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0-11-08 16:5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취된 계시로 예수 그리스도와 신의 인내


우리는 바르트의 신학에는 타락이 없고, 창조와 성취가 있다고 본다. 타락이 있는데, 순전한 아담의 타락이 아닌, 한 타락, 시간에서의 어떤 타락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타락-구속의 구도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타락에는 대응되는 심판이 있어야 한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간이 성취한 것으로 구원 구도를 규정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를 시간의 성취로 이해할 때, 우리가 그래서 그의 시간이 옛 시간의 한가운데에서 그리고 옛 시간 전체에 대하여 새로운 시간의 빛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옛 시간의 어떤 부분을 새로운, 완성된 시간으로 통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대단히 구체적으로 상세화된다면: 성취된 시간은 기원 1-30년의 시간이다. 그러나 기원 1-30년의 시간은 성취된 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읽혀져야 한다. 계시가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읽혀져서는 안된다: 역사가 계시가 되었다. 올바른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다의 해석일 뿐이며, 그 안에서는, 명제 자체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체이시며 주체로서 머무신다.”(교회교의학, I/2(신준호 역), 88).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한다(Gott offenbart sich)”는 바르트의 ‘§14. 계시의 시간, 1.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의 중심 요약이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1(박순경 역)에서 두 명제, “Dei loquentis persona(하나님이 말하는 인격, Deus dixit)”와 “하나님은 스스로 주로서 계시한다(Gott offenbart sich als der Herr, KD., I/1, 323)”고 정의하는데, 우리는 기독교 명제가 아니라고 제시했다. 신학의 원점(原點)이 무엇인가? 바르트는 “Deus dixit”인데,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성육신에서 십자가, 부활, 승천과 천상통치)”이다. 바르트는 역사를 강조하지만 Deus는 시간(역사) 밖 세계이고, 반대로 기독교의 복음은 역사 안에 있다. 그런데 바르트는 시간을 강조하고, 기독교는 영원을 강조한다. 바르트에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시간”일 것이다. 필자는 그러한 바르트의 주장을 독단(獨斷, arbitrariness)이라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간이 성취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트를 따름은 기독교 정통 신학을 따름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의 증거는 세계 역사에 드러난 합법적 문서이고, 일주일 시간으로 구성된 생활 양상이다.

“1.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것은 만일 성서 안에서 증거되는 계시에 비추어 말해진 것이라면, 하나의 사실적인, 이미 사건이 된 통치행위를 가리키면서 말해진 것인데, 이것을 말하는 자는 그 통치행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GG., 88)

“2.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것은 성서 안에서 증거되는 계시에 비추어 말해진 것이라면, 하나님의 통치행위에 대한 인간의 실제적인 저항을 가리키며, 이 저항에는 그 명제를 말하는 자도 함께 참여되고 있고 함께 책임져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GG., 89)

“3.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것은 성서 안에서 증거되는 계시에 비추어 말해진 것이라면, 특수하고 새롭고 직접적인 하나님의 행위가 실제로 발생하는 기적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옛 시간의 한가운데에서 동터 오는 새 시간이다.”(GG., 94)

“4. 만일 시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에 근거하여 아직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시간을 더 이상 무도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유한한 시간으로, 그래서 소위 현재로부터 다른 현재로의 흐름을 그것의 종말로부터 시작되어 그것의 종말로 향하는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GG., 100)

첫째, 자유주의, 현대신학의 연구자들의 특징은 조건(만일)으로, 가설을 설정하여 증명하는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전적인 학(學, science)이다. 학문은 전제를 설정하고 그 전제를 논리적으로 증명한다. 그러면서도 귀납법적으로 연구한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 없다. 과학에서 전제가 없는 귀납은 존재할 수 없다. 전제를 합리적으로 증명해야 학이 되고, 증명된 학은 반드시 비판적 논증까지 허용해야 한다. “귀납법이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가 특수한 사례로부터 일반적인 진리를 설정하는 추리의 과정으로서 생각해 낸 것이었지만,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 처음으로 과학에 있어서 귀납법의 작동을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과학사사전, 2011. 2. 1. 이호중)). 존 로크(J. Locke, 1632-1704)가 제언한 Tabula rasa(빈 서판, 백지가설)는 당시 시대 가치를 부정하는 전제를 선언하는 것이다.

둘째, 바르트는 하나님의 통치행위, 저항, 그리고 새로운 시대로 전개하였다. 신의 계시에 저항하는 인류의 시간을 제시하며, 계시가 은폐된 것으로 규정하였다. 은폐된 계시 시대에 신의 계시에 저항한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바르트는 아담의 죄성이 통용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김세윤도 반복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거절하고 극도로 제한된 자기 힘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행위를 ‘죄’로 표현하였다. 구원은 죄성을 끊고 무한한 자원과 연결되어 사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아담적 실존(신을 저항하는 정신)에서 벗어나야 구원이 되는 것이다. 바르트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을 에포크(Epoche)라고 규정하였다(GG., 93). 그리고 거기에서 드러난 계시는 신은 자기를 거절하는 인간을 거절하지 않는 것이다.
계명을 어긴 자에게 진노하는 신은 은폐된 지식에 근거한 가르침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신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규정하였다(GG., 96). 그래서 필자는 모든 것이 가능하겠지만 분노, 심판, 지옥에는 가능성이 없다고 제언한다. 즉,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밝힌 것은 신을 저항한 인간을 포용하는 신의 관용의 가능성이지, 신의 계명을 어긴 자를 심판하는 방향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시간은 종말이고, 종말에서 종말로 흐른다(GG., 100).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종말로 이해한 것은 자유주의의 시간 이해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종말 이해는 1세기 예수의 죽음 이해이며, 현재 상황의 이해이다. 천국과 지옥, 시간의 종결, 영원한 상태 등은 종말론에서 취급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종말로 가는 시간을 신의 인내(Gott Geduld)의 시간으로 규정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에게 인내를 요구하는데, 바르트는 신에게 인내를 부과시켰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성취된 시간 이후에 있는 우리의 시간을 신이 인내하는 시간으로 규정하였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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