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를 부정함
우리는 앞에서 바르트 신학에 객관성이 없음을 제시했다. ‘객관’은 학문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이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은 방대한 저술이지만, 객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바르트의 자기 전제 위에 세워진 바르트의 주관이다. 물론 공교회의 결정도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공교회의 결정은 공교회의 유일한 법적 근거이다. 신학은 객관에 의해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결의(법적)에 근거해서 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교회의 결의를 거부하고 자기 근거를 확립해서 학문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한 프레임을 최초로 만든 장본(張本)이 바르트이다. 자유주의는 순수학문을 추구했지만, 바르트는 자기 전제를 프레임으로 구축시켰다. 바르트가 확립한 개념을 필자는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에 근거한 포괄주의(包括主義, Inclusive Theology)라고 이해하고 있다. 포괄주의와 다원주의(pluralism)는 구분하기 매우 어렵다. 포괄주의는 기독교 진영에서 논의하는 것이고, 다원주의는 제종교까지 논의하는 수준이다. 포괄주의와 다원주의는 일신교를 기반으로 한다. 포괄주의는 기독교 진영에 있는 모든 규정을 해체하고, 이단을 포함한 모든 종파를 통섭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Christocentrism)에서 신(神) 중심(Theocentrism)으로 전환한 것이다. 바르트 신학의 특징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기 때문에 기독론 중심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인간 예수”로 진행하는 신학을 기독론적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한 평가이다. 바르트 신학이 가장 거대한 진영을 이루었지만(meta-discourse), 객관이 아닌 정통신학이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 이해를 부정하는 형태이다. 인간은 거대담론(巨大談論)이 필요하지만, 진리에는 진리가 필요하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신성 교리가 있어야 한다. 바르트의 신학이 진보에서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신성 교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트가 인정하는 그리스도 신성 교리가 기독교가 인정하는 신성 교리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정통신학에서 인정하는 그리스도 신성 교리는 325년 니케야 공회의,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 431년 에베소 공회의, 451년 칼케돈 공회의에서 결정하고 고백한 것이다(삼위일체와 그리스도 양성 교리). 바르트는 이 공회의의 결정을 해체하고 자기가 규정한 그리스도 신성 교리를 확립했다. 바르트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조 2조항(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주해를 하면서 해체시켰다(GG., 542-574).
바르트는 카롤리(Caroli)가 1537년 칼빈을 반삼위일체론자, 아리우스주의자로 공격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제시했다(GG., 535). 어쩌면 칼빈이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회의가 있었다거나, 칼빈도 부정되었으니 부정하지 말자는 의도였을지 모른다. Caroli가 칼빈이 삼위일체론자가 아니라고 규정한 근거를 제시했어야 했다. 그래야 Caroli의 판단의 정당성을 판정할 수 있다. Caroli가 칼빈을 반삼위일체론자로 규정했기 때문에, 칼빈에게 어떤 혐의나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사도권을 의심하는 자가 얼마나 많았는가? Caroli의 부당한 주장에서 자기의 정당한 주장을 도출한다는 것은 불완전한 자기 구조를 증명하는 단초이다. 바르트는 칼빈이 교리의 권위와 진리성에 대해서 의심했다고 칼빈의 문헌을 제시했다. 그런데 그 의심한 내용을 밝히는 것이 정당하다. Caroli가 칼빈을 아리우스주의자로 단죄한 것은 “아타나시우스 신경(Quicumque)”에 대한 서명 문제였다. 칼빈은 “사도신경”을 주해함으로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판했다(1536년). 그러나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저자를 알 수 없는 익명의 문서이다. 교회가 익명의 문서를 교회 정통문서로 인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카롤리는 이것을 근거로 칼빈을 비판한 것이다. 칼빈은 Caroli가 비판한 내용을 분명하게 밝혔다.
바르트는 Caroli가 비판한 대로, 칼빈이 “그리스도에게 야웨라는 구약의 이름을 부여”했다는 비판을 인정하고 있다(GG., 536). 그리고 세르베투스의 주장에 대해서 elogium divinitatis(신격의 표어)를 인정하여, 세르베투스의 주장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세르베투스의 주장은 소시니우스주의(Socinianism), 유니테리언(Unitarian)의 효시이다. 세르베투스는 기독교 재구성을 목표로 <기독교회복>(Christianismi Restitutio, 1553년)을 익명으로 저술했고, 그의 주장은 유니테리언으로 확장되어 맹렬한 기세로 확장되고 있다.
결국 바르트는 정통신학에서 고백하는 그리스도 신성 교리를 포기하고, 그리스도 인간성(natura humana Christi)에서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를 이해하는 방식을 밝힌다(GG., 537). 바르트는 아래서 위로 이르는 방식을 밝혔다(GG., 537, CD., 419, KD., 440). 혹자들은 바르트의 기독론이 위에서 아래로 기독론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Abstiegschristologie). 바르트의 기독론은 아래서 위로의 기독론이다(Aufstiegschristologie). 뒷부분에서 바르트는 위에서 아래의 신학의 부당성을 밝힌다(GG., 564). 뒤에서 더 다루겠지만, 바르트는 다신론적 이해(polytheistically)라고 규정했다.
참고로 영역(英譯)에서는 divinitatis와 deity를 번역하고 있다(CD., 418-419). 바르트는 Gottheit Christi(KD,, 440), 일반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서, divinitas와 deitas의 명료한 차이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영역(英譯)자는 단순하게 deity로 구분시켰다. 우리는 divinitas(신격)와 deitas(신성)로 구분해서 삼위일체를 이해하고 있다. 이 구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삼위일체의 일신(一神)과 삼위(三位)를 해명할 수 없다. 필자가 해명했다는 것이 아니다. 두 어휘를 혼동하면 삼위일체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정통신학의 그리스도 신성 교리를 ‘사변(speculation)’이라고 규정했고, 책임을 교리의 창시자에게 돌렸다(GG., 538, KD., 441). 칼빈도 헛된 사변(idle speculation)을 거부하고, 바르트도 비신학적 사변(untheologiche Spekulation)을 거부한다. 칼빈이 거부하는 헛된 사변은 정통 교리를 거부하는 신학이고, 바르트가 거부하는 헛된 사변은 정통 교리이다.
“Der Einwand, daß es sich in dem Dogma von der Gottheit Christi un eine untheologiche Spekulation handle, ist aber auch sachlich unverständig und dürfte schießlich auf seine Urheber zurückfallen.”
위의 글은 바르트가 제시한 황당한 발언이다. 누가 바르트의 의견에 항변(Einwand)하겠는가? 그런데 글을 작성하면서 스스로 항변에 대한 반응을 예견하고 기록하고 있다. 더욱더 당황스러운 것은 그 책임을 “그리스도 신성 교리의 저자(seine Urheber)”에게 돌리는 것이다. 바르트가 비록 교리의 저자를 밝히지 않지만, 교리의 저자는 명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공교회는 교리의 저자를 믿고 고백한 것이다. 최소한 바르트가 공교회 신학을 거부한 것은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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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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