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0-12-04 15:2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제2권 제7장 율법을 주신 목적


“율법이 주어진 것은 택한 백성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그들의 마음이 준비를 갖추도록 하고 그에 대한 간절한 열심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소망을 강건하게 하여, 그의 강림이 오래 지체되는 동안 낙망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율법”이라는 단어를, 비단 경건하고도 의로운 삶의 규범으로 제시된 십계명을 의미한 것만이 아니라,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전수하신 신앙의 형식을 의미한 것으로 이해한다.

하나님께서 희생 제사들을 명하신 것이 그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이 땅에 속한 복잡한 행위들로 바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더 높이 들어 올리시기 위함이었음을 바로 그 예표(豫表) 자체가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값없으신 전가(轉嫁)를 통해서와 중생의 영으로 말미암아 의를 베풀어주시기까지는 계명들이 아무리 의를 가르친다 해도 소용이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를 율법의 성취 혹은 마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사함을 구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도덕법으로 교훈 받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얼마나 더 변명의 여지가 없도록 만드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율법만을 바라보면 우리는 실망과 혼동과 절망이 마음에 가득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정죄와 저주뿐이기 때문이다(갈3:10).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하는 그 복락의 상태에서 우리를 멀리 붙잡아 놓는 것이다.

옳고 바른 것에 대한 관심에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율법에 주어져 있는 무서운 위협을 접하게 하여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함으로써 그들을 억제 시키는 것이다.

비록 강제적인 억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그러한 의(義)는 사람의 공공사회를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다

율법은 육체에게 마치 게으른 나귀를 때리는 채찍과도 같아서, 육체를 일깨워 행하게 한다.

모세는, 율법이 죄인들 가운데서는 죽음 이외에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지만, 성도들 가운데서는 더 낫고 훨씬 탁월한 용도가 있다는 것을 훌륭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신32:46-47)

율법은 우리에게 완전한 삶을 권고함으로서 평생토록 우리가 열심히 지향하여야 할 목표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율법은 우리의 의무와도 일관성이 있으며, 또한 유익하기도 한 것이다.

주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중략)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중략)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고 증거하셨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이 오셨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는 일이 조금도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명확하게 확증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그는 오히려 율법을 범하는 것들을 치유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가르침이 그리스도로 폐지된 것이 아니다. 율법은 여전히 가르치고 권면하고 책망하고 교정함으로써 모든 선행을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이다.

율법에 끝없는 속박을 받아서 우리의 양심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짓눌려 있는 일이 없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동시에 언제나 변함없는 사실로 남아 있는 것이 있다. 곧 율법이 그 권위를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으므로 우리가 여전히 동일한 존경과 복종으로 율법을 대해야 된다“ 본문 中



 칼빈은 6장에서 중보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7장에서는 율법을 통해서 중보자이며 구원의 주체이신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구약백성을 옭아매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구원의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즉, 인류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렀으므로 구원이 필요하고, 율법은 구원의 주체이신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매개가 됨을 증거한다. 그는 율법의 목적에 대해서,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도덕적이며 의식적인 것, 인간은 완전히 지킬 수 없는 도덕적인 율법, 하나님의 의(義)와 인간의 죄를 밝히 드러내는 것, 행악자들과 불신자들을 억제하는 것, 신자들의 선행을 촉구하는 것, 양심의 해방과 함께 의식들과 관련하여 폐지된 것으로 자세히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집필자는 칼빈의 구속사적 율법관에 대해서 좀 더 체계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는데, 이 부분은 7장의 후반부에서 자세히 밝히도록 한다.

  칼빈은 율법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구속사를 진술한다. 즉, 타락한 인간은 율법을 통해서 소망이 없음을 깨달아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구원을 얻게 되며 그 후에는 도덕법을 통해서 교훈을 받음으로써 선행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구속의 과정에서 율법의 역할은 죄인임을 자각하게 하며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하고, 구원이후에는 선행의 규범과 표준으로 자리매김 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첫 번째,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도덕적이며 의식적인 것이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택한 백성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그들의 마음이 준비를 갖추도록 하고 그에 대한 간절한 열심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소망을 강건하게 하여, 그의 강림이 오래 지체되는 동안 낙망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율법’이라는 단어를, 비단 경건하고도 의로운 삶의 규범으로 제시된 십계명을 의미한 것만이 아니라,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전수하신 신앙의 형식을 의미한 것으로 이해한다. (중략) 하나님께서 희생 제사들을 명하신 것이 그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이 땅에 속한 복잡한 행위들로 바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더 높이 들어 올리시기 위함이었음을 바로 그 예표(豫表) 자체가 보여 주고 있다”

