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불신앙으로서 종교 (4) 계시 안에서 믿음으로 인식하는 신 2
우리는 앞에서 바르트가 계시 안에서 인식하는 신만을 택하고,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면 저항(Widerstand)하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바르트는 계시로부터 발생된 것으로 보여진 종교(Religion von der Offenbarung)라고 평가했다. 바르트가 인간적 힘(ein menschliches Gemchte)에 의한 종교를 비판하고, 신적 사역(des ttlichen Werkes)을 강조하기 때문에 우호적으로 느낄 수 있다(GG., 376).
바르트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1권 11장 8항에서 인간의 정신이 신의 형상, 우상을 생산하는 공장(idolorum fabricam)이라고 제시하면서,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칼빈이 말하는 우상은 바르트가 만든 형상(Gottesbild)도 포함된다. 칼빈은 정통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참 하나님으로 보고, 다른 신 체계를 우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정통 기독교의 삼위일체(Trinitas)는 자기 신관(삼중일신: Gottes Dreieinigkeit)의 뿌리나 흔적(Vestigium trinitatis)으로 평가하며, 이전 체계는 퇴출당하여야 할 것으로 평가한다(『교회교의학』 I/1, 박순경 역, p. 487). 삼위일체의 뿌리(Wurzel trinitatis, CD I/1., §8.2. The Root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에서 시작한 것으로 제시했다. 바르트는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이해를 흔적(Vestigium trinitatis)으로 보았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Trinit tslehre)을 ‘삼중일적 신의 흔적(das vestigium des des dreieinigen Gottes)’으로 보고, 삼중일신(Gottes Dreieinigkeit)으로 변환시켰다. * 칼 바르트의 역사의 선(線, line), 예수(1-30년), 아리우스(?) - 세르베투스(?) - 이신론(일신론), 유니테리언 - 칼 바르트 그리고 고경태의 역사의 선, 예수(1-33년, 특히 3년) - 아타나시우스(4세기) - (정통신학) 어거스틴 - (16세기 개혁신학) 루터, 칼빈 – 고경태 * “삼위일체와 유일신론”은 전혀 다른 신관임을 매우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일신론이 아닌 삼위일체 믿음의 종교이다.
바르트는 인간적 힘에 의한 종교를 강력하게 거부해야 한다고 선언한다(GG., 377). 그의 주장은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르트 자신이 인간적 힘에 의한 종교 범주에 있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바르트는 신의 자유, 사랑을 근거한 계시를 주장한다. 정통신학에서 계시 이해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는 것(Dei ipsius revelatio), 세계 창조와 인간 창조를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로 규정한다. 반면 바르트는 계시 근거를 명확하게 밝힌 것이다. 그래서 그 계시에 저항하는 인간적 힘을 전환시켜야 한다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다.
바르트는 그러한 폐쇄적인 인간의 능력으로 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GG., 378). 그러한 구도에서 형성된 의미는 진리가 아닌 허구라고 규정했다. * 바르트는 die Erkenntnis Gottes als Gott und Herr(신과 주를 인식)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성경적 표현은 주와 구주(Lord and Savior)이고 신학적 표현은 창조주와 구속주(Creator and Redeemer)다. 그런데 바르트는 구속자를 성령에게 귀속시킨 것이 특징이다. 기독교 정통파는 그리스도를 창조주와 구속주로 고백한다(Christ the Creator and Redeemer: Colossians 1:15-28).
바르트는 계시와 종교(Offenbarung und Religion des Menschen)를 대조시킨다(GG., 378). 그리고 종교와 계시는 서로 모순된다고 규정했다. 그래서 바르트가 추구하는 믿음과 종교의 믿음은 같지 않으며, 종교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고 불신앙이 된다. 바르트가 설정한 거짓 믿음과 불신앙은 정통 기독교 신앙이다. 바르트는 정통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관용이 가득하다. 이러한 패턴은 전형적인 종교다원주의적 성향이다.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배타적 구원관을 가진 기독교에는 어떤 가능성도 부여하지 않으며 강력한 저항 의식을 보인다. 그것은 바르트의 글에서 충분하게 보고 있다. 바르트는 성경과 신학 본문을 가져와서 자기 체계를 구축하면서, 성경과 정통 신학이 추구하는 구원 체계에 저항하며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종교를 우상 체계로 규정하고, 우상을 배격하는 것이 구약성경의 일관성 있는 주장으로 긴 부분을 변론한다(GG., 378-383). 바르트가 우상을 배격하지만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의 배격하는 우상 종교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바르트 신학 체계를 1962년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채택해서 로마 카톨릭주의와 칼 바르트 신학이 융화되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교와 대화를 위해서 오순절주의로 접근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흐름에서인지 로마 교회 안에 오순절주의를 추구하는 사제들이 있다(성령쇄신운동). 그런데 오순절주의보다 더 포괄적인 바르트 신학으로 공의회가 결론되었는데, 그 결정체가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이다.
구약성경이 우상을 배격한다는 주장은 너무나 타당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바로 긍정하면서 긴 부분의 제시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냉정하게 가스라이팅(Gaslighting)의 수법과 유사하다. 가스라이팅은 긍정적인 대답을 유도해서 자기 주장, 주기 패턴에 넣은 뒤에 자기 말에 맹종하게 만드는 수법이다.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유도하고 유도하고 유도하면 특이하게 최면이 걸려 가스라이팅이 된다. 바르트의 긴 문장(GG., 378-383)은 구약과 신약성경이 우상을 배격한다는 주장이다. 바르트의 주장은 너무나 타당하다. 그런데 바르트의 긴 문장의 오류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르트는 우상 배격과 함께, 신의 계시와 대면한 인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바르트는 독자들에게 계시 이해에서 대전환을 시도했다. 바르트 이전의 계시 이해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해서 이해하는데, 바르트에게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를 구분하는 것이나 자연계시를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한 규범은 존재와 인식 관계이기 때문이다. 바르트에게 존재는 없다. 바르트에게 계시는 행동이다. 특별계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계시가 발생한다. 에밀 브루너는 자연계시가 있다고 말한 것이고, 바르트는 자연에서 특별계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보았을 때는 브루너와 바르트의 계시 이해 차이가 없는데, 계시가 있다고 하는 것과 계시가 발생한다는 차이와 그 계시가 자연계시가 아닌 계시라는 것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상에게 예배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스라고 답변할 수 있다. 그러나 우상에게 예배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예배할 것인가? 바르트는 창조자 신에게 예배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도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하니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진리에서 위험한 것은 절반의 진리, 유사한 진리이다.
Indem die Offenbarung auf den Plan tritt, indem ihr Licht auf das Heidentum f llt, ist seine Religion gesichtet und aufgedeckt als das Gegenteil(반대) der Offenbarung, als falsche Religion des Unglaubens(KD., 335). 바르트는 계시의 빛이 와서 이교(異敎, Heidentum)에 비취니 이교가 드러나며, 계시에 반대되는 이교가 거짓 종교이고 불신앙인 것이 폭로된다고 규정했다(GG., 383). 우리는 바르트가 계시와 대립되는 종교가 정통 기독교 믿음 체계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교회교의학』 I/1 시작할 때에 다시 검토한다고 선언했고, 그 과정을 진행하며 새로운 신학(신정통주의)을 체계화하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계시가 발생할 때에 신을 인식하지만, 정통신학은 믿음으로 예수를 주와 구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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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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