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삼중일신(Gottes Dreieinigkeit) 번역에 대해서
반틸 박사가 바르트에게 Saga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바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브로밀리(Geoffrey W. Bromiley)가 대답을 간청했지만 답변하지 않은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바르트는 반틸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천박한 수준이기 때문에 답변하지 않고 불쾌한 심경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Saga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서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즉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번역한 브로밀리도 바르트의 사상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말로 바르트 전권이 번역된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일본에 비교해서 훨씬 뒤에 번역되었다는 것도 우리 학문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 바르트의 사상을 명확하게 아는 연구자들이 많지 않다. 우리 연구자들도 그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트의 저술을 번역하여 바르트의 사상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번역할 때에 규칙적으로 번역한다면 좀 더 용이하게 원문, 바르트의 사상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번역은 여러 번역자들이 번역했기 때문에 바르트의 어휘와 우리 어휘의 연결성이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번역의 좋은 점은 라틴어 등 모든 언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인데, 영어 번역과 차이점이다.
여기에서는 Gottes Dreieinigkeit 번역에 대한 이야기이다.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서 등장하는 어휘 Gottes Dreieinigkeit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영어 번역한 제프리 브로밀리는 Triunity로 번역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삼위일체”, “삼위일체성” 등으로 번역되었다. 필자는 “삼중일신”으로 번역을 제언한다.
일단 Gottes Dreieinigkeit를 “삼위일체”로 번역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이런 대표적 실수는 이종성 교수가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의 신학 사상을 자연스럽게 정통주의의 연속성으로 평가하게 된 것이다. 영어권에서도 Trinity와 Triunity의 차이점을 잘 인식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Trinity와 Triunity는 번역어이기 때문에, 번역어 이전의 어휘를 파악한다면 차이가 분명하다는 것은 바로 알 것이다. Trinity는 trinitas의 번역어이고, Triunity는 Gottes Dreieinigkeit의 번역어이다. trinitas를 Triunity로 번역하는 것은 심각한 오역이다.
독일어에서 (Heilige) Dreifaltigkeit, Dreieinigkeit oder Trinit(라틴어 trinitas)를 사용한다. Dreifaltigkeit는 루터도 사용한 어휘이고, 바르트의 글에도 Dreieinigkeit는 등장한다. 그렇다면 세 어휘가 동의어인가가 중요할 것이다. 루터의 글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선명한 제시가 약하고,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Dreifaltigkeit라는 어휘가 등장한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Dreifaltigkeit에서 Dreieinigkeit를 사용했다. 루터와 바르트가 유사한 어휘를 쓰지만 전혀 다른 개념이다. 그 이유는 루터의 신학 개진으로 로마 카톨릭주의에서 개혁했고(1517년), 바르트의 신학 개진으로 로마 카톨릭주의와 동일화가 되었기 때문이다(1962-1965년, 2차 바티칸 공의회).
바르트는 그의 독일어 어휘에 대한 영역(英譯)에서 Dreiheit를 Trinity로, Dreieinigkeit는 Triunity로 번역했다. 영역에서 바르트의 네 어휘를 네 어휘로 대칭해서 번역하지 않았다. Dreifaltigkeit를 Triunity로 번역했다. 그래서 바르트의 글을 연구할 때 명확한 이해가 쉽지 않다. 『교회교의학』 I/1권 번역자 박순경 교수는 Dreiheit를 “삼위성”으로, Dreieinigkeit는 “삼위일체성”으로 번역했다. 철학계에서 Dreiheit는 “삼지성”으로 번역하고 있고, 박순경은 Einheit는 “일위성”이 아닌 “통일성”으로 번역했다. “셋 안에 하나(Die Einheit in der Dreiheit)”로, “하나 안에 셋(Dreiheit in der Einheit)”으로 번역한 연구자도 있다. 원어에서 번역의 전이가 일치되지 않으면 의미 전달이 매우 어렵게 된다. 바르트의 저술의 우리말 번역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 번역은 매우 훌륭한 과업이다. 완전한 번역은 없다. 그러나 바르트 사상의 핵심이 되는 어휘에 대해서는 좀 더 명확한 이해를 위한 번역을 해야 한다.
