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바르트 은혜로운 “학문으로서 신학” vs 죄사함의 은혜의 복음을 전함
우리는 바르트 신학을 공부하거나 비평할 때에 자기 신학 개념을 명확하게 세우는 것을 제언했다. 혹은 명확하게 세우는 훈련을 병행해야 한다. 그래서 바르트의 개념에 동의하든지 거부하든지 선택할 수 있다. 자기 신학 개념을 확립하지 않으면 결코 바르트의 신학을 분별할 수 없다. 또한 현대신학이나 이단 사상을 분별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이 두 방향, 수직적 방향과 수평적 방향에서 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전자는 직접적인 말씀이나 체험에서 갖는 신 지식이고 후자는 역사적 교회가 가진 진리이다. 바르트는 역사적 교회가 가진 진리, 사도의 믿음, 사도가 전한 복음의 내용을 수정하려고 한다. 바르트는 수직적 계시를 절대가치로 세우는데, 수직적 계시의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할 근거가 없다. 그래서 교회의 학문적 검토라는 것을 통해서 가치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Dogmatik ist als theologische Disziplin die wissenschaftliche Selbstprufung der christlichen Kirche hinsichtlich des Inhaltes der ihr eigentumlichen Rede von Gott. “교의학은 신학적 훈련(원리, 지침)으로서 교회에 고유한, 하나님에 관한 말(진술)의 내용에 관해서 그리스도 교회가 수행하는 학문적인 자체검토(검증)이다.”(박순경)이다.
바르트는 신학을 세 종류로 제시했다. “신앙과 삶의 단순한 증언의 신학과 예배 신학”으로 했고, Theologie als Wissenschaft(학문으로서 신학)이 신의 말함의 책임과 취약성에 대한 불가피한 교회의 조치라고 했다. Theologie als Wissenschaft, im Unterschied zu der ,,Theologie" des einfachen Glaubens und Lebenszeugnisses(신앙과 삶의 증언) und im Unterschied(구별) zu der ,,Theologie des Gottesdienstes(예배) ist eine Maßnahme(조치) der Kirche, ergriffen im Blick auf jene Anfechtbarkeit und Verantwortlichkeit ihres Redens[KD., 2 / GG 28]
바르트는 “학문으로서 신학”을 말하면서 “die rechtfertigende Gnade(의롭게 하는 은혜, justifying grace)”를 제시했다. 타락한 인간은 언제나 잘못된 가치를 선한 것으로 평가한다. 바르트는 신학은 은혜에 대해 복종하는 행위이어야 한다고 했다. 바르트가 말하는 은혜(Gnade, grace)는 무엇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은혜는 무엇인가? 혹은 원불교가 말하는 은혜는 무엇인가?
바르트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어지는 것으로 구상화했고,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인간의 미래는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보편적 가치를 제시했다. 바르트는 은혜에서 죄를 알게 된다고 제언했다(복음이 율법 앞에 선 구조로 구상화했다. 이전에는 율법 뒤에 복음이 위치했다). 바르트에게 은혜는 신의 주권적인 사랑과 자유이다. 우리는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죄사함의 은혜, 율법을 성취하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속죄하신 은혜를 지시한다. 분명한 것은 ‘은혜(恩惠, grace)’라는 단어를 모든 사람이 사용하지만, 그 개념은 같지 않다. 학문 훈련은 자기가 사용하는 어휘 개념을 명확하게 확립하는 것이며, 그 개념이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근거를 갖도록 훈련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 은혜 개념은 원불교에서 사용하는 은혜 개념과 같을지도 모른다. 원불교에서 은혜는 절대적인 성격으로 주어진 모든 것(천지, 부모, 동포, 법률)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포용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선으로 포용하는 것이 은혜인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신학적 의미는 없다.
바르트는 교회의 기능을 신학하는 것으로 규정했다(Dogmatik ist eine theologische Disziplin. Theologie ist aber eine Funktion der Kirche. 교의학은 한 신학적 훈련이다. 신학은 교회의 한 기능이다). 그리고 반복해서 학문으로서 신학(Theologie als Wissenschaft)을 제언했다. 그런 이유는 하나님에 관해서 말함(Rede von Gott(talk about God), Gott redet(talks about God, Deus Dixit), Reden Gott(speaks of God))이 교회에서 수행되고 발생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신에 관해 말하는 것(신에 대해서 말함, 신이 말함, 신의 말함)에 대해서 세 가지 형태를 제시했다.
신이 말함, 신에 대해서 교회의 말함, 교회의 행위는 모호하다. 신학 훈련을 통해서 모호한 의미를 확정적으로 산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고백해야 한다(Die Kirche bekennt sich zu Gott). 그 고백은 신이 말하는 것에 근거해서 수행해야 한다. 바르트는 이 고백을 교회가 아닌 개별자의 고백으로 구상했다. 개인들도 믿음을 고백해야 하지만, 개인의 고백과 교회의 고백이 일치되는 것은 좀 다른 문제이다. 바르트는 꾸준한 훈련 과정이기 때문에 일치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 그래서 바르트는 개인의 고백이 교회의 고백과 동일한 수준이 된다. 즉 교회의 고백(confess)이나 개인의 고백도 신학적 훈련 과정에 있다. 이 모호한 의미가 은혜를 만날 때에 확실해진다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다. 바르트에게 은혜가 강조되며, 인간의 행위와 신의 절대성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게 된다. 다만 바르트가 개념화한 것을 동의할 때에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전통적인 교회의 개념을 새롭게 구성시켰다는 것이 확실하다. 바르트는 교회의 믿음과 진리로 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지는 신의 계시에 근거해서 신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르트가 개념화시킨 ‘은혜’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개념화한다. 하나님의 영원에서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은 ‘은혜’라 하지 않고 ‘자비(mercy)’로 연결한다. 바르트의 신학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잘 보이지 않지만, 루터와 칼빈의 신학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신학 전반에 반복적이고 핵심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자비는 절대 예정과 견인, 구원의 확실성이 연결되어 있다. 바르트에게 자비는 신의 무한한 사랑일 것이다.
결국 바르트의 은혜 개념에서 신의 말함, 신에 관해 말함, 신이 말함에 대해서 제지하는 것은 악이 될 것이다. 그래서 교리의 기능을 검열(inspection 혹은 분별, discernment)이 아닌 학문적 자기검토(wissenschaftliche Selbstprufung)로 바꾼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 체계에서는 규범적인 권징(Disziplin)을 할 수 없고, 개별적인 신학적 훈련(theologische Disziplin)을 수행할 뿐이다. 그것은 ‘은혜’의 개념 때문에 그렇다. 푯대가 분명하다면 푯대를 기준으로 규범적인 권징을 수행할 것이다. 그러나 푯대가 유동적이면 규범적인 훈련이 아니라 유동적인 훈련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정해진 규범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권징을 할 수 없다.
바르트는 “학문으로서 신학”을 제시한다. 바르트가 말하는 학문은 더 좋은 의미를 도출시키는 훈련이다. 바르트는 교회의 기능을 “신학적 훈련”으로 제시하지만, 우리는 복음 기관으로 복음을 전도하는 기관으로 주장하고 있다. 교회는 말씀을 전하고 들음과 성찬을 수행하여 그리스도인으로 경건을 세우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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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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