 눈먼 인간에게 계시에서 하나님과 결합해서 창출된 정보가 아니라, 기존에 있는 정보를 알 수 있도록(해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자유, 하나님의 현실적인 계시(die wirkliche Offenbarung Gottes)를 강조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코스모스(Gottes Kosmos)를 사용한다. 세계는 world, cosmos가 있는데, cosmos는 universal(보편) 개념이 있고, 이상적인 세계로 볼 수 있다. 교회는 보편적(universal) 성격이 있다. 바르트는 보편성(Kosmos)을 하나님의 계시로 두었다. 사도신경에서 교회의 보편성은 역사적 교회, 사도적 교회이다. 우리는 사도적 교회를 사도의 직분이 아닌 사도의 가르침(복음)을 선포하고 계승하는 기관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바르트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전부이다. 그 계시도 존재하는 신에게서 일어나는 것으로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인간에 의해서 확증되는 구도이다. 신이 계시를 줄 때 인간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사건에서(Ereignis) 계시를 인식하면 신의 활동이 있다는 구도이다. 그럼에도 바르트가 자기 체계에 확신(offenbar)을 갖는 것은 인간에게 그러한 현상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계시의 현실성은 코스모스의 현실성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활동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를 도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한다. 바르트는 도구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놓고 있다. 자기의 정당성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 독일, 유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가? 그 질문은 대한민국에서도 답해야 할 질문일 것이다. 바르트는 유럽에 토착화된 사고(관념론)에 1세기 예수 그리스도로 편재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바르트는 현재인에게 계시의 가능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의 현실성에서 보았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가능한가?’로 질문했고, 그 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현재인에게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은 자기들과 단절을 제시했다(Schon die Erwägung irgendeiner anderen Möglichkeit ist uns ja durch diesen Bescheid abeschnitten). 바르트의 단호한 표현이다. 자기 사고 구조에 맞지 않는 것은 단절(cut)하겠다는 표현이다. 그것은 사고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진리 여부와는 관계없다. 현대 시대는 진리 탐구 시대가 아니라, 담론 형성 시대이다. 그래서 프레임 전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진리와 관계없이 거대담론(巨大談論, meta-narrative)을 가진 자가 시대를 움직인다. 세계는 소수자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거대담론으로 형성시켰고, 대한민국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이 진리인가 혹은 도덕적인가, 양심적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이 구체화된 개념이 20세기 중반 칼 바르트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그 도구로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과 가능성)를 세운 것이다. 현대지성은 진리의 가변성(mutatis mutandis)을 기초로 두고 있다.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면서 가변성이 용인되는 구조인데, 그것은 “계시를 인식하는 인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불변성(invariability)은 “계시”에 기초할 때 가능하다. 바르트의 신학은 계시를 인식하는 인간이고, 그것에 대한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현실성과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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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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