우리말 번역에서 Dreieinigkeit 번역이 통일되지 않고 있다. Dreifaltigkeit를 Triunity(박순경, 삼중성)로 Dreieinigkeit과 같이 번역했다. 바르트는 루터가 제시한 Dreifaltigkeit를 어거스틴의 사유의 중간 개념처럼 제시했다. Dreieinigkeit는 헤겔의 『종교철학』에서 등장하는데, “삼위일체”, “삼일성”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우리는 Dreieinigkeit를 번역할 때에 ‘위(位)’ 자를 넣지 않아야 한다고 제언한다. 그것은 바르트는 하나님의 위격적 존재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성”으로 번역하는데, 삼위일체와 다른 어휘라는 것을 지시할 수 있는데, 삼위일체와 비견되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 우려가 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를 거부하고 새로운 신 이해를 세웠다. 그 신 이해가 Gottes Dreieinigkeit이다.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trinitatis)를 거부하고, 삼중일신(Gottes Dreieinigkeit)을 확립하는 역사 이해 구도를 제시했다. 그래서 Dreieinigkeit를 “삼위일체”로 번역하면 바르트 사상 이해에 심각한 왜곡이 발생한다. 바르트는 신(神)에게 위(位)를 부여하는 것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는 구원협약(pactum salutis)을 이신론(二神論, duotheismus)로 규정하고, 우상숭배적 사유체계로 주장했다(KD., IV/1, 69).
칼 바르트에게 “삼위일체 믿음이 있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서철원은 1982년 박사논문에서 삼위일체가 없음을 제시했는데,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바르트주의자들의 아성인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선정한 20세기 100대 논문에 선정되었다. 서철원의 박사 논문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중보자직: 창조와 성육신 관계에서 연구”이다. 서철원 박사는 2018년 “현대신학에 하나님이 있는가?”라는 신학토론에서 “바르트의 신학에는 하나님은 없고 인간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는 슐라이어마허의 가르침을 따라 삼위일체를 부정하면서 자존하신 하나님도 없애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바르트의 글에 삼위일체는 있다. 다만 바르트가 제시하는 삼위일체는 부정을 위한 제시이다. 바르트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며 혐오한다. 『교회교의학』 I/2에서 제시된, “불신앙으로서의 종교”에서 지양되어야 할 종교는 제종교가 아닌 정통신학의 종교이다. 바르트는 지양을 넘어서 폐지를 주장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를 삼중일신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 혹은 뿌리로 제시했다. 첫째, 바르트는 옛신학의 삼위일체를 vestigium creaturae in trinitate(삼위일체 안에 있는 피조물의 흔적)로 규정하며, 흔적에 집착하지 않도록 제시했다. 바르트는 대우주와 소우주를 알기 위해서는 흔적들(vestigia)을 지워야 함을 제시했다. 바르트가 존재유비(analogia entis)를 부정하고 믿음유비(analogia fidei)를 사용했다는 말이 유명하다. 존재유비의 대표자는 어거스틴이며, 그가 존재유비로 삼위일체를 구축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바르트는 옛 신학(alte Theologie)를 헛된 장난(müßiges Spiel)으로 규정했다. des dreieinigen에는 위격 개념이 없다. 둘째, 바르트는 옛신학을 삼중일신의 뿌리라고 제시했다. 삼위일체의 뿌리(Die Wurzel der Trinitatis, §8.2. The Root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로 제시했다. 바르트는 Wurzel der Trinitätslehre(삼위일체론의 뿌리)에서 삼위일체가 아닌 삼중일신의 흔적으로 제언했다(KD I/1., 367/GG., 450).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권에서 계시론을 전개하는데, 『교회교의학』 I/1권에서는 삼위일체를 해소시키고, 『교회교의학』 I/2 에서는 기독론 교리(칼케돈 신경 등)를 해소시켰다. 그리고 §17에서 “종교의 지양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선언했다.
바르트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어휘 개념 정립이 필요하다. 애매하게 어휘를 이해하면 바르트 이해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르트의 강력한 흡인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Gottes Dreieinigkeit는 바르트 신학에서 핵심 어휘이다. 바르트가 혐오하는 ‘위’를 포함한 번역은 좋지 않다. 그래서 필자는 “삼중일신”이라고 번역했다. “삼일성”이나 “삼일신”으로 번역해도 되는데, “삼중일신”이라고 한 것은 바르트가 『교회교의학』 I/1권 초기에 세 동심원(the three concentric circles)을 소개하면서 삼중적 의미(dreifachen Sinn, threefold form)의 근거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계시의 삼중성(the three forms of revelation)이 연결된다. 그래서 바르트에게 주어진 양태론적 신관에 대한 비판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까지 밝힌다. 최소한 양태론은 신 존재를 근거로 한 이해이다. 바르트의 Gottes Dreieinigkeit은 신존재가 아니라 신인식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은 인간 의식 안에서 발생하는 의식(믿음의 결단)이며, 이 가능성은 모든 사람에게 제한이 없다. 신 존재를 명확하게 고백하는 집단은 정통 교리를 견지한 교회이다. 정통신학의 존재하는 하나님 삼위일체와 신정통신학의 행동하는 신의 삼중일신의 두 명확한 체계로 구성되어야 한다(비교. 김성삼, “행동하시는 하나님, 존재하시는 하나님: 바르트와 칼빈의 하나님론”, 총신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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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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