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제2권 제 11 장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
구약과 신약이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도 인정하고, 또 그 점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이미 분명히 제시한 성경의 통일성이 손상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중략) 차이점들은 모두가 본질의 차이가 아니라 시행 방식의 차이에 관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의 약속들이 동일하며, 또한 둘 다 그리스도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로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 땅에 속한 혜택 등을 통해서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고 맛보도록 그렇게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복음이 미래의 생명은 은혜를 더욱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드러내었으므로, 주께서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용하셨던 그런 저급한 훈련 방식을 물리시고, 그 은혜를 직접 묵상하도록 우리의 생각을 이끄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신자들을 향한 그의 자비하심을 이 땅의 좋은 것들로써 입증하시고 그런 모형과 상징들을 통해서 영적 행복을 예표하셨고, 또한 그와 반대로, 악인들에 대하여 장차 있을 그의 심판을 육체적인 형벌들을 통해서 입증하셨다.
구약은 실체가 없고 다만 실체의 형상과 그림자를 보여준 것뿐이었으나, 신약은 진리의 실체 그 자체를 계시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이란 의식들과 희생 제사들에 포함된 그 언약을 확증하는 엄숙한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방식 이면에까지 나아가지 않는 이상 거기에는 본질적인 내용이 없으므로, 사도는 그 방식이 종결되고 폐지되어, 더 나은 언약의 중보자시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 자리를 내어주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참조 히7:22).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언약에 근거하여 택한 자들을 단번에 거룩하게 하시며, 율법 아래 남아 있던 그들의 범죄를 도말하시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것들은 언젠가는 명확히 드러나게 될 그 지혜를 미리 맛보게 해 주었고, 멀리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것을 가리켜 준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손가락으로 지적해 줄 수 있게 될 때가 되자, 그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활짝 열린 것이다.
사도는 이 말씀을 근거로 삼아 율법과 복음을 서로 비교하면서, 율법은 조문(條文)으로 된 것이요 복음은 영(靈)으로 된 것이며, 율법은 돌판에 쓴 것이요 복음은 사람의 마음 판에 쓴 것이며, 율법은 죽음을 전하는 것이요 복음은 생명을 전하는 것이며, 율법은 정죄에 속하는 것이요 복음은 의(義)에 속한 것이며, 율법은 없어질 것이요 복음은 길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한다(고후3:6~11).
구약이 조문에 속하는 것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 공포되었기 때문이다. 신약이 영으로 된 것은 주께서 그 언약을 사람의 마음에 영적으로 새겨 놓으셨기 때문이다(고후3:6). 두 번째 비교점은 첫 번째 것을 좀 더 명확하게 해 준다. 구약이 죽음을 가져오는 것은, 그것이 온 인류를 저주에 쌓이게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약이 생명을 주는 도구인 것은, 그것이 사람들을 저주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은혜에로 회복시키기 때문이다(고후3:6). 구약이 정죄의 직분인 것은, 그것이 아담의 모든 자손들을 불의한 자들로 정죄하기 때문이다. 신약이 의의 직분인 것은, 그것이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고후3:9). 마지막 비교점은 의식법에 관계되는 것이다. 구약이 없어질 것들의 형상을 담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시간이 되면 죽고 없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고후3:10~11).
구약은 양심을 두려움과 떨림에 빠지게 하나, 신약의 은혜로 말미암아 양심이 해방되어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구약은 종노릇의 멍에로 양심을 매여 놓으나, 신약의 자유케 하는 영으로 말미암아 양심을 해방시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존귀함을 받았으나, 다른 이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그러나 만물의 회복을 위하여 지정된 “때가 차매”(갈4: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을 서로 화목시키는 자로서 나타나셨고, 오랫동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스라엘의 경계 내에 가두어 두었던 “담”을 헐어버리셨다(엡2:14). 그가 “먼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셔서”(엡2:17) 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한 백성으로 화하게 하셨다(엡2:16).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연령에 맞도록 그들에게 초보적인 가르침만을 주셨고, 우리는 더 확고한, 말하자면 좀 더 남자다운 훈련 과정으로 우리를 교육시키셨다는 사실이 과연 무엇이 이치에 맞지 않는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마다 동일한 도리를 가르치셨고 처음부터 명하신 대로 그의 이름에게 동일한 예배를 계속해서 요구하셨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시종여일하심이 찬란하게 드러난다.