  칼빈의 주장을 정리하면, 율법은 택한 백성들에게 도덕적인 삶의 표준이며 희생 제사가 수반된 의식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또한 이것은 한층 더 영적으로 승화된 상태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예표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다음 단원에서 율법의 어떤 기능을 통해서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되는지를 밝히지만, 위의 인용구에서는 율법을 그리스도에게로 연결시키며 의식법의 제사형식 보다는 본질적인 예배에 중점을 둔 점은 극히 복음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십계명을 도덕적 규범으로 명시한 점은 추후 많은 신학적인 논란을 야기 시킨다.

  두 번째, 인간으로서는 도덕적인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칼빈은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소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율법이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사함을 구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도덕법으로 교훈 받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얼마나 더 변명의 여지가 없도록 만드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밝힌다. 그리고 “율법만을 바라보면 우리는 실망과 혼동과 절망이 마음에 가득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정죄와 저주뿐이기 때문이다(갈3:10).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하는 그 복락의 상태에서 우리를 멀리 붙잡아 놓는 것”이라는 설명으로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논증한다.

  그의 주장은 모든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며 결국 율법의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절박한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율법을 지켜서 의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단지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필요하며 요청된다는 점은, 마치 인간의 결함 때문에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부각되는 것처럼 판단될 수도 있다. 율법을 주신 근본적인 목적은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거나,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요구되는 것만은 아니다. 율법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약속한 것이며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려는데 있다. 예수께서도 당신이 오신 목적은 율법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며 그 율법이 자기를 가리켜 증거하고 있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 율법 앞에서 인간의 무능과 죄악의 발견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를 찾기 위한 직접적인 방법이며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율법은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세 번째, 율법의 기능은 정죄, 불신자의 범죄 억제와 선행을 위한 권고이다.
 칼빈은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인간을 정죄하는 수단과 불신자들에게 형벌의 두려움을 갖게 하여 죄를 억제시키고, 신자들에게는 훈계를 통해서 선행을 유도하는 매개라고 설명한다. 초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칼빈은 율법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기능에 있어서도 다분히 도덕적이며 사회적이다.

  첫째, 율법의 정죄기능을 명백히 한다. 칼빈은 율법이 지닌 정죄기능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의(義) -오직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의- 를 드러냄으로써 각 사람에게 그 자신의 불의(不義)에 대하여 경계하고 알리고 깨우치고 정죄하는 부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는 “의를 따를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사람이 불법의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결국 저주가 곧바로 뒤따라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법이 우리의 책임으로 규정하는 그 범죄가 크면 클수록 우리에게 가해지는 심판도 엄중해지는 법이”라고 규명한다. 칼빈의 말은, 율법의 기능은 인간의 죄를 지적하고 불의한 존재임을 알려준 다음 심판의 형벌을 가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주장은 정확한 판단으로 보이지만 편협(偏狹)된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율법의 범주를 규정할 때 도덕적인 관점에서 ‘계명’에만 국한된 경향을 나타낸다. 율법을 구분하는데 있어서도 계명(십계명)을 도덕법으로 레위기의 규례를 의식법으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하지만 이렇게 율법을 구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사료된다. 성경은 율법을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예수께서도 율법을 거론할 때는 모세오경이나 구약의 역사서 전체를 포괄해서 말씀하신 바 있다. 칼빈은 율법을 구분하는데 있어서 도덕법과 의식법(종교법) 그리고 국가법(사회법)으로 분류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구분방식은 율법을 유기적이며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하며, 단편적이고 부분적으로 단정하게 한다. 율법의 계명, 율례, 규례는 하나의 범주로서 상호간에 긴밀한 통일을 이루고 있다. 칼빈의 주장처럼 계명은 도덕적, 율례는 사회적, 규례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분류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의 계명과 율례와 규례는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하려는 계시적인 관점에서 유기적으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율법에 대한 칼빈의 구분법은 율법의 기능을 규정하는데 있어서도 정죄 부분만을 단편적으로 취급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사회법(율례)과 종교법(규례)은 그리스도로 완성되었지만, 도덕법만은 저주의 형벌이 폐기되었으나, 성도들의 행동규범이 된다는 것은 무리한 설정으로 보인다.

