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4-05-22 09:5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불신앙으로서 종교(5) 단회적 화해, 예수 안에서 이뤄진 교환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I/2』, § 17 “종교의 지양으로서의 하나님의 계시(Gottes Offenbarung als Aufhebung der Religion)” 2. 불신앙으로서 종교에서 2.(KD., 335; GG., 383)를 진행한다.

2. Die Offenbarung ist als Gottes Selbstdarbietung und Selbstdarstellung die Tat, durch die er den Menschen aus Gnade und durch Gnade mit sich selber vers hnt. Sie ist, indem sie eine radikale Belehrung uber Gott ist, zugleich die uns als den Ungerechten und Unheiligen und als solche Verdammten und Verlorenen widerfahrende radikale Hilfe Gottes(KD., 335).
As the self-offering and self-manifestation of God, revlation is the act by which in grace He reconciles man to Himself by grace.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수여(제공)이자 자기 현시로서, 하나님이 은혜로 그리고 은혜를 통해 인간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행위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급진적인 가르침인 동시에 불의하고 거룩하지 못한 자, 저주받고 길을 잃은 자로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급진적인 도움이다. 이 점에서도 계시 자체가 인간에게 전하고 전제하는 진술은 인간이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도 스스로 도울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제공과 자기 서술로서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은혜로부터 그리고 은혜를 통하여 자기 자신과 화해시키는 행위이다. 계시는 하나님에 관한 근원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에 또한 동시에 불의한 자 그리고 거룩하지 않은 자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저주받은 자 그리고 타락한 자인 우리에게 수요되는 하나님의 근원적인 도움이다”(GG., 383).
바르트는 ‘계시(Offenbarung, revelation)’에 대한 자기 개념을 반복해서 밝힌다. Die Offenbarung ist Gottes Selbstdarbietung und Selbstdarstellung(계시는 신의 자기 수여(제공)이며 자기 현시이다. KD., 328: Revelation is God's self-offering and self-manifestation. CD., 302). 즉 바르트는 계시를 신이 자기를 사람에게 제공하고 보여주는 것으로 제시한 것이다. 바르트의 계시 이해는 처음부터 동일하게 계속 반복된다. 바르트의 계시 이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바르트의 계시 이해는 개혁신학과 같지 않다. 개혁신학의 계시 이해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이 부분에서 바르트는 계시 이해에 ‘화해(Vers hn-ung, reconciliation)’를 추가시켰다(revlation is the act by which in grace He reconciles man to Himself by grace).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화해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제시한다. 바르트는 계시와 화해(Offenbarung und Ver hnung)를 연결하고, 종교와 우상숭배로 연결한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Ⅳ/1에서 화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제시한다(그리스도의 삼중직, 제사장, 왕, 선지자: 칼빈은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제시함 – 칼빈은 구속주로서 삼중직인데, 바르트는 화해자로서 삼중직이다). 김용준은 바르트가 계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상은 헤겔에 의존하여 ‘인간 예수’에 근거한 일치와 화해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바르트의 계시관에 대한 개혁 신학적 비판”, <개혁논총>, 31권, 2014년).
바르트는 사람이 진리를 증명할 능력이 없다고 규정한다(GG., 384). 그런데 바르트는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가온다고 확정한다(GG., 384). 이러한 구도는 바르트의 독단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자기 독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특징이다. 바르트가 가진 구체적이고 확실한 예수 그리스도 제시가, 바르트의 신학을 기독론 중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유일신, 신의 자유와 사랑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의 도구로 예수 그리스도가 사용될 뿐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진리를 계시에서 인식된 신으로 규정한다(Wahrheit ist es als offenbarte Erkenntnis Gottes., KD., 336). 그리고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규정한다(Wahrheit ist es in Jesus Christus. KD., 336).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이 인식되었고,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설은 『교회교의학 I/2』, § 15에서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으로 제시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객관성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진 것으로 제시한다. 바르트는 화해에서 칭의, 성화 그리고 회개까지 통합시킨 완성 개념으로 구성시킨다. 바르트는 이 화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회적으로 발생한 것을 주장했다(Und es besteht unser Glaube an Jesus Christus darin, daß wir anerkennen, gelten lassen, recht sein lassen und annehmen: das alles ist in Jesus Christus ein f r allemal auch f r uns geschehen. KD., 336). 이러한 신학 구도는 종교개혁 후기에 형성된 이해이다. 종교개혁 신학은 천상의 주 예수의 통치를 기준으로 통치의 실현이 복음 선포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는데, 후기에는 십자가 이전의 그리스도의 생애로 그리스도 이해의 중심이 옮겨졌다. 현대에 들어서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옮겨지기도 했다. 어떤 부류는 골고다의 십자가에 집중하기도 한다. 바르트는 예수의 생애에서 계시의 객관성의 완성, 화해가 성취된 것으로 제시했다.
바르트는 고린도후서 5장 18~20절에서 화목(reconciliation)에 해당하는 헬라어 katallage(καταλλαγ )를 “교환(Austausch, exchange)”으로 제안했다. katallage은 reconciliation(화목)과 exchange(교환) 등의 의미가 있는데, 두 의미를 한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화목을 다른 말로 하면 교환이 된다. 이 교환된 장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 신학에는 죄사함이 없어도 된다. 이미 예수 안에서 교환이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임마누엘은 죄인과 함께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죄에서 구원한 주(마 1:21)님과 함께 임마누엘(마 1:23: 고경태, “칼 발트와 존 칼빈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 비교 연구”, 총신대 박사논문, 2007, 171).
구원 이해에서 교환(Mirifica Commutatio, wonderful exchange)은 루터의 글에서 등장한다. 칼빈은 성찬 이해에서 사용했다. 고대의 나지안주스 그레고리(Gregory Nazianzen, 329-390)는 삼위일체, 성육신의 신비를 찬양하는 시에서 표현했다. 그런데 청교도 신학에서는 칭의 이해로 옮겨졌고(청교도의 이중전가, double imputation), 바르트는 보다 구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청교도는 예수와 사람의 교환 형태인데, 바르트는 예수 안에서 교환이 이루어진 것으로 제시한다. 바르트의 이해는 구원파적 이해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단회적으로 성취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교의학 I/2』, § 16의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은 성령의 작용으로 모든 사람에게 예수의 객관적 현실성이 적용된다. 이것을 막는 것이 우상숭배가 된다. 구원파와 다른 것은 바르트는 과감하게 예수를 유기된 자로 규정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되고 유기된 자이기 때문에 그는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의 주인이시고 머리이다(KD., II/1, 389). 참고. 로마서 3장 25절의 ἱλαστ ριον(화목제물, propitiation), 로마서 5장 10-11절(reconciled)과 고린도후서 5장 18-20절에 나타나는 καταλλα(화목, reconciliation) 용어 번역에서 등장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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