칼빈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성경에 나타난 축복의 의미를 현세적인 것과 영적인 것으로 구분했다. 구약은 보이는 형상과 의식과 문자적인 것으로 정리한 반면 신약은 영적이며 실체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구약은 율법이며 신약은 복음으로 규정하고, 구약의 노예 상태와 신약의 자유인(自由人)의 상태로 분류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대상에 따라서는, 구약은 유대인 한 민족을 중심으로 섭리하시고, 신약에서는 모든 민족을 다스리신다고 설명함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피력한다. 하지만 칼빈은 신구약성경의 차이점을 논증함에 있어, 성경의 통일성이 손상되어서는 안되며 차이가 있다면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시행방식에 있으며, 약속의 토대가 그리스도라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Ibid. p. 552.
첫째, 축복의 의미에 대한 차이점에 대해서 구약은 “이 땅에 속한 혜택 등을 통해서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고 맛보도록 그렇게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복음이 미래의 생명은 은혜를 더욱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드러내었으므로, 주께서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용하셨던 그런 저급한 훈련 방식을 물리시고, 그 은혜를 직접 묵상하도록 우리의 생각을 이끄시는 것”Ibid. p. 552.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자들을 향한 그의 자비하심을 이 땅의 좋은 것들로써 입증하시고 그런 모형과 상징들을 통해서 영적 행복을 예표하셨고, 또한 그와 반대로, 악인들에 대하여 장차 있을 그의 심판을 육체적인 형벌들을 통해서 입증하셨다”Ibid. p. 555.
라고 밝힌다.
칼빈의 주장을 정리하면, 구약의 축복과 저주는 현세적인 것들을 통해서 주어진 저급한 방식이지만, 이것은 신약의 신령적인 축복과 저주에 대한 모형과 상징임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구약의 축복은(창12:1~2) 현세의 가나안 땅이며, 실제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큰 민족이 형성되어 진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가 이 땅위에 세워지고 확장되어 질 실체에 대한 모형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와 같이 구약을 모형으로, 신약을 실체로 규정한 다음 현세적인 것과 신령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해석한다. 이 점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관건이다. 성경해석은 칼빈의 주장과 동일한 원칙에 입각해서 해석해야만 신구약 성경의 관점과 목적에 위배되지 않으며, 구약의 적용에 있어서도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된다.
흔히들 구약성경의 내용을 현시대의 상황이나 성도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사례가 있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 말하는 복(福)의 개념을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신령적인 복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현세적인 축복으로 직역하거나, 창세기 1장 28절의 축복을 문화명령으로 인지하여 현세에서의 자손번창과 많은 땅의 보유와 권세를 얻는 것으로 오용하기도 한다. 더욱이 구약의 제물을 현재의 물질(헌금)로, 구약의 성전(聖殿)과 현금의 교회당을 동일시하고, 제사장을 목사로 대입해서 해석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다.
둘째,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방식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구약은 실체가 없고 다만 실체의 형상과 그림자를 보여준 것뿐이었으나, 신약은 진리의 실체 그 자체를 계시해 주고 있다”Ibid. p. 556.
라고 말한다. 칼빈은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구약이란 의식들과 희생 제사들에 포함된 그 언약을 확증하는 엄숙한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방식 이면에까지 나아가지 않는 이상 거기에는 본질적인 내용이 없으므로, 사도는 그 방식이 종결되고 폐지되어”Ibid. p. 557.
라고 진술한다. 그리고 “율법과 선지자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것들은 언젠가는 명확히 드러나게 될 그 지혜를 미리 맛보게 해 주었고, 멀리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것을 가리켜 준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손가락으로 지적해 줄 수 있게 될 때가 되자, 그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활짝 열린 것”Ibid. p. 558.
이라고 밝힌다.
