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09-06-08 18:0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제1권 제17장 섭리의 올바른 적용


칼빈은 16장에서 작정론과 운명론을 대비시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섭리역사를 천명했다. 그리고 본 장에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올바른 적용에 대해서 섭리와 인간사 그리고 섭리에 대한 실제적인 묵상과 작정론적 섭리론에 대한 반대자들에게 반박을 가함으로써 정리하고 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태도에 대해서 먼저,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일을 결정짓는 원리로서, 때로는 매개체를 통해서 역사하고, 때로는 모든 매개체에 반(反)하여 역사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해명을 들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밀하신 판단들을 바라보고 그의 뜻을 모든 일이 참된 정당한 원인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라는 말로써 하나님의 섭리의 은밀하심을 역설한다. 칼빈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만사를 뜻대로 섭리하시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에 어떤 일에 대해서도 반문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라는 것이다.
  칼빈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운명론자들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 즉, 만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다’는 말의 의미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회의적(懷疑的)인 반응을 나타낸다. 작정론에 대한 운명론자들의 반박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확실하게 정리하기 힘든 과제로 여겨진다. 혹자들은 작정론을 잘못 이해한 결과로 범죄를 자행하고도 당당하며, 자기가 할 일에 대해서 나태하며, 주변의 일에 대해서 방관적이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칼빈은 작정론에 대한 운명론자들의 착오적인 반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여러분은 위험이 운명적인 것이 아닐 경우는 대비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으니 두려워하고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 위험이 운명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더러 경계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주께서 사람들에게 지혜를 발휘하고 경계하는 능력을 불어넣으셨고, 그런 능력으로 생명 그 자체를 보존하시고자 하시는 그의 섭리를 따르도록 하셨다는 것이 운명에 분명히 보이는데도, 이 바보들은 그것을 생각하지를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을 무시하고 게으름을 피우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정해 놓으신 재난을 그들 스스로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조심성 있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삼가며 위협적인 악들에 연루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분별없이 무모한 짓을 자행하여 망하고 만다. 그러니, 이 두 경우에서 조심성 있는 자세와 분별없는 자세가 각기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도구들이 아니라면, 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미래사들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 대비하게 하며, 또한 그것들을 극복할 때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대비책들을 끊임없이 강구하게 하시기 위하여, 모든 미래사를 우리에게 감추시기를 기뻐하신 것이다.

  칼빈의 이론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무모한 일은 어리석은 자들로 하게 하시고, 악에 연루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조심성 있게 행동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사의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관심을 갖고 대비하고 극복 할 수 있도록 강구해 나가신다는 뜻이다.
  칼빈의 주장은 너무도 합당하며 하나님의 절대주권섭리를 철저하게 신봉하는 신본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만사의 일을 뜻대로 섭리하시되, 선한 일과 악한 일 모두를 통해서 합력해 선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이루어 나가시는 과정을 보면, 선한 일에 쓰시기로 작정해 놓으신 자에게는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선한 일을 하게 하시지만, 악한 일에 쓰실 자에게는 무지(無知)하게 해서 욕심을 따라 악을 행하게 하시는 섭리를 확인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는 지혜를 주셔서 역사의 이면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셨고, 아도니야는 욕심의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라 만세를 부르게 하셨다. 그 이후의 역사에서도 솔로몬의 왕위를 계승할 르호보암은 지혜로 훈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셨지만, 여로보암은 욕심에 매여 나라를 분열시키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앉게 하셨다. 그 결과 하나님의 언약이 없었던 아도니야와 여로보암은 악행의 결과로 패망하게 되었으나, 다윗 왕가의 왕위를 계승하도록 언약하신 솔로몬과 르호보암은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왕위를 계승시켜 왕의 자리에 앉게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한 도구로 사용하실 때에는 말씀에 의한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살아가게 하시지만, 악한 도구로 사용하실 때에는 사단을 통하여 악심을 품게 하고 욕심의 포로가 되어 범죄하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는 선행의 결과로 축복하시고, 악행의 결과로 진멸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섭리에 대해서, 범죄자의 행위도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기 위해서 동원된 것이기에 그들에게 형벌을 내려서 안 된다고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다. 이런 자들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들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심판들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이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악행이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그 동일한 일에 가담하셨다고 말하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공의를 빌미로 그들 자신의 부패한 행위를 가리겠는가? 그 어느 쪽도 불가능하다. 그들은 양심의 가책으로 인하여, 도저히 자기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 자신에게는 악한 것밖에는 발견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그들의 악한 의도를 정당하게 사용하신 것 밖에 없음으로, 하나님께 무슨 책임을 물을 수 가 없는 것이다.

