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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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6-02-11 08:5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우주의 맥박 속에 새겨진 창조주의 지문


밤하늘을 바라보면 우주는 크고, 우리는 작다. 그러나 이 거대한 우주가 정밀한 값들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전자기력, 빛의 속도, 별의 생성 방식, 원자가 안정된 이유 등 모든 것이 극도로 미세하게 조정되어 있다. 과학은 이를 “미세하게 조율된 우주”라고 부르고, 성경에서도 이를 고백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시편 8:3).


미세조정 논증과 전자기력

우주가 생명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물리 상수와 초기 조건들이 극도로 정확하게 조정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미세조정 논증(Fine-Tuning Argument)이 존재한다. 이 중 미세구조 상수(fine-structure constant) α는 전자기적 상호작용의 세기를 나타내는 무차원 상수로, 그 값은 전 세계 어디서나 동일하다. α는 전자의 전하, 진공의 유전율, 플랑크 상수, 빛의 속도를 연결하며, 이는 전자기학과 양자역학, 상대성이론을 통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α의 역수인 137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마법 같은 숫자이며 신이 쓴 서명”이라고 설명했다.
전류의 흐름과 화학 결합, 빛과 물질의 상호작용 등을 결정하는 전자기력은 α의 값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만약 이 값이 조금만 달라진다면 원자 구조가 붕괴되고, 물질의 생명화학이 변화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자가 빛보다 137배 느리게 회전하게 하여 원자의 구조를 만드셨고, 수소 원자의 에너지를 137의 제곱 비율로 조정하여 생명 에너지가 흐르게 하셨다.
물리학자 폴 디랙은 α를 “우주라는 직물을 짜는 가장 근본적인 실”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α의 값은 계산된 것이 아니라 실험적으로 측정된 값이며, 이 값이 왜 특정해야 하는지는 현재 물리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과학과 신학의 관계

양자물리학자이자 성공회 사제인 존 폴킹혼은 과학과 신학을 경쟁 관계로 보지 않고, 서로 다른 설명의 층위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어떻게(how) 법칙이 존재하는지를 설명하지만, 왜(why) 이러한 법칙이 존재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137이라는 숫자를 우연으로 보기는 어렵고, 필연적으로 여겨지기에는 이론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미세조정은 논리적 증명이 아닌 합리적 해석의 문제로, 우주가 이해 가능하고 질서 있는 이유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력을 제공한다.
반면, 신학자 알빈 플랜팅가는 믿음의 인식론을 다룬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증명 없이도 이성적으로 정당한 기본 믿음(properly basic belief)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즉, 모든 믿음이 과학적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과학은 전제된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주가 맹목적 우연의 산물이라면, 인간 이성이 진리를 인식할 신뢰성은 어떻게 확보되는지를 질문하게 된다. 폴킹혼은 137에서 설명의 한계를 발견하였고, 플랜팅가는 그 한계 너머에서 믿음의 합리성을 보았다.


시편 137편과의 연결

특히 흥미로운 것은 성경의 137번째 시편인 “시편 137편”이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픈 노래 중 하나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이는 바빌론 강변에 앉아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통곡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슬픔을 담고 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편 137:1). 물리학의 137이 우주의 완벽한 질서를 말한다면, 시편 137편은 인간의 완전한 깨어짐을 나타내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이에는 깊은 영적 연결고리가 있다. 우주의 상수 137이 빛과 물질을 연결하듯, 시편 137편의 통곡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믿음의 상수를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이 무너진 절망의 강가에서도 예루살렘(하나님의 통치)을 기억했다. 우주가 137이라는 법칙에 의해 유지되듯, 성도의 삶도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거룩한 기억에 의해 유지된다.
결국, 질서 있는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의 무너진 삶을 정밀함으로 회복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바빌론의 강변에서 흘린 눈물은 결코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았으며, 그 눈물은 137의 법칙을 설계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앞으로 도래할 새 예루살렘의 초석이 될 것이다.
137은 전자기 상호작용이 질서 있게 작동하도록 허용된 값이다. 이 값은 첫째, 우주가 자의적이지 않음을 나타낸다. 자연법칙은 임의의 값을 가지지 않으며, 허용되는 범위가 극도로 좁다. 성경적으로 표현하자면, “주께서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잠 3:19)와 같다. 둘째, 질서는 설명이 이루어지기 이전부터 존재한다. 과학은 “우리는 왜 137인지 모른다”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한다”(롬 11:33)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종종 아는 만큼 말하고 설명할 수 있는 만큼 믿으려 한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질서 앞에서 인간의 필요는 확신이 아닌 겸손이다. “과학은 ‘어떻게’를 말하고, 신앙은 ‘왜 이 질서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는 폴킹혼의 말을 기억하자. 겸손은 모른다는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자각이다. 모든 값을 이해하지 못해도 모든 것을 붙드시는 분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137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드러내고, 하나님은 그 한계 앞에서 인간을 경외의 자리로 부르시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로마서 11:36).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여인갑 장로 (지구촌교회 / (주) 시스코프 대표이사·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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