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4-10-22 10:3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교회 기능은 ‘신학’훈련이 아니라 ‘진리’ 보수와 전파이다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1권, I/1 읽기(6)


우리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을 매우 천천히 읽으면서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바르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르트를 이해하려고 하는 ‘나’를 정립하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를 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바르트뿐만 아니라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 필자는 최근 정통주의를 ‘6타입(6 type orthodoxism)’으로 정리해서 개념화하고 있다. 1타입 정통주의, 325년, 381년 공의회 채택(그리스도 양성론 이단 분별 보류); 2타입 정통주의, 325년, 381년, 431년, 451년 공의회 채택(성상파괴주의) 칼빈파; 3타입 정통주의, 553년, 681년, 787년 7대 공의회 채택(성상숭배주의) 로마 카톨릭주의, 정교회; 4타입 정통주의, 451년 공의회를 채택하면서, 성상숭배 결정에 대해서 아디아포라를 설정함. 루터파, 성공회, 감리교; 5타입 정통주의, 정통신학을 재해석한 새로운 정통주의; 6타입 정통주의, 7대 공의회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순수성경주의. 도나투스파, 재세례파, 일부 침례파로 분류화시켰다. 칼빈파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까지 정통 교리로 인정하는 2타입 정통주의이고, 칼 바르트는 정통주의를 수정해서 재정립하는 새로운 정통주의로 5타입 정통주의로 구도화시켰다. 바르트는 모든 신학 어휘를 자기화해서 새롭게 개념화시켰다. 자연스러운 어휘도 있지만 대부분 새롭게 개념화했다. 바르트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어휘일지라도 우리는 조금 더 면밀하게 신학 어휘 개념을 확립하려고 한다. 정통주의를 사랑하는 학도로서 정통주의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어휘 개념이 명확해야 한다. 그러한 작업은 칼 바르트가 정통주의 어휘 개념을 전혀 새로운 의미로 전환시켰기 때문에 정확한 확인 과정이 필요하다.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I/1 시작을 “1. 교회, 신학, 학문(KIRCHE, THEOLOGIE, WISSENSCHAFT)”으로 시작한다.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익숙한 잘 아는 어휘처럼 보이지만, 어휘 개념을 명확하게 아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바르트는 기존의 어휘 개념을 전환시켰기 때문에, 100년 뒤에 있는 우리는 더 쉽지 않다. 필자는 중세와 근세의 전환에서 많은 어휘 개념이 상실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휘 개념 상실이나 변형은 시대가 지나면서 반드시 수행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어휘 변형이 상당히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물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어휘 개념뿐만 아니라 음가에서도 차이가 크다.
바르트는 교의학을 학문의 한 기능, 즉 자기검증(die wissenschaftliche Selbstprufung, the scientific self-examination)을 하는 신학적 훈련(theologische Disziplin)으로 정의했다. “Dogmatik ist eine theologische Disziplin. Theologie ist aber eine Funktion der Kirche. 교의학은 한 신학적 훈련이다. 신학은 교회의 한 기능이다”(KD I/1., 1, GG., 27). 바르트는 ‘신학’을 어떻게 생각할까? 바르트는 신학을 일반 어휘로 생각하고, 교회에서 발생하는 훈련으로 개념화시켰다. 훈련으로 번역한 Disziplin은 discipline으로 제자도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다. 제자도로 번역하면 “신학적 제자도, 제자훈련”이 될 것이다. 그런데 discipline이 우리 교회에 초기에 들어올 때 번역된 용례는 ‘권징(勸懲)’이다. 그래서 discipline에 대한 의미를 정당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discipline은 제자도라는 의미보다 훈련이라는 의미가 더 정확할 것이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훈련(training, drill)’이기 때문에, ‘경건훈련’으로 볼 수 있다. 바르트가 교의학(Dogmatik)을 신학적 훈련으로 본 것은 완성된 체계가 아니라 완성으로 가는 체계로 본 것이다. 도상신학(途上神學, auf dem wege sein, theology-on-the-way)이라고도 한다. 야스퍼스(K. Jaspers, 1883-1969)는 철학이란 언제나 “길 위에 있는 것(Sein auf dem Wege)”이라고 말했다. 도상 신학은 앞으로 가는 것으로, 변증법적 역사 이해인데, 변증법의 맹점은 미래를 긍정적이고 절대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물질이나 정신은 시간이 갈수록 발전되지 않는다. 그런데 기술 문명은 발전한다.
