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폐쇄적 종교에서 계시의 발생으로 전환
Ereignis, ‘사건’(신준호는 ‘발생’으로 번역, event)은 번역이 쉽지 않다. 철학계에서는 ‘생기’ 혹은 ‘발현’으로 번역하고 있다.
Ereignis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형성시킨 개념이다. 하이데거는 현대철학의 대표학자로 현대 신학자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Das Ereignis der Offenbarung Gottes soll hier so verstanden und dargestellt werden, wie es der Kirche Jesu Christi durch die heilige Schrift bezeugt ist. The event oif God’s revelation has to be understand and expounded as it is attested to the Church of Jesus Christ by Holy Scripture(KD., 305, CD., 280, GG., 350). 바르트의 사상 전개는 바르트의 독특한 전제 위에 세워진다. 반틸 박사(Cornelius Van Til, 1895-1987)는 바르트의 사유 전개를 바르트의 자기 전제 위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평가했고, 바르트의 전제와 자기의 전제가 다름을 공표했다. 이것이 반틸의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이다. 반틸의 전제는 “하나님의 존재”였다. “바르트는 계시가 발생한다”는 전제가 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바르트의 계시 이해를 “계시발생주의”라고 정리하고 있다. 우리의 전제는 “계시중지주의(Cessation of Revelation, WCF 1:1)”이다. 바르트는 자기 전제가 성서를 통해서 증거된 대로 이해되고 서술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런데 바르트가 제시한 성서의 증거는 자의적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바르트의 성서 해석이 자의적인 것은 이전에 형성되었던 이해를 변형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이전 이해를 답습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이전 이해를 변혁할 때에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이성호는 “사건(event)으로서의 교회: 칼 바르트의 교회론 연구”, 『역사신학논총』, 36권(2020)에서 바르트가 교회를 새롭게 규정함으로 제시했다. 이성호는 바르트가 행동주의(actualism)로 새롭게 제언하는 교회 이해에 대해서 단순하게 제시하며,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존한다”는 내용을 긍정적 판단으로 논문을 제시했다.
바르트는 자기 전제로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에, 바르트의 전제에 동의하지 않으면 바르트 신학 전체가 무의미하게 된다. 그런데도 바르트의 전개가 방대하고 체계적이기 때문에 독자를 감동시키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계시 안에서 인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어떻게 현실적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wie es wirklich und wie es möglich ist, daß Gott in seiner Offenbarung zum Menschen komme, we asked how God does and can come to man in His revelation, we were compelled to give the clear answer that both the reality and the possibility of this event are the being and action only of God, and especially of God the Holy Spirit)는 바르트 사유의 시초적 질문이다. 바르트의 신관은 “행동하는 신”이다. 김성삼 박사는 이 부분에 대해서 칼빈과 정통신학은 대조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라고 이해를 밝혔다(김성삼, “행동하시는 하나님, 존재하시는 하나님: 바르트와 칼빈의 하나님론”, 총신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2005). 바르트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행동이 발생하는 사건, 현실성과 가능성은 발생하는 것(Geschehens)이고, 하나님(Gottes), 특별한 성령 안에서, 고유하고 독자적인 존재와 행위(im besonderen des Heiligen Geistes, eigenes und alleiniges Sein und Handeln ist)로 규정했다. 바르트의 글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번역도 쉽지 않고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바르트는 계시가 발생한다는 것이고, 성령의 특별한 것이고, 존재와 행위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것이라는 규정이다. 이러한 것은 현실성과 가능성(die Wirklichkeit und die Möglichkeit, reality and possibility)이다.
바르트는 인간 안에서 발생하는 계시의 현실성과 가능성을 구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verwehrt).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의 차이점은 이성의 합리성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이성의 한계를 제한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의견에 개방성을 둔다. 그러나 현대주의에서는 폐쇄성을 인정한다. 현대주의 산물인 종교다원주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절대성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바르트의 “계시일원주의” 때문이다. 이원론 체계에서는 상대하는 악을 필연적으로 상정해야 하지만, 일원론적 세계관에서는 악이 상정되지 않는다. 다만 “악으로 규범하는 진영을 악으로 상정”하는 폐쇄성을 인정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에게 무한하게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을 구사했다. 인간에게 어떤 가능성을 부여하지 않았고, 접촉점(Anknüpfungspunkt, point of contact)도 인정하지 않았다. 접촉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에밀 부르너와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논쟁을 발생하기도 했다. 바르트가 “자연신학을 부정했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바르트가 접촉점, 자연을 부정한 것이지, “자연에서 계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브루너와 바르트는 자연에서 계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공통적이다. 다만 브루너는 접촉점을 통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고, 바르트는 접촉점 없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바르트는 “고유하고 독자적인 존재와 행동” 그리고 “잠재적 존재와 행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바르트는 기존의 상태를 폐쇄된 동심원(geschlossenen Krei)으로 제시했다. 폐쇄된 동심원은 잠재적 존재와 행동(Potentialität das Sein und Handeln)이다. ‘잠재성’을 이해하는 방식은 중요한 판단 요소이다. 바르트는 잠재성을 가능성과 현실성의 근원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구분이 연결되어 있으면 인간은 판단할 수 없다. 잠재성 혹은 가능성이 현실성이 된다면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언제나 최소한 잠재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매우 멋진 선언이지만 이 멋진 선언에는 매우 강력한 한계를 인정(verwehrt, 거절한다)하고 있다. 칼 바르트 이후에 형성된 시대정신은 동성애 인정, 페미니즘 등 다양한 가능성에 무한한 개방성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폐쇄된 동심원을 지키겠다고 주장하는 진영에는 단순한 폐쇄성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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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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