칼빈의 주장은 구약은 실체에 대한 모형으로서 형상과 그림자를 보여준 것이며 신약은 진리의 실체 자체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서(7:~10:)를 인용하여 제사장의 제도가 변했음으로 폐지되어져야 함을 증거하고, 구약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될 언약을 의식과 제사로서 확인하는 방법인 것으로 정리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제사는 인간 제사장에 의해서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모형적이고 그림자적인 것이라면, 신약의 제사는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기의 생명을 제물로 드리는 실체적인 것임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칼빈은 구약제사와 신약제사의 차이점을 모형과 실체로 명백히 구분하였고, 구약의 제사제도는 실체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으므로 폐지되어져야 하며,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의 사역은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임을 확고히 밝혔다.
칼빈은 구약과 신약을 약속과 성취의 맥락에서 이해했으며, 모형과 실체의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복음주의의 전형이다. 특히 구약을 실체에 대한 모형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점은 해석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극히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모형론적인 해석방법처럼 어느 한 가지 단편적인 사건이나 구절을 신약과 대비해서 사안별로 처리하여 짝을 맞추려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구약의 율법과 시와 선지서 전체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 그리스도 말미암아 총체적으로 성취될 내용이기 때문에 구약 전체를 포괄해서 접근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특정한 사건이나 직접적으로 표현된 문구가 아닌 경우에는 해석상의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칼빈의 논거에서 보면 약간의 아쉬움이 있는데, 그의 주장대로 구약전체를 실체의 성취에 대한 모형으로 규정한다면, 구약의 의식과 제사제도만이 그리스도로 성취된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임을 밝혀야 될 것이다. 즉, 예수께서 구약성경을 다 이루었다는(눅24:44, 요19:30) 말씀의 진의는 구약의 제사제도 뿐만 아니라 구약전체를 통해서 약속된 모든 내용을 성취하셨다는 뜻이다. 구약성경에 증거된 약속내용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 나라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성취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역을 완수하기 위해서 구약의 제사와 제사장의 직무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을 총체적으로 성취하셨으며, 구약의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고, 기름부음 받은 선지자, 왕, 제시장의 직무를 종합적으로 완수하신 것이다. 그런데 칼빈은 구약의 의식과 제사제도만을 부각시키며 제사법(종교법)만이 폐지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은 구약의 율법을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으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칼빈은 7장에서 율법을 도덕법, 의식법, 사회법으로 분류하여 의식법과 사회법은 그리스도로 성취되어 폐하여졌으나 도덕법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밝힌바 있다. 구약성경은 39권 전체가 하나의 맥락에서 단일 목적과 단일 의미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신약과 대입시키거나 판단해서는 안된다. 구약의 해석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원리에 의하여 모형적인 관점에서 풀어나가야 함을 원칙으로 해야 할 것이다.
셋째,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은 “율법은 조문(條文)으로 된 것이요 복음은 영(靈)으로 된 것이며, 율법은 돌판에 쓴 것이요 복음은 사람의 마음 판에 쓴 것이며, 율법은 죽음을 전하는 것이요 복음은 생명을 전하는 것이며, 율법은 정죄에 속하는 것이요 복음은 의(義)에 속한 것이며, 율법은 없어질 것이요 복음은 길이 있을 것”존 칼빈, 『기독교강요』(상),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p. 559~560.
이라고 밝힌다. 그는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서 바울의 말을고후 3:6~11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인용해서 항목별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구약이 조문에 속하는 것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 공포되었기 때문이다. 신약이 영으로 된 것은 주께서 그 언약을 사람의 마음에 영적으로 새겨 놓으셨기 때문이다(고후3:6). 두 번째 비교점은 첫 번째 것을 좀 더 명확하게 해 준다. 구약이 죽음을 가져오는 것은, 그것이 온 인류를 저주에 쌓이게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약이 생명을 주는 도구인 것은, 그것이 사람들을 저주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의 은혜에로 회복시키기 때문이다(고후3:6). 구약이 정죄의 직분인 것은, 그것이 아담의 모든 자손들을 불의한 자들로 정죄하기 때문이다. 신약이 의의 직분인 것은, 그것이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고후3:9). 마지막 비교점은 의식법에 관계되는 것이다. 구약이 없어질 것들의 형상을 담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시간이 되면 죽고 없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고후3:10~11).존 칼빈, 『기독교강요』(상),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 560.
