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객관성 교회에서 도약과 침묵으로 계시가 발생함
바르트에게 객관성은 교회이다(Die Kirche als der Raum, in welchem Gottes Offenbarung subjektiv wirklich ist, hat eben tatsächlich diese streng objektive Seite, GG., 290, KD., 249).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객관적 현실성이라고 분류했지만, 신의 계시가 주관적으로 현실화되는 엄격한 객관적 측면은 교회라고 한다. 바르트는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례전에서 객관성,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제시했다. 전통 교회 이해에서 성례전은 교회의 표지인데, 바르트에게 교회의 성례전은 주관적 현실성이 펼쳐진 한 행위이다.
바르트는 교회에 대한 두 번째 확증을 진행한다(GG., 294). 이 부분에서 바르트는 “사고의 도약(gedanklichen Sprung, leap in thought)”을 제시하면서 진행한다. 도약(Sprung/leap)은 키에르케고르에게서 구체화된 개념이다. 바르트가 헤겔 좌파의 경향을 따르는데, 이 부분에서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겠다. 정태홍은 박사논문 “프란시스 쉐퍼의 합리성 중시경향 연구 : 도약 반대 개념을 중심으로”(계명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2019년)을 제시했다(『프란시스 쉐퍼의 도약반대론』, RPTMINISTRIES, 2019). 키에르케고르는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과 믿음의 역설을 제시했다.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인간 안으로 계시가 어떻게 오는지 그 구도에 대해서 제시한다. 바르트는 표징의 매개를 예수 그리스도로 규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향해서 오는 것으로 제시했다. 바르트는 인간 안으로 들어오는 계시를 제시하기 위해서 ‘도약’을 제시하고 있다. 도약이라는 것은 불합리성을 빠져나가는 독특한 주장이다. 진화론도 점진적 진화론에서 급진적 진화론으로 전환되었다. 바르트는 이러한 도약의 과정에 성령의 사역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은 성령의 인격과 사역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자신의 인격과 사역이다”(GG., 295). 바르트는 성령을 규정할 때 “주관적 현실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정통신학에서 성령의 인격은 삼위 하나님으로서 인격이고, 사역은 창조, 구속에서 적용하고 완성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성령과 “주관적 현실성”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즉 정통신학적 개념과 전혀 다른 개념을 도출시켰다.
바르트는 “사고의 도약”과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을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은 인간의 실존에 놓여 있다고 제언한다(GG., 297). 인간 실존에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을 두는 것은 ‘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에서 죄는 하나님과 교제와 연합을 위해서 첫째로 해결되어야 할 요소이다. 그러나 바르트에게 죄는 단순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주관적 현실성이 개방되어 있는 것으로 제시한다. 존 프레임은 바르트가 죄를 심각하게 다루었다고 하는데(『서양철학과 신학의 역사』, 554쪽), 바르트에게 죄는 Episode이다(교회교의학 IV/1). “사고의 도약”을 강조하는 구도에서 죄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인간 안에 계시 가능성을 “사고의 도약”으로 제시한다(GG., 296).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바르트의 사색의 맹점이다. 사색이 논리적이지 않고 비약을 인정해야만 구성되는 것이다. 교리는 고백적이기 때문에 논리적이지 않다. 그러나 바르트는 교리를 검토하는 과정을 주장하는데, 논리가 아닌 도약 기법으로 다룬다. 즉 그것은 바르트가 자기 논리가 부족할 때는 도약 개념으로 충당하면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인간의 합당한 논리 체계로 완성된 사고 체계를 구축한 위인이 없다. 또한 신학에서도 합리적인 구조로 신학을 구성한 위인도 없다. 그런데도 학생은 끊임없이 사유와 합리를 추구하고 있다. 바르트는 신의 계시가 인간 안에서 현실화되는 것은 결국 ‘도약’ 외에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정통신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 안에서 열매를 맺는 것은 복음을 들을 때에 성령의 조명으로 이루어진다. 즉 바르트에게 설교가 강조되는 것 같지만, ‘도약’이 강조될 뿐이다.
바르트는 “silentium altissimum(가장 깊은 침묵)”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은 ‘참나’를 찾기 위해서 ‘침묵’을 강조했다. 바르트는 가장 깊은 침묵에서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을 연결했다(GG., 297). 바르트는 성육신에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성육신의 비밀 교리 안에서 동정녀 마리아에 대해서 제시했다(GG., 298). 바르트는 인간 예수의 실존에서 계시 행위가 발생한 실존으로 제시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이 발생하는 것으로 제시한다. 바르트는 언약이 아닌 계시를 강조하는 학자가 되었다. 개혁신학은 언약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강변한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인지하고 증거하는 방법은 개신교 교파마다 방법이 같지 않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회원으로서 가능성을 개방하는데, 개혁교회는 교회의 지체로서 주의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으로 훈련 중에 그리스도를 더 알아가며 증언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확증한다.
바르트는 성령이 계시 내용을 형성하는 것으로 구축했다(GG., 299). 이러한 계시가 형성되는 근본은 신의 자유이고, 인간의 결단에 의해서 발생한다. 신이 인간에게 실제적으로 말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바르트는 아버지와 성령으로 진행하게 된다. 바르트는 성령을 아버지의 영, 말씀의 영으로 규정한다(GG., 299). 성경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계시되었는데, 바르트는 아버지의 영으로 규정했다. 즉 그리스도는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의 한 패턴에 불과하게 된다.
바르트는 예수를 화해자로 규정하고, 성령은 구속자로 규정한다(GG., 301). 바르트는 특이하게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으로는 기독교적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GG., 303). 신의 행동 자체로 계시가 인간에게 발생하는 현상으로 완전하게 될 수 있는데, 바르트는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으로만은 기독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의 자유를 강조하는 학자가 불필요하게 어떤 규정을 주는 것이 일관된 자세는 아니다. 바르트에게 아버지, 아버지의 영으로 신의 자녀가 되는 것이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바르트는 기독교를 이루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 위치에 포함시킨다. 이러한 면에서 바르트가 보수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 바르트 이후에서는 신학에서 그리스도가 빠진 신 중심 신학(God centered theology)이 유행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중심, Christ-centered”의 신학이나 설교는 점점 교회에서 소홀해지고 있다. 그러한 결정적 역할이 바르트에게 있다. 시작은 리츨의 하나님 나라 사상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르트는 성부와 성령을 강조하는 신 중심 신학 체계이다. 즉 바르트가 기독론 중심적이라는 분석은 그의 저술에서 상상할 수 없이 많이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는 화해자로 한 길로만 역할을 하고, 결정적인 구속자의 역할은 성령이 수행한다. 예수는 완전한 구원을 실현시킨 객관적 현실성이고, 인간을 그 안의 구원에 참여하도록 성령이 역할을 하는 구도이다. 필자는 이러한 구도를 구원파식 성경 역사 이해로 제시한다. 구원파는 좀 더 구체적으로 골고다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해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신학은 십자가에서 택자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속죄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예수가 완전한 구원이라고 믿음을 촉구하는 바르트 신학(GG., 206), 정통신학은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이름 예수를 선포하며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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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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