  성경은 율법을 계명과 율례 그리고 규례와 법도로 엄연히 구분한다. 계명은 율례와 규례의 모법(母法)으로서 본보기나 근원이 되며 부령(部令)이나 시행령 등의 근거가 되는 법률이다. 율례는 계명을 근거로 한 세밀한 조항으로서 심판과 판결의 기준이며 배상을 원칙으로 한다. 규례는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서 성막과 예물 그리고 제사장과 백성들의 성화에 관한 법이다. 법도는 유교에서 제사상을 차릴 때 홍동백서(紅東白西)의 규칙으로 실행하는 것과 같이 계명, 율례, 규례를 실행하는 법칙이나 원칙 또는 규칙을 뜻한다.

  이와 같이 율법은 계명, 율례, 규례, 법도를 총칭하는 용어로서 도덕적이나 사회적인 범주를 초월한 종교적이며 계시적인 독특한 성질을 갖고 있다. 율법은 시대의 사상과 문화에 편승되거나 국가나 사회질서의 안녕을 위한 보편적인 법 개념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이며 그리스도를 언약하고 있는 독창적이며 신학적인 법 개념이다. 그래서 율법의 근본정신은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철칙으로 한다.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법이 없는 곳은 없기 때문에 모든 나라는 법치국가로 존립한다. 모세의 율법보다 오백여년 전에 고대근동의 히타이트 족속들이 사용했던 함무라비 법전도 모세의 것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켜주고,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유일한 성문계시이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고 완성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의 심비에 각인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법으로 존립한다.

  율법을 성경대로 계명, 율례, 규례로 구분하게 되면 기능적인 면에서도 편협되지 않고 균형 있게 종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계명은 정죄기능이 있으며 율례는 심판하는 정죄기능과 배상을 통한 사죄기능이 혼용되어 있고, 규례는 제사를 통한 사죄기능이 확립되어 있다. 그런데 칼빈은 계명의 정죄 기능만을 강조함으로써 율법은 정죄와 심판과 공의이고, 복음은 사죄와 은총과 사랑이란 이원론적 도식으로 고착되게 된다. 율법에는 정죄기능뿐만 아니라 사죄기능이 공존한다. 율법에 정죄 기능만이 작용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이미 몰사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율법을 망각하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을 때는 징계를 통해서 깨닫게 하고, 제사규례를 통해서 용서하신다. 이와 같이 정죄와 사죄의 기능을 겸비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정죄 받아 죽으시고 자기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실 것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인 것이다.

  둘째, 율법의 기능을 불신자의 범죄억제를 위한 도구로 설명한다. 칼빈은 악인과 불신자의 범죄에 대한 억제는 “옳고 바른 것에 대한 관심에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율법에 주어져 있는 무서운 위협을 접하게 하여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함으로써 그들을 억제 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비록 강제적인 억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그러한 의(義)는 사람의 공공사회를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즉 율법이 형벌에 대한 두려움 조성과 공공사회의 공익(共益)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율법을 도덕적인 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부도덕한 사람들에게 위협적으로 적용시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일반적인 법리로 해석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불신자의 삶과 사회 질서는 율법이 아니라도 국법에 의해서 유지된다. 굳이 그리스도의 언약과 성취의 요소이며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계시적 차원의 율법을, 불신자를 위협하는 것과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활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칼빈은 교회가 사회를 정화해야 되며 나아가서 사회 전체를 복음화해야 된다는 도덕적인 신앙관이 작용한 것 같다. 한때 그는 제네바 시 전체를 복음의 도시로 조성하려는 계획을 갖고 열심히 활동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던 적이 있다. 하지만 복음은 양면성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빌1:28)라는 바울의 말대로, 어느 도시나 국가를 막론하고 멸망과 구원은 공존한다. 굳이 불신자들을 협박하는 논조로 전도한다는 것은 비신사적인 행동이다. 물론 전도의 방법에 속하는 사항이지만, 전도는 수용여부에 자유롭게 복음의 주체인 그리스도만 증거하면 된다.