바르트는 신학을 교회의 한 기능(eine Funktion der Kirche)으로 규정했다. 바르트의 첫 문장에 동의하면 바로 바르트의 논리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교회의 기능에 신학은 없고, 없었다. 신학을 수행하는 기관은 수도원이나 대학이었다. 교회의 기능은 신학이 아니라 진리(복음)를 지키고 전파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교회의 표지(標識, mark: notae ecclesiae, die Merkmale der Kirche)라고 한다. 바르트는 신학 초기에 교회의 기능을 말하는 것도 특이한데, 교회의 기능을 신학, 신학적 훈련으로 이끄는 것은 결코 일상적이지 않다. 그러나 일상적이지 않은 생소한 것도 반복하면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은혜의 법은 결코 육체의 훈련으로, 반복으로 익숙하게 되지 않는다. 은혜는 오직 성령의 사역으로 심어진 특별한 지식이다. 바르트에게 성령의 사역으로 심어지는 구도는 성령의 자의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구도인데, 개혁신학은 말씀과 함께(cum verbo) 성령의 사역으로 수행된다. 사도행전에서 베뢰아 성도들처럼 말씀을 상고하는 것이 말씀과 함께하는 것이며, 성령의 사역으로 은혜가 되는 사례이다. 바르트는 학문적 검증 과정을 통한 신학적 훈련을 통해서 교의학을 구성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이전의 체계에 대해서는 전면 재검토를 해서 새로운 개념을 확립시킨다. 그것도 바르트가 개념화한 것의 다양한 변형을 추구한다. 즉 바르트의 개념은 아니지만 수없이 많은 개념과 무개념이 파생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정통신학은 반드시 영혼의 구원과 유익이 되는 복음, 진리를 산출시켜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다(고전 10:23). 거룩한 영적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교회의 기능이다. 인간에게 발생된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유익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러한 규범적 이해를 갖는 것을 거부한다. 그 규범을 우상으로 보는 것인데, 칸트가 비판한 교조주의(dogmatism)의 범주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신학은 결국 칸트의 범주와 헤겔의 역사 이해에서 신학을 하는 것이다. 칸트가 이성의 기능으로 절대자를 파악할 수 없다고 규정했지만, 바르트는 계시 기능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고, 그러한 경험을 모두 신경험, 신의식의 현상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한 패턴은 슐라이어마허가 제언한 종교체험, 절대의존감정의 우산 아래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에 체험이 있는데, 체험을 기준으로 신학을 하면 모든 종교의 체험을 부정할 수 없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종교다원주의를 거부할 수 없다.

바르트는 신학을 교회의 한 기능이라고 규정했지만, 교회에 신학의 기능이 부여되었다는 근거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신학은 중세 스콜라 시대에 파생된 어휘이고, 스콜라 신학은 교회의 신학이 아닌 스콜라의 학문, 대학과 수도원의 학문이다. 중세 스콜라주의는 영광의 신학(theology of glory, theologia gloriae)으로 규범화되었고,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영광의 신학을 거부하고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으로 구도화시켰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한다”(crux probat omnia).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ca). 바르트가 루터의 어휘를 많이 사용하지만, 루터의 개념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루터의 어휘에 자기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바르트가 중세 스콜라주의와 종교개혁신학의 어휘에 계몽철학, 자유주의의 개념을 넣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개념은 바르트 개인적 개념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1은 “교의학의 과제”이다 (§1 Die Aufgabe der Dogmatik)
바르트의 신학 어휘, Wirklichkeit 이해 훈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