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4-05-22 09:5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에스더서의 日記


일기(日記)는 에스더서에만 나오고 있다. 이것의 가치는 66권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함에 있다. 에스더서를 거론하면,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따라 나온다. 인간에게 목숨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다. 에스더의 이름은 편지와 관계된다. 부림절을 지키라는 편지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감사와 찬송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신약성경에서 데살로니가서와도 깊이 연계되어 있다. 에스더서에서 일기(diary)는 이 편지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일기는 에스더서에 세 번 나오고 있다. 2장 23절과 6장 1절과 10장 2절이다. 너무도 적재적소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에스더서의 이 세 곳만을 잘 연결해도 전체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더욱이 에스더서는 역사서(섭리를 통한 언약)의 결론이다. 섭리를 통한 언약은 인간을 통한 언약이다. 또 시공(時空)을 통한 언약이다. 에스더서를 이런 측면으로 강조하면서, 그 일기의 의미를 두 가지로만 정리하고자 한다.


1) 증거의 기록이다.

에스더서의 일기는 생사를 가늠하는 기준이다. 일기가 없었다면 유다인들은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더서의 일기는 평범하지 않다. 바로 궁중(宮中) 일기이기 때문이다. 궁중 일기는 한 나라의 증거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 증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룻기의 증거를 떠올릴 수 있다. 룻기는 통치언약 성취의 시작이다. 룻기 앞의 사사기는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로 끝나고 있다. 룻기의 시작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이다. 땅보다 때를 앞세워 강조하고 있다. 이때는 에스더서의 “아하수에로 왕 때에”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에스더서에는 여호와나 하나님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부정하는 데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증거의 근본이 섭리이기 때문에, 여기서 섭리(providence)를 강조하여 부각하고자 한다. 섭리는 중국(한문)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말 성경에 사용되지 않게 된 것과 매우 밀접하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 계시섭리다. 구약성경은 언약섭리다. 신약성경은 성취섭리다. 이렇게 큰 의미를 담고 있어 중요하기 때문에, 섭리(攝理)의 섭(攝) 자를 분석하고 풀어봄으로 이 의미의 방대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또 섭리(providence)에서 영상(影像)의 내재다. 그 영상은 바로 비디오(video)다. 이 비디오는 증거에서 매우 중요하다. 섭(攝)에서 귀 이(耳)가 세 개 있기 때문에, 그 무게나 신비감 등은 더 크다. 창조섭리를 사용하면, 이것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제일 위의 이(耳)는 인간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창조의 핵심은 생령(生靈)이다. 삶의 마지막까지 가장 예민한 것이 청각이다. 아래의 두 이(耳)는 각각 공간과 시간이다. 귀가 얼굴의 옆에 달린 것은 공간감각과 매우 밀접하다. 소리는 시간감각과 친밀하다. 이 섭리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증거를 담는다.


2) 섭리의 증거이다.

일기는 기록이며 증거다. 그날 밤에 아하수에로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역대 일기를 가져와 그 앞에서 읽도록 명령하였다. 위 섭리의 의미에서 때를 간과할 수 없듯이 “그날 밤”은 매우 강조되고 있다. 그날 자체를 강조하기보다 섭리를 부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은 다윗이 옥상에 올라간 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섭리다. 창조섭리에서 심판섭리까지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룻기부터 에스더서까지에서 날이나 때 등에 관심을 가지면 매우 흥미진진할 것이다. 모든 때의 섭리를 강조하는 전도서 3장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에스더는 둘째 편지를 굳게 지키도록 하였다. 에스더의 삶이 섭리를 거론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까? 에스더서의 일이 아하수에로왕 때에 있었다. 에스라서는 바사 왕 고레스 원년(元年)으로 출발되고 있다.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게 한 사적이 메대와 바사 왕들의 일기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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