  셋째, 칼빈은 성도들의 선행(善行)을 위해서 율법의 기능을 정당화한다. 칼빈은 성도들의 선한 생활을 위해서는 “율법은 육체에게 마치 게으른 나귀를 때리는 채찍과도 같아서, 육체를 일깨워 행하게 한다.”라고 밝히면서 “율법은 우리에게 완전한 삶을 권고함으로서 평생토록 우리가 열심히 지향하여야 할 목표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율법은 우리의 의무와도 일관성이 있으며”라는 말로써 필요성을 강조한다. 칼빈은 율법이 성도들의 마음 판에 이미 각인되어 있지만, 지속적인 교훈과 권고를 통해서 선행(善行)을 독려하고, 율법을 평생의 목표로 삼아 완전한 삶을 살아야 된다고 설명한다. 칼빈은 이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로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신32:46-47)라는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율법의 항구성(恒久性)을 밝힌다. 하지만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는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경외하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고,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계시하기 위해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의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여 완성하실 모형적인 예표로서의 율법임을 명시한 것이 된다.

  칼빈의 주장은, 율법이 성도생활의 규범이 된다는 의미이며 그렇기 때문에 지속적인 율법교육과 함께 형벌의 두려움을 유발시켜서라도 행동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해석이다. 칼빈의 견해는 강압적이며 위협적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성도의 행동을 선행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강박이 엿보인다.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방식은 복음적인 교육방법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상도생활의 원리와도 상충된다. 이런 칼빈의 통속적이고 경직된 율법관으로 인해 당시에 간음죄, 혹은 칼빈 모독죄, 삼위일체 부인(否認)죄 등을 이유로 76명을 귀향 보냈고 58을 처형시켰다고 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성취사역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어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다. 어느 누구도 성도를 율법으로 정죄하거나 판단하고 심판할 수 없으며 율법의 행위를 강요해서는 안된다. 만약 율법을 범해서 죄가 된다면 율법을 지키면 의가 되겠는가 반문하고 싶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이지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도구이지, 상도생활의 표준이 아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며 그리스도의 성취를 통해서 여호와의 존재를 입증하는 단서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영원한 속죄를 받은 자들이며 누구에게라도 정죄 받을 수 없다.

  선한 생활을 위해서 율법으로 위협과 협박을 가하거나 강요당한다면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에서 이탈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성도의 생활은 율법으로 성취된 그리스도를 깨달아 확증하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는 만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인식의 결과이다. 이 과정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만큼 경외하는 삶의 결과로 나타나며,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이해하면 된다.(요15:5) 성도의 성숙은 반복적인 훈련이나 상벌의 기준 또는 규범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조성되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선한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동한 농도만큼, 진리를 깨닫고, 부여되는 가치의 비중만큼 사명으로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네 번째, 율법의 시효는 영속(永續)과 폐지이다.

  칼빈은 율법을 도덕법과 의식법으로 분류한 바 있는데, 도덕법은 폐기되지 않고 항구적이나 의식법은 그리스도의 성취로 철폐되었음을 주장한다. 칼빈은 이러한 견해의 당위성에 대해서 성경을 근거로 정리하고 있다.

“주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중략)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고 증거하셨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이 오셨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는 일이 조금도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명확하게 확증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그는 오히려 율법을 범하는 것들을 치유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가르침이 그리스도로 폐지된 것이 아니다. 율법은 여전히 가르치고 권면하고 책망하고 교정함으로써 모든 선행을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이다”

