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7-08-15 18:1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칼 바르트의 예수 그리스도 이해

칼 바르트 비평적 읽기(4)


박사 연구 논문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 이해”라고 한 것은 좀 당혹스러운 주제라고 생각했다. 통상 ‘기독론’ 등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예수 이해는 자유주의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된 논의 주제이다. 이것을 잘 정리한 것은 존 스토트의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IVP, 2002년)이다. 스토트의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란 것은 스토트가 예수에 대한 자기 이해에 대해서는 고백하지 않고, 학계에서 논의된 예수 이해만 나열한 것이다. 이 책으로 스토트가 소개하는 예수는 “너무나 많은 논의가 되었지만 아직도 결론 나지 않는 놀랍고 유일한 인물 예수, The Incomparable Christ”라고 이해했다. ‘예수 이해’는 기독론처럼 체계적인 것이 아니고, ‘예수 자체’를 어떻게 이해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예수(耶蘇, Jesus), 예수께서는 (인자에 대해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서 제자들의 의견을 물으셨다(마 16:13-15). 베드로의 답변은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이다. 예수께서는 이 지식의 출처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 16:17)라고 말씀하셨다. 참고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에 대한 출처는 여호와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주신 계시이다. 지식의 출처가 분명히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이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주와 구주(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지했다(행 2:36, 벧후 1:11).

기독교 안에 있는 모든 사람, 목사, 학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고백한다는 것이 논문의 전제이다. 칼 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했을까?”를 바르트의 저술 <교회교의학>에서 찾아보는 것을 시도한 것이다. 칼 바르트의 기독론은 ‘화해론’이라고 하며, <교회교의학> IV권에 위치한다. 그러나 ‘화해론적 기독론’은 바르트가 창안한 개념이기 때문에 비교할 수 있는 연구자가 없다. 바르트는 예수를 화해자로 성령을 구속자로 본다. 성령을 구속자로 보는 바르트의 견해에 대해서 비평한 논문을 본 적이 없다. 정통신학에서 구속주는 예수 그리스도인데, 바르트는 성령으로 옮겼다. 그 영향으로 지금은 성령이 죄를 사하는 권세자로 이해하고 주장하는 경향이 상당히 많다. 성령이 죄를 인식하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죄가 용서되겠느냐?는 것과 성령이 실제적으로 죄를 사한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작은 칼 바르트가 했다.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은 전체 5권으로 계획했지만, 4권으로 끝난 미완성 작품이다. 1권, 2권은 서론, 신론이다. 3권은 칼 바르트의 독특한 신학 전개로 ‘창조론’이다. 칼 바르트는 ‘창조’에 대해서 가장 세밀하게 제시한 학자이다. 왜 바르트가 ‘창조’에 대해서 세밀하게 진행했을까? 바르트에게는 신신학, 신정통주의(Neo-Orthodoxy)가 있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는 창조주(3권), 화해주(4권), 구속주(5권)으로 신 이해를 구성했다. 예수 이해를 구속주에서 화해주로 변혁시킨 것이다.

필자의 논문은 <교회교의학> 1권과 2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해 중 ‘신성 이해’에 대한 부분을 탐구했다.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에서 칼 바르트의 예수 이해는 ‘인간 예수’라고 서철원 교수님께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본문에서 밝히고, 칼빈의 <기독교강요> 1권(삼위일체), 2권(그리스도 양성 교리, 칼케돈 신경), 3권(예정론)에서 비교하면서 논증하려고 했다.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1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381년) 본문을 재해석하는 부분이 있다.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를 흔적(Vestigium Trinitatis)으로 보았다. 바르트에게 삼위일체는 바른 교리에 대한 예비적 이해로 가치가 있다. 바른 가치가 나오면 예비적 가치는 폐기되어야 하는데, 칼 바르트는 매우 단호하고 무섭게 예비적 가치로 대한다. 그래서 필자는 칼 바르트가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as, Trinity)’를 싫어하고, 자기 신 이해, ‘삼일성(Dreieinigkeit, Triunity, Triune God)’를 확립했다고 이해했다. 영어 연구자들 중에서 Trinity와 Triune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더 어렵다. 두 단어를 모두 ‘삼위일체’ 번역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간혹 ‘삼위일체’와 ‘삼위일체성’으로 구별해서 번역한 경우가 있다. 두 단어를 명백하게 다르기 때문에, 다른 단어로 번역해야 독자가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원저자가 두 단어를 매우 명백하게 구별했는데, 번역에서 두 단어를 한 단어로 번역하면 독자는 절대로 원작자의 뜻을 분별할 수 없을 것이다.

삼위일체는 예수 그리스도 신성 이해의 시작이다. 간혹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해했다거나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삼위일체는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하기 위해서 만든 교리도 아니고, 이해해서 만든 교리도 아니다. 필자는 고대 교리 문서에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없다고 종종 말한다. 교리 문서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본체(homoousion)’라고 하는 것이다. 필자가 ‘동일본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지도교수께서 동일본체, 동일실체로 사용하라고 지도하셨다. 본질(本質, 성질)과 본체(本體), 실체(實體, 대상) 어휘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신성 이해의 극치가 ‘동일본체’이다(사 9:6).

그런데 칼 바르트는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미신적이고 우상적인 이해라고 정의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신론(二神論, duotheism)이라고 했다(서철원, 『기독론』, 21에서, KD, IV/1, 69에 근거해서 제시했다). 칼 바르트는 예수 신성 이해를 부정하기 때문에, 전통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한다. 그리고 자기가 이해한 신 이해(Dreieinigkeit)를 제안했다. 필자는 공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의 가르침(The Heavenly Doctrine)을 따라야 교회의 머리가 계신 곳으로 가고, 개인의 의견(A theology)을 따르면 그 개인이 가는 곳으로 간다고 주장한다(마 15:14, 눅 6:39).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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