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계시의 기대: 동의할 수 없는 바르트의 구약 이해
『교회교의학』 I/2(신준호 역), § 14. 계시의 시간(Die Zeit der Offenbarung) “1. 성취된 시간(Erfüellte Zeit)”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die Zeit der Jahre/the time of year, 년(年)시(時)) 1-30으로 규정하였다(GG., 87). 신준호는 ‘기원’으로 번역하였는데, 바르트는 예수의 시간을 년도와 관계없는 30년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기대의 시간(Die Zeit der Erwartung)”에서는 구약 성경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다.
바르트는 계시의 통일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말할 수 없다. 그래서 “통일성을 기대와 성취의 관계성”으로 제시하였다. ‘성취(Erfüllung)’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기대(Erwartung)’는 구약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바르트는 그 내용을 세 가지로 제시하였다. 간략하게 먼저 정리하면 첫째 신의 자유로운 행동으로 언약(berith), 둘째 은폐된 신의 계시되어짐, 셋째 인간에게 오는 신의 증거로 제시하였다.
1. “구약성서는 신약과 마찬가지로,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배타적으로 유일회적인,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계시에 대한 증거이다”(GG., 113). 신준호가 “구약성서와 신약”으로 번역한 것은 바르트가 “das Neue das Zeugnis”로 사용하였기에 “신약성서가 아닌 신약”으로 번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영역(英譯)에서는 Old Testament and New Testament로 번역하여 차이점을 드러나게 하지 못하였다.
바르트는 구약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현존을 이스라엘 민족의 독특성과 특수성(Einheit und Eigenart des Volkes Israel)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unity and peculiarity(독특성과 특수성)는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점이다. 1962년 바티칸 2차 회의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을 결정한 것은 바르트의 이러한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전통적인 성경 독법은 구약 시대의 독특성과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이스라엘 민족 밖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과감하게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제거하였다. 우리가 이순신, 세종대왕, 김유신 등의 구원에 대해서 침묵을 하지만, 2차 바티칸 회의, 바르트의 견해를 따르면 하느님의 자유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유아 사망에 대해서만큼은 좀 더 넓은 판단을 시도하기는 한다.
바르트는 구약에서 베리트(berith)를 도출시켰다(GG., 114). 바르트는 베리트, Bund/covenant를 출애굽과 관련시켜(Auszug aus Agypten) 진행한다. 바르트는 언약을 이스라엘 민족과 구출자라고 인지되는 신(神)과 관련시킨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지(認知)한 신(神)이 애굽에서 탈출시킴과 함께 토라(제의적 도덕적 율법)로 묶는 것을 신의 자비로 파악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약 안에 율법과 은혜를 배치시켰다(Der Bund ist Gesetz Gnade, abenso wie er als Gnade Gesetz ist, - Der Bund ist Gnade: er zwingt Gottes nicht, sondern er ist für Gott jederzeit lösbar). 바르트는 신(神)이 언약을 해지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며, 언약에서 신의 자유와 신실 그리고 죄를 용서하고 복을 주는 자비로 규정하였다. 신이 언약을 유지하기 위해서 구약에서는 희생제물을 요구하였지만(구약 성서적 베리트), 완전한 언약인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의 희생제물이 되는 것을 기대하였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위대한 중보를 해낼 인격이다. 그래서 예수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다. 우리는 칼빈이 선지자, 왕, 제사장 순서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밝힌다(기독교강요 2권 15장). 칼빈은 순서의 차이를 두지 않은 것 같지만, 바르트에게 순서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바르트는 왕의 권력을 포기하고 야웨를 지시하였고, 제사장, 선지자로 제시하였다. 즉 역(逆)으로 설명하였는데, 왕에 대해서 포기를 제시하였다. 개혁파 신학에서 그리스도는 천상의 왕적 사역(Christ as heavenly King)을 명시적으로 선포한다. 삼중직에서 선지자와 제사장의 사역을 강조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현존은 통치가 아닌 단순한 느낌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바르트에게 성자 하나님께서 보좌에서 교회와 세상을 통치하심에 대한 인식이 없다고 볼 수 있다.
2. 바르트는 구약 성서와 신약이 마찬가지로(계시의 통일성), 구약에서 신을 은폐된 신으로 유지되다가(der Gott ein verborgener Gott bleibt) 스스로 현시되는 계시 과정에 대한 전개로 제시하였다(GG., 118, KD., 93: 참고 사 45:15). 바르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더 문명되었다고 평가하였다(GG., 118). 성경은 가나안 7족속의 죄악 때문에 심판받음으로 제시하고 있다(창 15:16). 바르트는 출애굽한 민족이 가나안에서 계명 준수와 평화 공존의 두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였다고 분석하였다(GG., 119). 성취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신의 은폐성은 드러났고, 구약은 은폐된 신의 계시이다.
팔레스타인의 우수한 문명, 가나안 사람과 평화 공존 등으로 바르트가 이해하는 구약 이스라엘 이해는 성경 본문과 다른 이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팔레스타인이 우수한 문명인 것처럼(철기 문화) 묘사된 부분은 있지만, 성경의 관심 분야는 우수한 경제력이나 군사력에 관한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특이하게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고난을 받은 이유를 “불신(不信)”으로 평가하였다(GG., 121).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라 징벌을 받은 것이며, 징벌을 받은 이유는 율법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압제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선지자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주의 율법을 가르칠 제사장이 임무를 다하지 않자 선지자를 세우셨는데 선지자의 말씀까지 불순종하여 멸망에 이르렀다. 일단 바르트의 신학은 해방신학(압제 해방)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겠다.
바르트는 고난당하는 이스라엘과 고난당하는 그리스도를 동일화시키며(GG., 123) ‘은폐성’으로 무마하려고 하지만, 부당하다. 바르트는 신이 죄인을 사랑하는 것을 낯선 일(opus alienum)이라고 제시하였다.
3. “구약성서는 신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시는 하나님으로서 현재하시는 계시에 대한 증거이다”(GG., 128).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대해서 왕에 대해서 설명을 중지하면서, 여기에서 제시한다. 그 왕적 통치를 신(神)에게 두었다. 바르트는 코케이우스(Coccejus) 등의 연방신학(Federalism)을 루터와 칼빈의 동류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에 대한 것이다. 바르트는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만을 제시하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의 통치와 신약의 통치가 다르지 않다. 은폐된 신으로 통치하는 왕과 언약을 맺은 땅의 권세자들이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정치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한 것이 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통치가 아닌 배척받아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런데 바르트는 독특하게 교회와 회당의 일치를 주장하였다(GG., 135-136). 신약성경에서 회당과 교회는 분리되었고,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각각 분리를 구체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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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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