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2-11-09 20:2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령,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


바르트는 § 16.1에서 “성령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을 다루었고, § 16.2에서 “성령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을 진행한다. “현실성과 가능성”은 § 15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과 객관적 가능성으로 진행했다. 가능성과 현실성(M&#246;glichkeit und Wirklichkeit, 可能性과 現實性, possibility and reality)은 변증법의 범주에 속한다. 칼 바르트는 헤겔 좌파로 분류된다(참고, 정승훈, 『칼 바르트와 동시대성의 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헤겔 좌파에는 포이어바흐와 칼 마르크스가 대표적 위인이다. 가능성과 현실성은 “새로운 것이 잠재적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가능성이며, 현실성이란 가능성이 현실 속에서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인터넷 <노동자의 책>) 변증법적 구조에는 객관적과 주관적 그리고 가능성과 현실성으로 구조되어, 상호침투와 연관을 통해서 발전한다는 변증법적 사고 진행이다. 황돈형은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니는 가장 구체적인 역사성을 지시하기 위해서 ‘현실성(Wirklichkeit)’과, ‘가능성(M&#246;glichkeit)’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제시했다.(황돈형, “신학의 실천적 진리개념의 가능성을 위한 바르트 계시이해 : 계시의 “현실성과 가능성” 개념을 중심으로”, 『한국조직신학논총』 36권(2013년), 117). 계시를 역사적 사건으로 본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사건이 계시가 된다.

바르트는 § 16.2에서 “성령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을 시작하면서, § 16.1의 “성령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에 대해서 한 문단으로 정리했다. “Die subjektive Wirklichkeit der Offenbarung besteht darin, daß wir durch Christus, daß wir in der Kirche, daß wir Empf&#228;nger der g&#246;ttlichen Zeugnisse und als deren wirkliche Empf&#228;nger Kinder Gottes sind. Dieses unser Sein als solches ist aber das Werk des Heiligen Geistes. Und also ist der Heilige Geist die subjektive Wirklichkeit der Offenbarung.(KD., 264).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증거의 수용자이며 그리고 그것의 참된 수용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 우리의 이러한 존재 그 자체는 성령의 사역이다. 그래서 성령은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이다”(GG., 306).

바르트는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을 정리한 뒤에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subjektiver M&#246;glichkeit der Offenbarung)을 진행한다. 바르트는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규정하며 논증했다(§ 15).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의 원형으로 제시했다. 우리는 이러한 바르트의 규정을 바르트의 독단으로 정의했다. 그것은 누구도 그러한 규정을 하지 않는데, 바르트가 스스로 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통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으로 아버지와 동일실체(homoousion)이시며, 한 위격에 두 본성을 가진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시다. 그런데 바르트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을 계시의 객관성으로 재구성시켰다.

바르트에게 있는 계시의 현실성(die Wirklichkeit der Offenbarung)은 바르트의 계시의 주된 개념이다. 계시의 현실성은 스스로 제기하는 질문에 의존한다(GG., 306).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스스로 말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질문, 이해, 계시가 혼합하여 문장을 진행한다. “이해를 위한 질문”이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과 연결된다.

Wie ist es in der Freiheit des Menschen m&#246;glich, daß dem Menschen Gottes Offenbarung widerfahren kann?(인간에게 신의 계시가 발생된다는 것이 인간의 자유 안에서 가능한가?, GG., 307). 바르트는 신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가 병립된다. 바르트는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한다. Der Mensch ist frei f&#252;r Gott durch den Heiligen Geist des Vaters und des Sohnes(인간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자유롭게 된다. GG., 307). 바르트는 아버지 그리고 아들의 성령으로 인간이 자유롭다고 규정한다. 그것은 예수의 객관적 계시가 현실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해는 구원파적 시간 이해이다. 구원파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해결했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바르트는 예수에게서 계시의 현실성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추구한다. 죄의 문제가 어디에서 해결되었을까? 계시의 현실성이 어디에서 실현되었을까? 바르트는 성육신에서 계시의 현실성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성육신과 같은 현실성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자유가 가능하다고 제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수행한다는 것이 바르트의 제시이다. 이것이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의 근거이다(Darin besteht die subjektive Wirklichkeit der Offenbarung).

황돈형은 성령의 주관적 현실성과 가능성을 규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가 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삶이 그리스도의 삶과 신앙의 유비 관계를 이룬다는 것은 ① 인간이 회피할 수 없는 그리스도와의 절대적 차이를 발견한다는 것이고 ② 인간 자신보다 우월하고 월등한 법정(Instanz)에 대한 순종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③ 또한 그 앞에서 새로운 관계성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④ 인간의 자기 책임이 아닌 은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봉사의 성격을 통해서 삶의 실천을 이루는 것이고 ⑤ 삶의 방향에 있어서도 특정한 교육적 인도의 과정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⑥ 그리하여 결론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것(Christi Sache)을 자신의 것(zur eigenen Sache)으로서 이루며 산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통해서 개개인이 자신의 삶의 원인을 발견하고 이를 이루는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으로 제시했다(황돈형, 134). 간략하게 표현하면 예수의 것(예수의 생명)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구도이다. “예수의 것(의)을 우리의 것(의)으로 삼는다”는 표현이 바르트적 표현인데, 이러한 표현은 청교도 시대에도 나타난다.

바르트는 계시의 현실성이 예수의 것을 인간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으로 제시하고 있다. 객관적 현실성과 주관적 현실성으로 구도화시켰다. 그리고 성령에서는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을 제시하며, 성령으로 자유롭게 인간에게 계시의 현실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시의 현실성을 위해서 질문과 이해가 필요한 구도이다.

정통신학에서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며, 기록된 계시인 성경은 정확무오한 영감된 말씀이다. 그리고 그 기록된 말씀에 근거해서 복음을 선포함에 믿음이 성령과 함께 역사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복음선포와 제한 없이, 성경에 제한 없이, 자유로운 인간이 질문함으로 계시의 현실성이 발생할 수 있다. 이때 신의 계시가 제약 없이 발생된다. 복음은 주의 피로 사신 교회의 예배 시간에서 합당한 설교자로부터 선포된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은 선포된 복음을 듣고 지켜야 한다. 스스로 질문해서 신의 계시가 현실화되는 구도는 바르트가 구성한 도식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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