칼빈은 바울의 말을 빌어서 율법을 정죄의 기능과 죽이는 용도로 설명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면, 칼빈은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고후3:6)”이라는 바울의 말에서 의문(儀文)을 성령의 역사가 없이 주어졌기 때문에 죽이는 용도로 오해하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 구약의 율법은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 공포되었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의문에 속한 율법을 주실 때에도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출20:20)라는 말씀에도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강림하심에서 율법도 성령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라는 바울의 말은 무슨 의미인가. ‘의문’은 문서로 주어진 것으로서 모세의 율법을 뜻하며, ‘영(靈)’은 그리스도의 영(靈)인 성령을 가리킨다. 이 말은 칼빈의 주장처럼, 의문에 속한 율법은 행위의 대가에 따라서 생사(生死)의 판결이 가해지지만 그리스도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믿음으로 살게 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파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화해와 협력을 촉구하기 위하여 복음의 은혜성을 율법의 정죄기능과 결부시켜 설명한 것이다. 율법에는 인간을 정죄하고 사죄 받지 못하면 죽이는 기능이 있지만, 반면에 제사규례를 통해서 용서받고 살게 하는 생명의 기능도 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물론 칼빈이 율법과 복음을 대조해서 율법은 정죄와 사망으로 설명하고, 복음은 사죄와 생명이라는 도식으로 복음의 기능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이해한다. 그러나 율법과 복음을 상반된 반대의 개념으로 설명하다 보면 본래의 취지에는 어긋나게 된다. 제차 강조하지만, 율법과 복음은 상호 상충되는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동질의 의미이며, 설명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본질은 하나임을 명심해야 한다. 흔히들 율법은 공의, 정죄, 사망으로 규정하고, 반면에 복음은 사랑, 사죄, 생명이라는 이원론적인 도식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하지만, 율법과 복음이 주어진 방식은 모형과 실체로서 다르지만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는 본질적인 의미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모형과 실체의 개념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율법은 복음의 모형이며, 복음은 율법의 실체로서 동일한 의미인 것을 확고히 해야 한다. 이유인즉, 율법에도 모형적으로 주어진 사랑, 사죄, 생명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복음에도 공의, 정죄, 사망의 의미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단,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인간을 정죄하고 용서하여 생명을 보존하게 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실체적인 복음사역에 대한 모형이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정죄 받아 십자가에 죽으셔서 사망을 담당하시고, 그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모형적인 율법에 대한 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부분이나 교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율법과 복음을 대조해서 사용하는 점은 이해하지만, 율법과 복음 전체를 반대개념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칼빈은 세 번째 차이점과 연계해서 네 번째 차이점을 밝히는데, 먼저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구약이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구약을 가리켜 ‘종노릇’에 속하는 것으로 말씀하나, 신약은 신뢰와 확신을 갖게 하기 때문에 ‘자유’에 속한다”라고 말한다. 또한 갈라디아서를 통해서갈 4:22~31.
“구약은 양심을 두려움과 떨림에 빠지게 하나, 신약의 은혜로 말미암아 양심이 해방되어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구약은 종노릇의 멍에로 양심을 매여 놓으나, 신약의 자유케 하는 영으로 말미암아 양심을 해방시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존 칼빈, 『기독교강요』(상),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 562.
이라 주장한다. 칼빈은 이상과 같은 차이점에 대해서 구약은 율법으로, 신약을 복음으로 대입했다.Ibid. p. 563.
이 부분도 세 번째의 논점과 같이 율법의 정죄기능을 통해서 복음의 은혜를 강조하려는 칼빈의 의도가 엿보인다. 물론 율법의 정죄기능과 복음의 사죄기능을 대비시켜 설명한다고 해서 잘못된 해석은 아니다. 그러나 이 점을 부각시켜 율법과 복음 전체가 상충되며 반대의 개념을 가진 것으로 규정하게 된다는 것에 문제가 생긴다.
