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폐쇄적 종교, 사람적 종교와 성령이 부어지는 종교
바르트는 “원형적 사고”를 한다고 볼 수 있다. 바르트에게는 동심원이라는 어휘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기독공동체와 시민공동체>라는 저서에서 각기 크기가 다른 세 개의 동심원으로 설명했다고 한다. 원 가운데 중심이 되는 원에는 그리스도를 놓고, 그 밖의 원에는 교회, 가장 밖의 원에는 국가를 위치시킨 것이다. 이러한 삼중원의 구조는 계시에서도 그렇다. 바르트는 선포에서 교회로 되는 상관성이 있는 4개의 동심원을 제시했다(127쪽, KD I/1., 90). vier konzentrischen Kreisen, 4 concentric circles. 1.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 2.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 3.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 4. 하나님의 말씀의 통일성이다. 동심원 중심에 그리스도를 놓는 계시일원론적(mono or concentric) 사고 체계를 제언한다. 그 사고의 목적은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자유와 사랑”이 드러나도록 하는 배치이다. 우리는 신학에서 어찌 되었든지 그리스도와 그의 이름이 드러나도록 정진한다(빌 1:20-30; 갈 2:20-21).
우리는 앞에서 바르트의 계시는 발생하는 현실성으로 정리했다. 바르트의 맹점은 인간에게 계시 현상이 발생한 모든 것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인간적 상태, 경험, 행위의 형태인 한도에서, 인간적 종교의 문제점”에 부딪히게 되지만,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적 실존의 규정으로서 현실성이며 가능성”이 된다. 이것을 인간이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GG,, 351).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결정이 인간의 결단에 있게 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 Enten-Eller, 1843년)는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의 제목이기도 하다. 폐쇄된 동심원에 있으면 인간에게는(GG., 350) 경험, 상태 등을 제한하는 것이 될 것이고, 성령에 의존하면 신의 계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신의 계시를 제한하는 행위를 가볍게 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폐쇄된 동심원의 종교를 지양(Aufhebung der Religion)한다고 선언하며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가 규정하는 폐쇄된 동심원의 종교는 바르트 이전의 종교가 된다.
그 종교는 그리스도교 혹은 그리스도교적 종교(Christentum" oder ,,christliche Religion)이다. 필자는 “기독교와 그리스도인(기독인)의 종교”라고 번역한다. 바르트의 특이한 문장인 주어와 술어(ein Pradikat an einem Subjekt)가 등장한다(GG., 351). Genus를 신준호는 ‘유’로 번역했는데 ‘속(屬)’이 일반적 번역이다. 종속(種屬)에서 바르트는 제(諸) 종교를 속(續)으로 보고, 모든 종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도교, 애니미즘, 토테미즘 등등의 종교-를 제시한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를 부정하지 않는다. 종교다원주의에 해당되는 전형적인 문장이다.
Es gibt ja außer und neben dem Christentum auch Judentum und Islam, Buddhismus und Shintoismus, animistische und totemistische, asketische, mystische und prophetische Religion aller Art. Nochmals: Wir mußten die Offenbarung als solche leugnen, wenn wir bestreiten wollten, daß sie nun eben auch das(KD., 306).
바르트는 기독교를 인간적인 얼굴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으며, 다른 종교에 비교해서 독특한 것이 없다고 제시한다(Christentum ist, daß sie auch dieses menschliche Gesicht hat und in dieser Eigenschaft mit anderen menschlichen Gesichtern in einer Reihe steht, daß sie von hier aus gesehen zwar eigenartig, aber eben nicht einzigartig ist. GG., 351).
그런데 바르트는 인간이 일반적인 종교가 아닌 특수하게 “자신의 고유한 삶과 세계의 삶을 고양시키고 영향을 주는 권세들 앞에 대면하여 놓여졌다고 느끼는 것”을 제시한다(GG., 352). 바르트는 인간적 얼굴이 있는 종교들은 모두 원시적인 단계로 규정한다. 마치 원불교의 교설을 보는 듯하다. 앞에 놓은 모든 대상을 제거하는 것은 유사하지만, 직접 대면하는 것(마주 섬, Gegenuber)을 추구하는 것에서는 차이가 있다.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모든 종교가 신, 신들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고, 신성의 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하며 들으려고 노력한다고 제시했다(GG., 352). 기독교의 성경과 이슬람의 꾸란(코란)도 병렬로 제시한다. “모든 종교들의 근본적 개관의 요소들과 문제들, 곧 세계의 창조와 종말, 인간의 기원과 본성,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법규, 죄와 구속 등은 최소한 그리스도교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경건은, 그것의 최고의 가장 세련된 형식에 있어서, 그것이 아무리 높은 수준에 있다고 해도, 결국 그리스도교적인 경전은 모든 다른 형식의 경건과 같은 차원에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이 가장 높은 수준에 있다면 그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GG., 352).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런데 바르트는 이 부분에서 슐라이어마허를 벗어났다. 슐라이어마허는 제 종교들을 말하면서도 기독교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그런데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를 떠나 기독교는 제 종교 중에 일부이며 우월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바르트가 자유주의를 극복한 모습이 아니라, 기독교를 더 과격하게 세속화시킨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근거를 주장하는 바르트의 신학 근거는 하나님의 은폐성(Gottes Verborgenheit)이다. 바르트는 세계의 사람적 종교에는 신이 은폐되었다고 주장한다(Gottes Offenbarung ist tatsachlich Gottes Gegenwart und also Gottes Verborgenheit in der Welt menschlicher Religion). 그 제 종교에 기독교도 포함되어 있다. 바르트가 말하는 신의 계시는 사람의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제 종교는 술어적 위치에 있고 주어적 위치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종속에서 속(屬)의 다양성이 종(種)의 위치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주어적인 신의 유일성을 강조한다. 이 신의 유일성은 인간적인 비천함에서는 은폐된다고 멋있게 표현했다.
신의 은폐성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성령의 부어짐(die Ausgießung des Heiligen Geistes)이다. 바르트에게 이전의 기독교에는 성령의 부어짐이 없는 것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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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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