  칼빈의 말대로, 악행자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섭리의 도구이며,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는 주장에는 동감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범죄자의 악성을 사용하셨다고 해서 범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할 수 없다는 이론에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범죄자 스스로의 악성 때문에 하나님은 책임이 없고, 범죄자 자신이 책임져야한다면, 범죄자의 악성은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인가? 반문하고 싶다. 이 문제는 초두의 ‘자유의지’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범죄가 독자적인 인간의 자유의사의 결정에 따라 자행된 사건이라면 이 역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충돌하며, 작정계획의 성취도와 실효성에 있어서도 신뢰도가 떨어지게 된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라고 증거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것이며, 창조주요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만사뿐만 아니라 인간의 선택과 유기, 선행과 악행 모두를 뜻대로 섭리하신다는 의미이다. 여기에는 인간과 사단 그리고 천사나 모든 자연환경까지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영역을 벗어나서 존재하거나 활동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이 철저하게 종속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섭리되어 진다는 설명이 합당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사단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종속된 존재이며, 악한 일에 쓰이는 도구임이 분명하며, 이러한 맥락에서 태초의 인간이나 가룟 유다의 사건도 이해될 수 있다. 아담의 범죄사건은 앞장에서 다루었으므로 가룟 유다의 예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악한 일에 쓰기 위해 출생시키셨고, 사단을 격동시켜 범죄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선하고 악한 도구로 작정해 놓으시고 선하고 악한 일에 사용하신다.
  성경신학적 섭리론은 작정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성, 신실성, 주권성, 영원성, 자비성을 계시한다. 인간의 도덕성이나, 삶의 태도, 그에 따른 인간의 반응에 관한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기계시의 체계로 되어있다.
  두 번째,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인간의 묵상에 대해서 “성경 역사의 가장 주된 목적은 주께서 성도들의 길을 부지런히 보살피셔서 그들이 돌에 걸려 넘어지는 일조차도 없도록 하신다는 것을(시91:12)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여 “우리들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향하여 베푸시는 하나님의 이러한 특별하신 보살피심을 깨닫는 일이라 하겠다.”라는 말로써 묵상으로 얻는 유익을 피력한다. 물론 칼빈의 말대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피심이 딱히 아니라고는 못하지만, 성경 역사의 주된 목적이 ‘인간의 보살핌’에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인간 본위로 비춰지기 쉽다. 엄밀히 말하면, 성경 역사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작정대로 언약하시고 성취하시는 성경 역사의 체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 본다.
  그리고 칼빈은 형통 중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유익과 안전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시며, 그리하여 심지어 마귀조차도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명령이 없이는 감히 욥을 겨냥하여 아무 일도 행할 수가 없었던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욥1:12).

  또한 역경 중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요셉은 형들의 배신을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형제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었고, 욥은 갈대아 사람들의 잔인한 행위에 대해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정하였기에 보복하려 하지 않았고, 시므이에게 협박과 모욕을 당했던 다윗도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임을 알고 도리어 부하들을 진정시키는 사례들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혹시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상처를 당할 때에라도, 그들의 악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어떠한 원수가 악의로 우리를 대적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경륜에 따라 허락된 일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기를 배우기를 명심해야 한다.

