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교회와 주관적 현실성
칼 바르트는 삶, 교회, 주관적 현실성을 연결하고 있다(4. Das Leben der Kinder Gottes und also die Kirche, die subjektive Wirklichkeit der Offenbarung ist göttlich und menschlich, ewig und zeitlich und also unsichtbar und sichtbar”. KD., 239, GG., 279).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unsichtbar und sichtbar)을 통합하는 독단을 제언했다.
신준호 번역에는 아래의 문장이 생략된 것 같다. Es ist in seiner ganzen Verborgenheit in Gott immer auch geschichtliche Wirklichkeit, Always in its entire hiddenness in God, also an historical reality(KD., 239, CD., 219) “그것은 항상 신의 은닉성이고, 게쉬히테적 현실성이다.” 바르트는 계시의 현실성은 곧 신의 은닉성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게쉬히테적 현실성으로 규정한다. 영역이나 신준호는 geschichtliche를 역사적으로 번역했는데, 게쉬히테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바르트가 사용하는 어휘의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계시가 역사의 술어가 아니고, 역사가 계시의 술어이다”(CD, I/2, 58, 프레임, <서양철학과 신학의 역사>, 전계광 역, 549). “계시는 역사의 주어이고, 역사는 계시의 술어”로 규정하고, 계시의 주어를 알기 위해서 술어를 알아야 한다는 구도를 제언한다. 그러나 바르트가 사용하는 어휘가 정통신학을 계승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바르트는 신의 확실성은 은닉성(Verborgenheit)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학을 부정신학이나 긍정신학으로 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부정신학 계열에 있다. 부정신학은 일자를 기본으로 하는 3세기 신플라톤주의의 플로티누스에서, 5세기 위(僞) 디오니시우스, 13세기 신비주의 사상가 에크하르트,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등이 있고, 현대에서는 니체, 하이데거, 모리스 블랑쇼, 자크 데리다 등이 부정신학 라인에 있다.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적 현실성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역사적 현실성에서 신은 은닉성이 되는 것이 특징이다. 즉 바르트에게는 계시의 점진성 개념은 없으며, 성육신에서 신은 감춰졌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신은 은닉되고 사람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교회가 가진 구원의 서정, 신적인 선택(göttlichen Erwählung), 소명(Berufung), 조명(Erleuchtung), 칭의(Rechtfertigung), 성화(Heiligung)로 제시했다(GG., 279). 신준호가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번역했는데, 신적 선택(divine election)으로 번역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택과 신적인 선택의 차이는 시간 이해에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영원에 있다고 이해하는데, 바르트의 ‘신적 선택’은 시간 안에서 발생한다. 구원의 서정에 조명(illimonation)을 넣은 것은 독특하다. 바르트는 이러한 서정이 아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구도로 이끌었다. 인간, 사건은 보이지만, 신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성에서는 신이 은닉되지만 계시는 발생한 것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성(Gottmenschheit)의 문제라고 제시했다. 참고로 하르낙은 “구원자의 신인성(Gottmenschheit des Erlosers)”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제시했다. 바르트는 “신인성과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인 명제를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으로 대체시켰다.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은 언제나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 대하여, 시간적 만남과 결단에 의하여 성취되는데, 이 만남과 결단은 시간적이고, 보이는 것이며, 생각될 수 있고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GG., 280: die subjektive Wirklichkeit der Offenbarung vollzieht sich für jeden jederzeit und überall auch in einer zeitlichen, sichtbaren, denk - und erfahrbaren Begegnung und Entscheidung). 바르트는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이 시간, 시각, 생각, 경험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측정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가치평가 범위에 두지 않은 것이다. 바르트는 계시를 측정가능한 수준으로 규범화시켰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의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과 “교회의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 교회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규정하고 있으며, 공동체성은 사람들이 보여지고, 경험되고, 사고되고, 인식될 수 있는 수준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교회 공동체의 규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적인 회합과 형태이면서도, 인간의 산물로 이해될 수 없는 구조를 제시한다. 바르트가 제시하는 문장 형태는 불확정성 원리에 부합되는 문장이다. 불확정성 원리와 역설(paradox)은 같지 않다.
바르트는 지금까지 성서적 명제라고 여겨졌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은 잘못된 이해라고 규정했다(GG., 282: Wir müßten die biblische Gleischung, die uns bisher als Leisatz diente: die Kirche ist der Leib Christu, schlecht verstanden haben, wenn wif es anders sagen wollen, KD., 241). 바르트가 정통 명제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너무나 쉽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당신은 교회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바르트는 이전에는 “성경적 가르침이 교회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규정했는데, 그것은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바르트가 교회교의학 I/1, § 1,에서 밝힌 재검토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결과일 것이다. 바르트는 평생 연구를 했는데, 초기부터 이미 그러한 개념이 구체화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정통 신학이 매우 쉬운 교회 개념까지 변환시킨 것을 보면, 신학의 모든 개념을 전환시킨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바르트는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die subjektive Wirklichkeit der Offenbarung)”을 말한다. 그리고 객관적 현실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런데 예수 이전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규정할까? 바르트에게는 동일성의 원리가 있기 때문에, 예수 이전과 이후의 사람은 동일한 수준으로 보아야 한다. 즉 계시의 점진성 개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계시의 종결에 대한 개념이 아닌 계시계속주의 개념으로 체계가 구축된다.
Offenbar muß in der Lehre von der Audgießung des Heiligen Geistes auch diese erste Frage beantworter sein(KD., 242)를 “성령의 부어짐의 교의가 또한 이 첫째 질문에도 대답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must obviously)”로 번역했다(CD., 222, GG., 282). 참고로 offenbar는 형용사로 “분명한, 명백한”이지만, Offenbar는 ‘계시행위’의 뜻을 가진 명사로 번역할 수 있다. 계시행위인 성령의 부어짐의 교리에 의해서 계시의 주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귀납적 논리 구조를 구축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바르트는 계시의 주체에 대해서 ‘신’ 그 외의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 신은 “인간에게는 은닉된 신”이다. 신은 드러날 수 없고 오직 계시 사건으로 파악할 수 있다. 즉 Offenbarer(계시자)는 드러나지 않고, Offenbarung(계시)는 드러났고(객관적 현실성), 드러날 수 있고(주관적 현실성), Offenbarsein(계시됨)으로 주체를 파악할 수 있는데, 파악할 수 없는 은닉에 있다. 바르트는 성령의 부어짐을 오순절의 비밀, 그리고 은사(선물, Gabe)로 지시했다. 바르트는 은사의 신적 수여(dad göttliche Geben)와 인간의 수용에 대해서 분석한 것을 다음에 제시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바르트의 특징은 완전한 메커니즘을 만든 것이다. 바르트가 만든 메커니즘이 성경의 계시와 교회의 교리와 동일한가? 증명할 필요가 없이 바르트가 교회의 교리(Dogma)를 재검토해서 재정의를 하고 있다. 즉 바르트가 만든 메커니즘은 오직 바르트의 것이다. 바르트의 놀이터에서 기쁘게 놀 것인지, 정통 교리의 교회에서 설 것인지를 선택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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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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