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제2권 제 9 장 율법과 복음의 관계
하나님께서 창세 이후 그의 특별한 백성으로 취하신 모든 사람들은 우리와 동일한 조건과 동일한 도리 아래에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으로 받아 들여졌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점을 확실히 해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유사점과 차이점은 한 마디로 설명할 수가 있다. 모든 족장들과 맺으신 언약은 그 본질과 실체에 있어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과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에, 그 두 언약들은 그 시행의 양상이 다를 뿐, 실제로는 하나요 동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중략) 첫째, 육신적인 번영과 행복은 유대인들이 사모해야 할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불멸의 생명에 대한 소망에로 받아들여졌고, 이러한 사실에 대한 확신이 계시의 말씀과 율법과 선지자의 글들을 통해서 보증 되었던 것이다. 둘째, 그들을 여호와와 결속시켜준 그 언약은 그들 자신의 행위의 공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통해서 뒷받침되었다는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고, 그를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결속되고 또한 그의 약속들을 함께 소유했다는 것이다.
복음은 분명 사람들의 마음을 현세에서 즐거움을 찾는 데에만 가두어두지 않고, 그 마음을 높이 들어 올려서 불멸의 생명을 소망하는 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호와께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리셨을 때에 그저 백성들의 배만 채우고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생명을 얻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하나의 신령한 신비로서 그것을 내리신 것임을 알고 있었다(고전 10:1~5). (중략) 주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우리가 지금 누리는 것과 동일한 영원한 하늘의 생명의 약속들을 전해주셨을 뿐 아니라, 그 약속들을 진정한 영적 성례들로써 인치셨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신 한, 우리에게는 모든 풍성한 선한 일과 또한 구원에 대한 확신에 전혀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구약의 조상들이 (1) 그리스도를 그들의 언약의 보증으로 삼았다는 것과, (2) 미래의 축복에 대한 모든 소망을 그리스도 안에 두었다는 것이다.
본문존 칼빈, 『기독교강요』(상),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p. 527~551.
中
칼빈은 본 장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구약의 이해방식을 표명하고, 신구약성경에 나타난 계시방식의 차이점과 탁월성을 규명한다. 그리고 신약의 신자들에게도 율법을 준수해야 된다는 당위성과 율법의 공로와 복음의 은혜에 대해서 논한다.
첫째, 신구약성경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방법상의 차이에 대해서, 구약에서는 “그 옛날 하나님께서 속죄와 희생 제사들을 통해서 자신이 아버지이심을 증거하시며 또한 자신을 위하여 택한 백성을 구별하고자 하신 것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옛날에도 지금 우리에게 충만히 나타나시는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알려지신 것이 분명하다.”Ibid. p. 520.
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경건한 자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비치는 그 지식과 빛의 교제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몫과 우리의 몫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그는 그들이 희미하게 윤곽만을 얼핏 보고 지나간 그 신비들이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Ibid. p. 521.
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의 농도가 구약보다는 신약이 훨씬 선명하다고 밝힌다. 물론 칼빈의 주장대로 구약을 모형으로, 신약을 실체로 접근한다는 것은 타당한 방식이다.
하지만 신구약성경의 선명성에 대한 차이에서 유념할 점은 신구약의 가치에 차등을 두는 것이 아니라 구조이해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신구약성경의 내용을 전개하는 방법에 있어서 구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며, 신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모형과 실체의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보면, 모형은 “형태상으로는 크기, 규모 등의 양식(樣式)을 뜻하며, 성질상으로는 실재(實在)에 대한 모조품 또는 모델이나 견본의 물체나 사실을 말한다. 자세히 말하면, 구약의 성전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모형이며, 구약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대한 모형이고, 노아시대의 홍수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모형임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형은 현세적인 것들을 통하여 증거된다. 즉 현세적인 것이란 현상적인 것이며 육체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형은 실체에 대한 그림자이며, 언약이 전제된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내용을 담고 있다. 구약을 모형으로 규정한 이유는 첫째, 구약계시 내용의 전달방식이며히 1:1∼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 둘째, 현세적·현상적·한시적인 것이고, 셋째,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김승일, 『성경해석의 기초』, (진리의 말씀사, 2004), p. 118.
이와 같이 구약은 신약에 대해서 모형적으로 계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실체(實體)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신약의 방식으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증거하는 것이며, 계시의 본질인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성격상으로는 현세적인 아닌 신령적인 것이며, 현상적인 것이 아닌 본질적인 것이고, 한시적이 아닌 영원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신령적이고 본질적이며 영원한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Ibid. p. 126.
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구약의 모형적인 계시와 신약의 실체적인 계시로써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선명성을 따지자면 내용전개의 방법상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신구약성경 중에 어떤 것이 더 우월하고 열등한 차이는 없다.
둘째, 복음의 탁월성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명확히 드러낸다”존 칼빈, 『기독교강요』(상),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 522.