  칼빈은 형통과 역경 중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의 유익을 위해서 형통하게 역사하시고, 성도들은 역경이 하나님께서 허락한 일인 것을 알고 믿음으로 이기며 배워야한다고 역설한다. 칼빈의 주장대로 형통과 역경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인줄로 인식한다면 이제는 형통과 역경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 본다. 일반적으로 고난과 역경은 나쁘고 형통함은 좋은 것이라는 이분법적이고 상반된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에게 베푸신 모든 것은 축복이며, 불택자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저주이다. 불택자에게 삶의 과정상에서 세속적인 풍요가 주어진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은 아니다. 이 땅 위의 진정한 축복은 ‘신령한 복’을 누리며 사는 데 있다. 즉, 과정상의 형통과 고난은 진정한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한 도구이며 교육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물론 과정상에 있어서 택자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징계가 불가피하게 주어지지만 이것 역시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은혜의 확증을 얻게 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며, 하나님께서 택자들에게는 곤고함과 형통함을 겸하여 주셔서 자기 백성들의 믿음을 키워 나가신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인물들을 보더라도,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 받아 버려지고,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까지 가는 시련을 겪는다. 욥은 까닭 없이 재산과 자식을 다 잃어버려 가정이 파탄에 이르고 치명적인 질병까지 얻으며 고생했다. 다윗은 국가를 위기에서 구출한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질투로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엄청난 고생을 했다. 이와 같은 모든 일의 의미는 다양한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깨닫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는데 있다. 그런데 칼빈은 좋고 나쁜 일을 우연으로 여기거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경배할 줄 모르거나, 잘못에 대해 회개할 줄 모르는 자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에서 비롯되며, 모든 환란은 그의 저주라는 율법의 가르침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무서운 경고를 두려움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내게 대항할진대,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배나 더 치리라는 말씀은 사실 우리의 아둔함을 범죄로 여겨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저주’라는 말을 종말론적 심판 개념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구약성경을 인용함이 적절치 못했다. 환란은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게 주어지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기 위한 교육적인 수단으로 활용된다. 교육적인 관점에서는 환란만이 아니라 형통함 역시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국가나 개인에게 환란과 형통을 겸하여 주시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작정(뜻)에 기초하며,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은 뜻대로 섭리하시는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려는 데 있다. 그런데 칼빈이 인용한 성경과 해석은 그에 따른 오해의 소지가 있다. 구약의 율법은 오실 메시아를 언약한 것으로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범한 죄의 대가로 율법의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심으로써 메시아이심을 증거하셨고, 자기 백성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는 사역을 담당하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의 ‘고난’은 범죄와 무관하게 믿음을 키워나가기 위한 ‘시련’의 의미와,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한 수단인 징계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세 번째,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일관성이 없다는 반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하나님의 후회하심에 대해서는 우선, 하나님께 무지나 오류나 무능력을 돌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후회하심이 있다고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점을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후회하심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아무도 의도적으로, 혹은 그것을 원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 이상- 하나님이 후회하신다고 생각하게 되면, 당연히 하나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무지하시거나, 아니면 그 일을 피하실 수가 없으시거나, 아니면 성급하고 경솔하게 결정을 내리셔서 곧바로 후회하게 되시는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결코 성령의 의도가 아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후회하시는 분이라면, 미래에 대해 무지하거나 판단에 성급한 분으로 보여 지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후회’나 ‘한탄’이란 용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을, 인간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묘사하는 그런 모든 다른 화법(話法)의 경우와 비슷하다. 우리가 연약하여 하나님이 그 높으신 상태에까지 도저히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묘사할 때에는 우리의 역량에 맞추어 묘사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후회’나 ‘한탄’의 용어 사용에 대한 칼빈의 해명은 매우 적절하다. 사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바울도 하나님의 나라에 갔다 온 후로는 언어의 한계 때문에 자세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는 해석의 원칙과 원리체계가 확고해야 하며 성경전체의 맥락을 따라 해석하고, 계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물론 성경에는 인간 창조에 대한 한탄과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에 대해 후회하신 것, 백성들이 마음을 바꾸면 재앙 내리실 것을 돌이키겠다고 하신 것, 요나에게 니느웨가 망한다고 예언하게 했다가 망하지 않게 하신 것, 히스기야의 죽음이 15년 연장된 것 등의 사례들이 있다.
