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
제2부 (6~10장) 성도의 생활
둘째, 그리스도인의 생활 동기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사랑과 거룩에 기초하며 그리스도의 모본(模本)적인 순종임을 밝힌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성경의 교훈에는 크게 두 가지 면이 있다. 첫째는 인간의 본성 그대로는 의를 사랑하는 일에 도무지 마음이 끌리지 않으며, 따라서 그처럼 의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 마음속에 주입되고 심어진다는 것이다. 둘째 성경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니”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레 19:2; 벧전 1:15-16)고 가르치는데, 과연 이보다 더 확실한 근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중략)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들을 때마다 거룩함이 그 연합의 끈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먼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어야 그의 거룩함이 우리에게 가득 차게 되고, 그가 부르시는 곳으로 따라가게 된다. 그리하여 성경은 하나님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거룩함을 목표로 삼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사 35:8) (중략)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그리스도께서 몸소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으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 그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낸다는 조건으로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받아들이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아버지로 계시하셨으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것이 마땅하다. (중략) 교리는 반드시 마음속으로 들어가 우리의 일상생활에 전해져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위의 글을 정리하면, 칼빈은 인간의 본성에는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입시켜 주셨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연합하여 그의 부르심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는 순종의 모본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고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낸다는 조건으로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선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서 하나님께서 선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공의를 사랑하게 해주셨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 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벧전 1:15~16)라는 말씀은 해석상의 문제가 있어 보인다.
본문의 “처럼”은 헬라어 카타인데, 목적격 전치사로서 ‘~에 의하여’이고, “도”는 헬라어 카이인데, 접속사로서 ‘역시’, ‘까지’, ‘정말로’라는 뜻이고, “되라”는 헬라어 기노마이인데, 동사이며 과거 수동태 디포넌트(deponent)로서 “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 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씀은 하나님처럼 우리도 똑같이 거룩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명령문이 아니라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하나님에 의하여 너희 역시(까지)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단순한 명령문이 아니라 내가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종합하면, 거룩은 우리를 부르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모든 행실에까지 거룩한 자가 될 수 있도록 자라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한 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이다. 거룩이라는 것은 진선미(眞善美)를 초월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행위로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義)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혀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명령은 절대명령이기 때문에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거나 상대가 스스로 실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절대명령은 절대자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서 ‘하게 해 주신다’는 약속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칼빈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단순한 명령문으로 잘못 해석하였다.
칼빈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모본(模本)으로 해서 우리의 삶도 그를 따라야 한다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낸다는 조건으로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받아들이셨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아버지로 계시하셨으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규범적인 생활에 대한 성경신학적 견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간다는 칼빈의 말에 동의하지만 그것이 자녀의 조건이 되고, 하나님께서 아버지로 계시하셨기 때문에 자녀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선행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자녀가 되는데 있어서 어떠한 조건이나 단서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기쁘신 뜻을 따라 일방적으로 선택해 주셨고, 그리스도를 믿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여기에 인간의 행위나 공로 그리고 자유선택과 결단은 전혀 포함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 말한다.
성도의 선행도 마찬가지인데, 선행은 하나님의 은총에 인간이 보답하거나 응답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에 수혜자 인간이 보답하는 차원이 아니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차원도 아니다. 성도의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의 역사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추구하며 살아가기까지 역사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즉, 은혜를 베푸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선한 생활을 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유기적인 체계에 의해서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는 존재의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선행을 칼빈의 논조로 이해한다면 성도는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의 결단과 각오 그리고 노력과 열심의 끈을 놓으면 안되고, 마지막까지 자녀로서의 삶을 증거해야 하는 부담감에 억눌리게 될 것이다. 칼빈은 이러한 긴장감을 덜어주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무것으로도 말고 오직 완전한 복음으로만 숨 쉬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완전한 상태를 목표로 설정해 놓고 끊임없이 계속해서 그 상태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위의 글은 완전한 상태를 목표로 방향을 설정한다는 말이지, 선행만을 위해서 일괄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밝히는 것이다. 칼빈의 말대로 어느 누구도 완전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선한 목표까지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동감한다. 성도생활의 목표는 구원에 이르기까지 세속에 물들지 않고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에 있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성도의 선한 생활은 하나님의 은총에 보답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도 아닌 것이다. 성도의 선한 생활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한 결과로서 나타난 믿음에 의한 행위인 것이다.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독교강요 이해 3권 |
기독교강요 이해 3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