라고 말하며, 신비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육체 가운데서 우리의 구원의 모든 것을 이루셨으므로, 그 실체를 생생하게 드러내 주는 것”Ibid. p. 523.
이라고 규정한다. 칼빈은 구약에서는 그리스도를 모형적으로 증거했으나, 신약에서는 실제적으로 강림하셔서 구원을 실체적으로 성취하셨으므로 복음이 율법보다 탁월하다고 말한다.
칼빈의 주장대로 복음의 탁월성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으나, 율법과 복음의 상관관계는 성경신학적인 이해가 필요해 보인다. 율법(律法)은 사전적으로는 법도, 법률(law)을 가리키며, 종교적·도덕적·사회적 생활에 관하여는 신(神)의 이름으로 규정된 법규(commandment, 출13:9)를 말한다.토라(הדוח)의 어의 : 동사 야라(הדו)에서 파생된 지시 또는 안내를 의미하며 이것이 쏘다, 던지다 가르치다, 훈계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약의 용법은 제사장이나 예언자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께 구하여 얻어진 충고나 정관사나 고유명사(여호와, 엘로힘, 모세)와 함께 쓰여 이스라엘에 있는 가르침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종교적 계율로서 “복음의 모형”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 말은 율법은 복음의 모형(模型)이며 복음은 율법의 실체(實體)라는 상호 유기적 관계에서 하나의 의미이다.
율법과 복음에 대한 보편적인 견해는 율법과 복음이 서로 상반된 것으로서 율법은 정죄하는 것이며 복음은 은혜로운 것으로 이해하여 왔었다. 그래서 율법시대나 복음시대 또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상반된 개념으로 구분하기도 하며, 어떤 학자들은 예수와 바울의 율법관이 상호 충돌한다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예수의 율법관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는 말씀에 근거해서 율법을 더욱 완고하게 지켜야 된다고 판단하고, 바울의 율법관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3:10)라는 말씀대로 율법을 지키려는 자들은 저주받게 될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수와 바울의 율법관은 동일한 맥락이다. 예수께서는 율법은 당신이 성취하실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고,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가 지불되었으며, 이제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이 됨으로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 말한 것이다.
하지만 율법은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복음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로써히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동일한 의미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형적인 율법은 실체인 복음에 대한 그림자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며 그리스도 자체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전개방법상에 있어서 현세적이며 통속적이고 세속적인 방식을 취한다는 차이점이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했을 때 계명으로 정죄하고 그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서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리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시고 그 피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얻게 하기 위한 것에 대한 모형인 것이다. 현 시점에서 모형적인 구약의 사건을 본다면 무속적이며 샤머니즘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구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적인 약속이며, 신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실체적인 성취로서 동일한 맥락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율법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계시의 방편이며,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模型)적인 예표로서의 약속이라 정의 할 수 있다.
복음은 헬라어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인데 ‘기쁜 소식(good news)’ 또는 ‘복음(gospel)’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의미적으로 정리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전해지는 복된 소식이다. 그 내용은 창세전부터 작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을요 6:38~39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인류의 시조인 아담에게 언약하시고(창1:28),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롬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눅 24:27, 요5:39, 히1:1~2).
하신 것을 말한다. 칼빈의 말대로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이시며 실체적인 계시의 절정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실체적인 사역을 구속사역에만 한정시킨다면 계시의 농도와 하나님의 의도가 약화될 소지가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구속사를 포괄한 총체적인 범주에서 설명한다. 즉, 자신의 사역은 율법과 선지자의 언약을 성취하러 온 것임을 밝히고, 나아가서는 구약 성경 전체가 당신의 사역을 통해서 성취될 것에 대한 언약의 내용인 것을 증거한 바 있다.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와 같이 구약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구원에 대한 부분적인 약속이기보다는, 아담과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3대 언약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총체적으로 성취하실 것을 언약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첫 아담과 세우신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첫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신 둘째 아담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러 오셨으며, 그 뜻은 구약성경 전체에 언약하신 것이고, 언약의 내용인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러 오신 것임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의 구속은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한 수단에 속하는 것으로서 약속된 천국백성의 번성을 통한 그리스도 성취가 근본 목적이 되어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복음의 탁월성은 구약에서 언약하신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언약을 성취하신 것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이 신약보다 열등하다고 판단하면 곤란하다. 성경의 권위는 동등하며, 단지 약속의 대상이신 그리스도께서 약속대로 오셔서 실체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구약의 언약 없이 신약의 성취가 무의미하며, 근거 없는 결과도 신빙성의 가치를 퇴락시킬 것이다.
셋째, 신약의 신자들에게도 율법을 준수해야 된다는 당위성에 대해서, 칼빈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자신과 우리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세르베투스의 이론을 마귀적인 상상으로 일축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영적인 은혜들을 충만히 베푸시지만, 그것들을 온전히 누리는 일은, 우리가 썩어질 육체를 벗고 우리보다 먼저 가신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변화될 때까지, 소망의 보호 아래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때가 오기까지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약속들을 의지하라고 명령하시니”존 칼빈, 『기독교강요』(상),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p. 523~524.