  위의 사례에 대한 칼빈의 해명을 확인해보면, 칼빈은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는 내용에 대해서 “마음을 바꾸셨다는 것을 비유적인 의미로 보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 이유로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해서 해명한다. 하지만 칼빈의 설명을 좀 더 부연해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사울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왕이 아니었음에도 왜 그를 왕으로 세우셨는가? 그 이유는 분명하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로 백성들의 요청에 의해서 세워진 왕 즉, 인간의 뜻으로 세워진 왕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언약하신 유다지파에서 당신이 지명한 자가 왕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만사가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을 교육하고자 하신 것이다.
  또한 칼빈은 니느웨가 예언대로 멸망하지 않은 사건과 히스기야의 생명연장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멸망과 죽음을 미리 경계하셔서 그것이 멀리서 오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신 것 이외에 무언가 다른 목적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사실, 주님은 그들이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셨고, 변화를 받아 멸망치 않기를 바라신 것이다.”라고 증거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주께서는 자신이 남겨두기를 바라시는 자들에게 미리 형벌을 경고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만드시는데, 이것은 그의 뜻이나 그의 말씀이 조금이라도 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영원하신 작정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며 영원하신 작정섭리의 결과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칼빈은 니느웨 사건과 히스기야의 생명연장에 대해서 단지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기 위한 차원에서 설명한다. 하지만 성경신학적인 관점에서의 바른 해석은, 노아시대에 사람을 만드신 것에 대한 후회하심은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사람의 딸들과 혼인을 한 인류에게 언약백성은 하나님이 언약하신 혈통으로 생육번성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계시하려는 것에 있다. 그래서 노아의 식구들을 홍수로부터 보호하셔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신다. 예레미야서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예언에 의한 약속대로 70년간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하게 하셨다가 다시 회복될 것이 전제된 상황에서 ‘백성들이 마음을 바꾸면 재앙 내리실 것을 돌이키겠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언의 과정만 보면 백성이 역사 섭리의 주체가 되어 백성의 마음에 따라 재앙이나 형통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70년의 포로생활과 파사를 통한 회복을 미리 작정해 놓으시고 선지자로 예언하게 하신 다음 섭리하심이 명백하다. 요나에게 니느웨가 망한다고 예언하게 했다가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것도 니느웨가 망하거나 흥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임을 알게 하려는 의도이지,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 증거로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박 넝쿨로 시험하사, 요나가 박 넝쿨을 아끼는 것처럼 하나님은 니느웨 성의 백성을 아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말씀하심으로 니느웨 성(城)의 존폐가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신다. 히스기야의 생명이 15년 연장된 것은 히스기야를 죽이지 않으려는 하나님의 심정적인 배려보다는 다윗에게 언약하신 왕가의 왕위를 영원히 존속케 하기 위한 근본적인 의도가 우선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윗에게 왕위가 영원할 것을 약속하셨는데, 히스기야는 그 당시에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으므로 결코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히스기야가 죽게 된다면 언약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하여금 히스기야의 죽음을 왜 예언하게 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과의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려는데 근본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히스기야도 그 약속을 전제로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사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요청이나 범죄행위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심정이 변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뜻이 일정하심과 언약에 기초해서 섭리하시는 역사의 체계를 이해한다면, ‘후회’나 ‘한탄’의 용어가 인간의 이해를 위해서 사용한 화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섭리역사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만사를 뜻대로 주관하시는 전능자요 절대자요 주권자이심을 계시하기 위한 교육적인 목적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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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제18장 악한 도구의 용도와 목적
제1권 제16장 창조와 섭리의 불가분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