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성령의 부어짐(4)
바르트는 칸트가 설정한 불가지론적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 thing-in-itself, Noumenon)에 관하여 성령의 부어짐(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으로 돌파한 것으로 보인다. 바르트는 철학자가 아닌 신학자가 된 조건이기도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바르트를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신(神)을 ‘존재’로 보지 않고 ‘행동’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칸트가 규정한 이성의 한계를 성령의 부어짐으로 도약하는 것으로 보인다.
좀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1912-1984) 박사가 헤겔의 사유 체계를 절망선(the line of despair)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1940년대에 시작된 “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에 대해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Dialektik der Aufklärung, 1944년). 이렇게 말한 것은 바르트는 당대의 학문을 빠르게 수용하면서 신학을 전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신학에 나타나지 않지만, 양자역학, 현대수학의 수(數) 개념을 채용해서 사유 체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쉐퍼 박사가 ‘도약(leap of faith)’에 대해서 반대를 밝혔다(참고 정태홍, 『프란시스 쉐퍼의 도약반대론』(PRT, 2019)). 현대 정신에 나타난 양자론적인 복잡한 구도에 대해서 밝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르트는 매우 복잡한 구도를 갖고 있는데, 현대신학에서 나타난 자유주의를 극복하면서도 정통신학으로 회귀하지 않는 구도이다. 바르트는 자유주의는 아니지만 자유주의의 슐라이어마허의 체계에 머물고 있다. 또한 1960년대에 후기-자유주의 등 다양한 구도가 발생했다. 그러나 모두가 정통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정통주의 계열에서 정통주의를 정확하게 변호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르트의 신학은 신정통주의(Neo-orthodoxy)라고 한다. 우리는 신정통주의는 정통주의의 새로운 대안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새로운 대안으로 평가하며, 정통주의를 거부하는 체계로 세우고 있다.
이 부분(§ 16)에서 바르트는 “성령의 부어짐”이라는 매우 독특한 사유 체계를 제시한다. “성령의 부어짐”에서 큰 문제는 “성령의 부어짐의 주체”에 대해서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 것이다.
1. Durch die Ausgießung des Heiligen Geistes wird es darum in der Freiheit des Menschen möglich, daß ihm Gottes Offenbarung widerfahren kann, weil ihm in ihr das Wort Gottes zu Gehör gebracht wird(KD., 269). 성령의 부어짐을 통하여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은 다음의 이유로써 인간의 자유 안에서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부어짐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려지기 때문이다(GG., 311). By the outpuring of the Holy Spirit it is possible for God's revelation to reach man in his freedom, because in it the Word of God ts brought to the hearing(CD., 246).
바르트는 “성령의 부어짐”의 현상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 부어짐이 “인간의 자유 안에서”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문제이다.바르트는 성령의 부어짐을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으로 규정하고, 객관적 현실성 가운데서 유추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계시자를 아버지로 명시한다. 그리고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고, 또 아버지와 아들의 영으로, 아들 안에서 계시한다(Der Heilige Geist ist der Geist Jesu Christi, so gewiß er der Geist des Vaters und des Sohnes ist, des Vaters, der sich in seinem Sohn und nur in seinem Sohn offenbart). 특이한 것은 바르트가 아들 안에서(in His Son)를 반복해서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서적 증거라고 바르트가 규정하지만(GG., 311), 전혀 그렇지 않다. 성경적이라는 주장은 자기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도용(盜用)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리고 바르트는 교회 이해도 파격적 전환을 시도한다.
“우리는 교회를 성육신의 유일회성에 상응하여 주관적으로 현실적으로 되는 유일한 장소로 지시해야만 한다”(GG., 311)고 제시했다. 바르트는 교회를 계시가 주관적으로 현실화되는 장소로 전환시키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1960년대 로마 카톨릭이 수용하면서 우주적 교회론(Cosmological Ecclesiology)으로 개념이 전환되었다. 참고로 조영엽 박사는 “Universal Church”를 “우주적 교회”로 번역하는데, “보편적 교회”로 번역해야 하며, the Holy Catholic Church에 대한 다른 용어이다. 그러나 Cosmological Ecclesiology는 창조 세계 전반으로 교회 영역을 확장시킨 것이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명제를 바꾸지 않고, 종교다원주의를 실현시킬 수 있었다. 유일회성의 성육신이 반복되는 장소, 계시가 주관적으로 되는 장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곧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때 계시의 수용자로서 인간(Menschen als Emp-fänger der Offenbarung)에게 집중되는 것이 바르트의 특징이다. 바르트는 계시, 성령이 부어져도,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der Freiheit des Menschen)이다. 이러한 구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에게 이르는 계시의 현실성”이다(Dies ist die Wirklichkeit der Offenbarung, wie sie von Gott her zum Menschen hingeht). 계시가 비록 신(神), 아버지에게서 출발되었지만, 수용자인 인간에게서 최종 현실화가 되지 않으면 계시가 되지 않게 된다. 이 계시를 현실화시키는 것이 곧 성령의 부어짐의 사건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계시의 현실성이 인간 나사렛 예수 안에서(dem Menschen Jesus von Nazareth) 객관적으로 현실화되었다는 것이 전제이다. 우리는 바르트의 전제는 독단(獨斷)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바르트 번역에서 ‘삼위일체’는 모두 점검하려고 한다. 신준호는 GG, I/2, 312에서 ‘삼위일체’라고 번역한 어휘가 있는데, des dreieinigen Gottes, triune God를 번역한 것이다. des dreieinigen Gottes는 ‘삼위일체’로 번역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 우리는 ‘삼중일신’으로 번역한다. 바르트는 여러 어휘로 삼중일신을 사용하고 있다(참고 박순경은 ‘삼위일체성’으로 영어에서 triune God으로 번역함). 그런데 바르트는 trinitatis, Trinitätslehre(삼위일체론)에 대해서 Gottes Dreieinigkeit(triune God)으로 전환시켰다. 전자는 ‘삼위일체’로 번역하지만, 후자는 다른 어휘로 번역해야 바르트가 전환시킨 개념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신학 번역에서는 그 전환된 어휘도 ‘삼위일체’로 번역하기 때문에 바르트의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분별할 수 없다.
바르트는 계시의 객관성으로 아들을 제시한다. 아들이 먼저 계시를 수용하며, 신적인 작용과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를 하는 구도를 세웠다. 예수는 삶을 통해서(AD 1-30) 신과 화해는 능력이 행사했다는 것이 바르트의 제시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 현실성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서 부어지고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이 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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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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