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4-03-19 17:3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불신앙으로서 종교 (3) 계시 안에서 믿음으로 인식하는 신


우리는 신학자들, 특히 현대 신학자들을 탐구하려면 반드시 신학 어휘 개념을 명확하게 설정해야 한다. 신학교에서 마지막 과정에 현대신학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것은 신학 개념을 확립해야만 현대신학을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신학자들은 논리를 제시할 때에 자기 개념을 밝히면서 전개하기 때문에 표현된 어휘 개념을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바르트가 개념을 제시할 때에는 반드시 그 개념을 확인하고 진행하려고 한다.
바르트는 ‘계시(Offenbarung, revelation)’에 대한 자기 개념을 여기에서 밝혔다. Die&#160;Offenbarung&#160;ist&#160;Gottes&#160;Selbstdarbietung und&#160;Selbstdarstellung(계시는 신의 자기 수여(제공)이며 자기 현시이다. KD., 328: Revelation is God's self-offering and self-manifestation. CD., 302). 즉 바르트는 계시를 신이 자기를 사람에게 제공하고 보여주는 것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때 바르트는 계시의 방법과 분량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서철원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자기 작정을 알리심”(서철원, <신학서론>, 148)으로 제시했다. 바르트는 신의 행동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고, 서철원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김성삼은 바르트의 신관을 “행동하는 하나님”이라고 분류했다(김성삼, “행동하시는 하나님, 존재하시는 하나님: 바르트와 칼빈의 하나님론”, 총신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2005). 김성삼은 바르트에게는 신 존재에 대한 배려가 없고 단지 행동하는 신이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바르트의 구조는 칼빈의 하나님 이해와 대조된다. 첫째, 바르트의 계시 이해는 신의 행동과 관련되어 있다. 둘째, 바르트의 계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분류가 없다. 에밀 브루너와 자연신학 논쟁에서 바르트가 특별계시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개혁신학이 구축한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이해가 아니다. 셋째, 바르트의 계시는 계시 충족성, 성경 충족성을 부정하고, 신의 무한한 자유를 지향한다.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계시’에 대한 강조가 매우 선명하다. 바르트는 계시 안에서 신이 인간에게 말하는데(In&#160;der&#160;Offenbarung&#160;sagt&#160;Gott&#160;dem&#160;Menschen), 신은 인간에게 자신이 신이고 주라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르트에게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가 같은 것으로 여기는데, 그렇지 않다. 바르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실제가 성취된 원형일 뿐이다. 그 원형처럼 모두에게 신의 계시가 활동하고 있고, 그 계시 안에서 신이 지금도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그 신의 활동, 신이 말하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신이 신이고, 인간의 주”라는 것이 새로운 것(schlechterdings Neues, new, something)이라고 했다. 이것은 이미 성경계시에서 명확하게 알려진 계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레위기 26:1-13)이라는 것에 대한 변형에 불과하다. 신의 초월성, 절대타자를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임재하며 내주하는 방식에 대해서 거부하는 의식이다.
바르트는 자기 계시 개념에 근거해서 신 인식의 가능성을 개방시켰다(GG., 375). 우리 일상에 자주 통용되는 문구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르트적 사유 체계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인간은 신이 다가오는 진리(Zu-uns-Kommen der Wahrheit, the coming of truth)를 제약할 수 없다. 바르트는 인간이 계시 안에서 신의 무한한 자유와 사랑에 근거해서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가 된다고 제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사한 표현은 김세윤이 <구원이란 무엇인가?>에서 했다. 김세윤은 죄를 무한한 자원이 아닌 유한한 자원을 의지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인간의 피조물적 한계성을 극복하고 무한하고 영원한 하나님 세계에 참여하는 것, 신성을 입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 예수께서는 그러한 온전한 구원을 가져오는 메시아이다”(김세윤, <요한복음강해>, 54).
바르트는 계시에 상응하는 행동을 ‘믿음’으로 규정했다. Das der Offenbarung entsprechende Tun m&#252;ßte ja der Glaube sein: die An erkennung der Selbstdarbietung und Selbstdarstellung Gottes(KD., 329). 바르트에게 ‘믿음’은 신의 자기 수여와 자기 현시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인간의 성품으로 믿음이다.
바르트가 인간의 능력으로 진리를 파악할 수 없고, 계시 안에서만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GG., 376)이 매우 좋은 의미처럼 보인다. 인간이 잡으려고 하지 않고, 붙들리도록 준비하라는 표현도 좋은 말처럼 보인다. 그렇게 하도록 결단을 촉구한다(GG., 376).
바르트는 “믿음에서 믿음으로(aus dem Glauben zum Glauben)”를 “불신앙(Unglauben)”으로 규정했다. *“welche kommt aus Glauben in Glauben; wie denn geschrieben steht: Der Gerechte wird seines Glaubens leben”(독일어 롬 1:17). “믿음에서 믿음으로”는 사도 바울이 말씀한 계시이다. 여기에서 바르트의 계시 이해를 엿볼 수 있다. 바울이 말한 옛계시와 자기가 말한 새계시로 전이를 유도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조용히 바울이 전한 계시를 잠재하고 자기 계시 이해를 구축시켰다. 참고로 새계시를 선언한 위인은 스웨덴보그(Emanuel Swedenborg, 1688-1772)이다. 스웨덴보그를 추종하는 ‘새교회(the New Church)’는 스웨덴보그의 35권 해석서를 ‘계시’로 보고, 성경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어 매일의 삶에 실제적이고 확고한 지침서가 된다고 믿고 있다.
바르트는 옛적 사고는 - 사도 바울의 제언도 포함된 - 계시를 대적하고 저항하는 ‘종교’라고 규정했다. 바르트는 이러한 종교를 불신앙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자기가 규정한 계시와 믿음에 근거한 것이 참 종교라고 규정하고 있다. 바르트는 신적 현실성의 자리에서 제공하는 것과 현시된 것에 근거해서 인간이 계속해서 고안한 신의 형상을 세운다고 제시했다(an die Stelle der g&#246;ttlichen Wirklichkeit, die sich uns in der Offenbarung darbietet und darstellt, ein Bild von Gott, das der Mensch sich eigensinnig und eigenm&#228;chtig selbst entworfen hat. KD., 329, GG., 376, CD., 302). 그리고 칼빈의 <기독교강요> 1, 11, 8을 인용해서 근거로 삼았다(GG., 376). 그런데 칼빈이 인간이 우상을 생산하는 공장(idolorum fabricam)이라고 표현한 것은 맞는데, 바르트처럼 신의 실제(Stelle&#160;der g&#246;ttlichen Wirklichkeit)가 무한하게 공급되는 상황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왜곡된 지식과 공포에 의해 우상이 생산되는 구조이다.
우리는 이 부분(GG., 365-376)에서 바르트가 ‘계시’와 ‘믿음’ 개념을 구축한 것을 보았다. 바르트는 계시를 신의 행동으로 규정했고, 신의 행동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을 믿음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우리는 계시를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하고, 창조와 구원을 아는 하나님 지식”으로 제언한다. 그리고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엡 2:8)로 먼저 규정한다. 그리고 바르트는 옛적의 계시 이해와 믿음 이해 방식을 불신앙으로 규정하며 우상적인 행태로 분류하고, 자기 계시와 믿음 이해를 참 종교로 구축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의 말씀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을 인식한다. 아마도 바르트가 불신앙으로 규정한 지식은 우리의 지식이 분명하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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