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 본 구원의 서정
이러한 맥락에서 구원의 서정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자들은 창세전에 이미 기쁘신 뜻을 따라 당신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며, 영광스럽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피조세계의 사역은 이미 영원세계에서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완성되었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작정, 계획)은 영원세계 안에서 과거 완료형으로 확정되고 이미 성취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도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엡 1:11)라고 밝힘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신 영원세계에서 모든 일을 작정하시고, 그 작정을 피조세계에서 언약하신대로 성취하시는 원리를 통해서 알려주심으로서 계획하신 의도대로 섭리된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영원세계에서 작정되었고, 피조세계에서는 언약과 성취의 원리를 통해서 그리스도로 계시된 것이다. 따라서 구원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미 완성되고 실현된 사건이며, 그것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간세계에서 확증시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을 논의할 때는 반드시 구원의 근간이 되는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예정)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바울의 논조에서 보면, 인간의 구원에 대한 목적은 인간의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 하신 것에 있다(엡 1:3-12). 그 내용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오실 자의 표상인 아담에게 언약하시고,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성취하신 것이다.
구원의 서정을 정리하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사건은 이미 하나님의 작정(예정)사역에서 확보되어졌고, 피조세계에서의 구원사역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복 주어 아들되게 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성화의 출발인 부르심의 범주에는 ‘중생, 회심, 믿음, 칭의’의 역사가 동시다발적이며, 순간적이고, 단회적으로 성립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굳이 회개가 먼저인가 믿음이 우선하는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논의의 관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논점은 창세전의 선택이라는 것이지 과정상의 순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화의 과정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의롭다함을 인정받고 하나님의 아들된 자들이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의미한다. 성화의 생활은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의 은총을 깨닫고 날마다 옛사람은 죽어가고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성숙한 신앙의 변모를 의미하는 것이다.
끝으로 성화의 결과는 영화로운 몸을 입는 것이다. 영화로운 몸을 입는다는 것은 성화의 최종 완성단계를 가리키는 것으로써 육의 몸을 벗어버리고 신령한 몸으로의 변화하는 것을 뜻한다. 신령한 몸에 대해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2-44)라고 증언한다.
로마서에 소개된 대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라는 바울의 말을 토대로 하여 볼 때 구원의 서정은 창세전부터 이미 확정된 사건으로서, 부르심과 의롭다하심 그리고 영화롭게 하심의 삼단계로 정리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굳이 신학적인 의미를 부과하면, 성화의 출발은 부르심, 중생, 회심, 믿음, 칭의, 양자의 단회적 사건이고, 성화의 과정은 신앙성숙(성화)과 택한 자녀들을 끝까지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견인(堅忍)이며, 성화의 결과는 영화로운 몸으로 정리된다. 구원의 서정은 논리적인 순서에 불과하기 때문에 순서의 정당성을 따지기 보다는 총합적인 체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구원의 서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출생하지(중생)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들을 수 있으며, 믿음도 없이 어떻게 방향 전환이 가능하며, 믿기 이전의 중생한 생명은 의롭게 되지 못한 것이 되며, 중생 할 때 이미 아들의 생명을 받았는데 재차 아들 됨을 인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여러 의문을 해소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신(神)존재확증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중생과 회개를 발생하게 하는 동력은 아닌 것이다. 즉 앞에서 언급한바 대로 구원은 선택의 결과이지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는 뜻이며, 선택한 자들을 믿게 해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지 믿음의 독자적인 역할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칼빈의 회개관에 대해서도 속죄의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깨닫게 되는 과정으로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영원히 속죄 받았으면, 그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이다. 속죄 받은 인간의 죄를 개인이나(교황주의자) 대중(칼빈)을 향해서 고백해야 된다는 것은 수치와 모멸감만 낳게 할 것이다. 설령 신자가 불경스러운 범죄를 자행했다 하더라도 잘못을 시인하면 교회는 그 부분을 용납하고 덮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죄책을 없애기 위해서,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대중에게 고백하게 하는 것이나, 소리 질러 통회자복 한다는 것 자체가 비인격적이며, 수치스러운 처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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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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