구약은 신약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이기 때문에 실체를 보는 것과 같이 명료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즉, 모형과 그림자를 통해서 사물을 인지하는 것보다는 실체(실물)을 통해서 인지하는 것이 훨씬 더 분명하고 정확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형과 실체를 반대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단, 실체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는 이해와 인식의 농도차이가 있을 뿐이지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점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히 11:1~2.
라고 말하며,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히 11:39~40.
라고 설명한다. 이 말은, 구약의 선진들은 믿음의 증거만 가지고 하나님을 믿었으나, 이제는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욱 확실하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모형과 실체는 상호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모형은 실체를 향한 약속이며, 진보의 개연성을 갖고 있고, 실체는 모형에 대한 증거이며 성취로서 완전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칼빈은 다섯째 차이점에 대해서는 민족과 관련해서 설명하는데, 구약은 이스라엘 한 민족만 취급했으나 신약은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섭리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칼빈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존귀함을 받았으나, 다른 이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그러나 만물의 회복을 위하여 지정된 “때가 차매”(갈4: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을 서로 화목시키는 자로서 나타나셨고, 오랫동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스라엘의 경계 내에 가두어 두었던 “담”을 헐어버리셨다(엡2:14). 그가 “먼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셔서”(엡2:17) 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한 백성으로 화하게 하셨다(엡2:16)”존 칼빈, 『기독교강요』(상),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 565.
라고 설명하면서 구약에 비해 신약의 탁월함을 증거하고 있다.
칼빈의 말대로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섭리하셨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민족을 대상을 광범위하게 섭리하셨다. 이유인즉, 구약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 대한 모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모형적인 계시는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이고, 실체적인 계시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뜻이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역동적으로 증거한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첫 아담에게 하나님의 나라인 3대 언약(창1:28)을 세우셨고, 이 언약을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하기까지 아브라함에게도 동일한 언약을 세우시고(창12:, 17:) 다윗 때에 이스라엘 나라를 창건하는 과정을 증거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둘째 아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의 기초를 닦으시고,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성령의 사역으로 교회를 설립, 양육, 무장, 투쟁, 승리하게 하시는 내용이다. 이와같이 구약성경은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모형으로서 이스라엘 국가를 통해서 모형적으로 계시하셨다면, 신약성경은 둘째 아담 그리스도께서 실체적인 하나님 나라 즉, 교회를 통해서 계시하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모형적으로 계시된 구약성경 보다는 실체적으로 증거된 신약성경이 우월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계시의 본질적인 차원에서까지 구약이 신약보다 열등하거나, 신약이 구약보다 우월하다는 말은 아니다.
칼빈은 최종적으로 신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의 차이를 근거로 하나님의 공의의 일관성을 반박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연령에 맞도록 그들에게 초보적인 가르침만을 주셨고, 우리는 더 확고한, 말하자면 좀 더 남자다운 훈련 과정으로 우리를 교육시키셨다는 사실이 과연 무엇이 이치에 맞지 않는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마다 동일한 도리를 가르치셨고 처음부터 명하신 대로 그의 이름에게 동일한 예배를 계속해서 요구하셨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시종여일하심이 찬란하게 드러난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원광연 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pp. 567~568.
라고 논박한다. 칼빈의 주장은 확실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방편 상에 있어서 모형과 실체로서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계시의 원칙과 원리에 있어서는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 아닌 것이다. 바울도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라고 말했듯이, 구약의 믿음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의 증거에 의한 것이라면, 신약의 믿음은 약속대로 오신 메시아에 대한 실체를 믿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의 차이점은 본질적인 면이 아니라 구성상의 형식에 있다. 즉, 원리적인 면에서, 구약은 언약이며 신약은 성취로서의 차이가 있고, 형식적적인 면에서, 구약은 모형이며 신약은 실체로서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는 실체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함을 원칙으로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구약을 해석할 때는 구약전체를 모형으로 풀이해야 된다. 즉, 구약의 역사서는(창~에) 신약에서 증거되는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 대한 모형이고, 구약의 시가서는(욥~아) 신약에서 증거되는 그리스도의 속성에 대한 모형이며, 구약의 선지서는(사~말) 신약에서 증거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대한 모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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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승일 목사 (대구동산교회) |
제 12 장 그리스도의 성육신 |
제2권 제 10 장 구약과 신약의 유사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