라고 반박한다. 칼빈의 주장은 복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하더라도 온전한 그리스도인 된 것이 아니라 육체의 옷을 벗을 때까지는 약속들을 의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논점은 ‘약속’인데, 칼빈은 이에 대해 “율법은 그림자들로써 예표 하였으나, 복음은 그것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준다”Ibid. p. 524.
라고 설명함으로써 신약의 성도들도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논점은 모형으로서의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율법이 모형이란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실체적으로 성취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며 근거인 것이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단서이며 근거가 된다는 뜻이지 성도들의 생활규범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약의 성도들은 율법의 계명(도덕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게 된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롬8:2)이라는 바울의 말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새 생명을 얻고, 자유인이 된 것임을 뜻한다. 자유인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성숙된 신앙만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을 가리키고, 사랑의 법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자들에게만 공급되는 생명의 말씀에 의해서 작용하며 실현되는 것이다.
복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율법의 요구에서 벗어났으며,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이고, 율법의 요구도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신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3~6.
바울의 말은, 하나님께서 육신으로는 죄를 범할 수밖에 없으나, 죄의 법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고,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한 몸 되게 해 주셨고, 의롭다고 인정해주셨으므로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무력해서 지킬 수 없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영을 좇아 행하는 성도들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사망에서 해방시켜 주셨음을 밝혀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한번 내린 판결에 대해서 재심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망선고를 받은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의 대가를 지불하게 하심으로서 무죄선고를 내린 것이다. 이 선고(宣告)는 판결한 죄과에 대해서 다시 심판하지 않는 영원한 효능을 지닌다. 그래서 한번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판결 받은 성도들은 비록 죄인이지만 그 죄과를 다시 묻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법은 불변적인 약속의 원칙이 적용되어 어떠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사회법은 범죄를 행할 때마다 법정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효능은 한 번의 사역과 판결 통해서 영원히 존속하며, 불변하다는데 주목해야 한다(히9:11~12).
넷째, 칼빈은 율법은 행위의 공로를 치하하고, 복음은 은혜의 의(義)를 강조함으로써 양자 간의 대비가 존재하지만, 율법과 복음을 과장해서 이해하는 것은 조심해야 된다고 말했다. 칼빈은 바울을 인용하면서 율법과 복음이 대치관계를 구성하고 있으나, 오히려 복음은 율법의 실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함을 밝힌다.
율법이라는 용어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것으로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 -거기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으면 삶의 소망의 여지를 주시지 않고, 조금이라도 거기에서 어긋나면 우리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바- 의로운 삶의 규범을 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에 복종하면 상급이 약속되어 있으나 거기에 해당되는 자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값없이 그에게 받아들여지며, 그의 용서하심을 받아 의로운 자로 인정된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율법을 그런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바울은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롬3:21, 갈3:10이하). 그러나 복음이 율법을 대치한 것은 사실이나, 전혀 다른 구원의 길을 제시할 만큼 그렇게 율법을 전적으로 폐지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율법이 약속했던 모든 것들을 확증하고 만족시켰으며, 그림자에게 실체를 제시한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강요』,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p. 524~525.
칼빈은 율법을 인간의 행위와 관련지어 설명한 반면,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중심으로 설명함으로써 상호 대비적인 관계에 있음을 밝히지만, 대비적인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서 구원의 길마저도 다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복음은 율법의 약속들을 더욱 명료하게 실체적으로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칼빈의 의도는 충분이 이해가 되고, 복음의 선명성에 대한 확고한 의지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지지한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좀 더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율법과 복음은 모형과 실체라는 관점에서는 대비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공로와 은혜의 개념에서 대비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문제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만약 율법과 복음을 공로와 은혜의 맥락에서 접근한다면, 율법은 공로주의를 양산하게 되며 인간의 생활을 위한 규범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율법은 율법을 성취하실 그리스도를 언약한 것이며, 율법 안에도 정죄(계명과 율례)와 사죄(율례와 규례)가 공존해 있는 은혜의 방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을 공로와 은혜의 구도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모형과 실체로 접근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중심적으로 한 것이라 판단된다.
지금까지의 논거에서 보면, 칼빈은 구약의 율법에서 그리스도를 조망하기 위한 복음적인 관점에서 접근했으며, 계시내용의 전개방법상에 있어서 모형과 실체의 구도 속에서 복음의 탁월성을 천명했다. 칼빈의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관은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성경을 승인하고, 전승에 의해서 권위를 부여하며, 교황 및 지도자들의 은유적인 해석이 빈번하던 시대에 신선한 충격파가 되었다. 다만 구약의 율법관에 대한 복음적인 이해가 철저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칼빈의 율법관에 대한 부분적인 오류는 개혁주의 교회로 하여금 율법주의자들을 양산하는데 일조했다고 본다. 율법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이며,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성취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에만 그 목적이 있음을 확고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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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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