  칼빈은 위의 글에서, 예수께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러 오셨기 때문에 우리들의 선행을 위해서 더욱 확고하게 세워지고 존속해야 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완전하게”라는 말은 헬라어 ‘플레로오(plhrovw)’인데, 이는 ‘채우다’ ‘충만하다’ ‘완성하다’ ‘이행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이다. 본문에서는 문맥상으로 보아 ‘성취하다’라는 용어가 적절하다. 성경의 구조상으로 보더라도 구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 역시 율법과 선지자로 대변되는 구약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예수께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예언하신 말씀은, 세상 종말이 오기 전에 율법의 가장 작은 문자 하나까지라도 지나치지 아니하고 전체를 성취하겠다는 뜻이다. 즉, 이 말은 구약의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도 빠짐없이 약속대로 지켜서 성취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모든 율법을 다 지켰으니 성도들도 그와 같이 다 지켜야 된다는 해석은 논리의 비약이다. 구약은 성도들의 생활규범이나 행동양식을 제시하는 지침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서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약속하고 있는 계시적인 내용이지, 성도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교훈서가 아니다. 마치 오존층이 없으면 자외선이 직접 투과되어 사람에게 치명적인 질병을 유발시키는 것처럼,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한 여과장치 없이 성도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하면 한 사람도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 했는데, 누가 율법을 지킬 수 있겠는가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오실 필요도 없으며 율법의 저주를 속량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당시 율법을 지켜서 의인되고자 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엄중히 책망하셨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외에 아무도 율법을 지켜서 의인될 수 없다는 사실과,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언약의 근거가 됨을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성취의 근거로서의 율법을 도덕적인 규범으로 단정했고, 그리스도만이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성도에게 직접 적용함으로써 율법의 본질을 왜곡한 것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도덕법은 더 강화되어 성도생활의 규범이며 표준이 되었지만, 의식법의 사용은 폐지되었다고 주장한다. 의식법은 “그 효과는 폐하여지지 않았으나 그 사용이 폐지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것들을 종결지으셨으나, 그것들의 신성함은 손상시키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셨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의식법의 효과인 속죄는 영속적이지만 제도적인 사용은 폐지되었음을 의미하는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의 계명(도덕법)과 율례(국가법) 그리고 규례(의식법)를 하나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못하고, 도덕과 의식으로 분류함으로써 부분적인 폐지만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요19:30)라는 말씀과 성소 휘장이 반으로 찢어진 사건은(마27:51) 구약의 율법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휘장은 제사규례와 관련된 의식법으로 판단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 사용하신 율법의 개념은 도덕법이나 의식법으로 분류하여 제한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이에 대해 박용기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헬라어로 ‘노모스(novmo")’라고 하는데,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정하신 뜻으로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을 포함한 구약 전체를 총칭한 말이다. 예수께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고 예언하신 바가 있다. 구약은 여호와께서 첫 아담에게 세우신 언약을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해주실 것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의해 언약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여호와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에 근거한 언약의 말씀인데, 이를 가리켜 예수께서 “율법”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 언급하신 율법의 범주는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역사서 전체를 함의한다고 볼 수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준 것이며 그 뜻은 계명과 율례와 규례로 세분화 된 것뿐만 아니라 모세오경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증거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율법은 하나님의 뜻에 기초한 하나님의 언약이고, 언약의 성취역사로 기록된 역사(歷史)이다. 시가서는 언약성취 섭리역사에 기초한 찬양이고, 선지서는 언약성취의 역사 선상에서 나타난 선지자의 예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기 위해서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기초로 해서 모세오경과 역사서 그리고 시가서와 선지서 모두가 하나의 의미로 체계화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진 구약성경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기 때문에 구약은 그리스도를 언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부여하실 때에도 도덕법과 의식법을 각기 다른 차원에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의미로 주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인 사례로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출20:1)를 근거로 살펴보면,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주실 때 처음 선포하신 문구인데, 어원적으로는 율법을 총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히브리어 에레인데, 지시대명사로서 복수로 사용되며 ‘이것들’을 의미한다. ‘모든’은 히브리어 콜인데, 모두, 전체, 완전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모든’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이 계명(출20:2~26), 율례(출21:~23:), 규례(출24:~레위기)의 한 분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총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운명하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요19:30)는 말씀의 의미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24:44)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구약 전체의 언약을 성취하신 것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칼빈은 동일한 구절을 인용하면서도 도덕법은 “그 권위를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으므로 우리가 여전히 동일한 존경과 복종으로 율법을 대해야 된다.”라는 말로써 강화시키고 있다. 물론 신약의 히브리서는 구약의 규례를 부각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복음서, 로마서, 갈라디아서에서는 계명, 율례, 규례를 총칭할 뿐만 아니라 모세오경과 나아가서 역사서 전체를 함의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성취)하러 오심을 천명했고(마5:17~20), 연이어서 계명(5:21~48)과 율례(6:~7:)를 자세히 거론하시고, 최종적으로는 제물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규례(26:~28:)를 증거하셨다. 이러한 맥락에서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다”(눅24:44)라는 말은 예수의 사역이 총체적인 것을 의미한다. 즉, 구약성경이 그리스도 때문에 기록된 것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반드시 성취되어져야 된다는 것임을 확고히 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취사역은 도덕법이나 의식법의 한 분야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함의한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제2권 제8장 십계명에 대한 해설
제2권 제6장 중보자 그리스도의 필요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