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1)
시오니즘, 유대인들의 이주 물결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를 의미하는 ‘시오니즘’운동은 그 창시자인 테오도르 헤르쩨ㄹ의 정력적인 활동으로 유대인들의 이주 물결을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리는데 성공하다. 1860년경 다수의 아랍인들 틈에서 고작 12,000명 내외의 유대인들이 살던 팔레스타인 땅은 유럽의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하면서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유대인들의 이주 물결은 크게 4차례의 이민 파동으로 나눌 수 있다.
유대인 이주가 본격화되기 전인 1860년경 팔레스타인에 살던 12,000명 정도의 유대인들은 주로 독실한 정통파 유대인으로서 ‘성지’에서 살다가 뼈를 묻겠다는 골수 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외부에서 지원해 주는 기부금으로 기본적인 생활만 꾸려 나갔다.
1차 이민파동은 1880-1900년에 일어났고, 이주자들은 주로 토지 경작자들이었다. 1881년 러시아 왕자 암살에 유대인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유대인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이 일자 대부분은 미국으로 일부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왔다. 이미 팔레스타인에 정착해 살고 있던 종교적 유대인들은 세속적 경향이 농후한 이주자들에게 반감을 가졌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기부금을 자칫 나누어 써야 할 지 모른다는 우려로 인해 잠재적인 경쟁자로 보았다.
2차 이민파동은 1900년에서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로, 이때의 이주자들은 과학적 농민과 노동자들이 많았다. 러시아 혁명의 물결과 함께 1903-1906년 사이에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이 원인이 되었다. 이때 이주자들은 시온주의 운동에 헌신한 선구자들이 많았고 건국후 초대 수상이 될 벤구이론, 2대 대통령 이츠하크 벤츠비, 초대 국회의장 요셉 스프린자크 등이 활약을 하게 된다. 현대 이스라엘의 수도 역할을 하는 텔아비브도 이때 건설됐다.
3차 이민파동은 1차대전이 끝난 1918년부터 1924년까지 일어났는데, 이때 온 사람들은 주로 기업가, 투자자들로서 농촌이 아닌 도시로 유입되어 산업, 군대, 교육기관 등을 설립했다. 4차 이민파동은 1924-1939년까지 일어났고, 주로 지식인, 관료, 전문직들이 이주해 와서 새로운 창설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영국 알렌비 장군의 예루살렘 회복
1차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17년 11월, 영국 외무부 장관인 발포어가 선언한 ‘유대국가 창설에 대한 지지’는 신생국가 이스라엘 탄생을 위한 국제사회의 첫번째 관심 표명으로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발포어 선언이 있은지 한달 후 영국의 중동사령관인 에드먼드 알렌비 장군이 터키 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회복한다.
알렌비 장군은 승전국의 야전 사령관으로서 말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대군이 예루살렘 성문에 도착했을 때 그는 행군을 갑자기 멈추었다. ‘예수께서 걸으셨던 예루살렘을 내가 어찌 말을 타고 들어가겠는가’라고 생각한 알렌비 장군은 말에서 내려 걸어서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638년 이슬람의 통치권으로 넘어간 팔레스타인 땅은 1917년 기독교의 영국군에게 넘어감으로써 ‘성지’에서 1300년 가까운 이슬람 통치가 막을 내렸다. 1917년부터 영국이 팔레스타인 문제를 국제연합으로 떠넘기는 1947년까지를 ‘영국의 위임통치’(British Mandate) 기간으로 부른다.
반면 시리아가 프랑스의 위임통치로 넘어가면서 팔레스타인 지약에 남게 된 아랍인들은 점차 정체성 혼란에 빠진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자신들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독립된 단위라고 여긴적이 없고, 시리아의 다메섹을 중심으로 대 시리아 지방의 아랍인으로 자신들을 규정하며 살아왔다.
동쪽은 지중해 바다, 북쪽은 프랑스령의 시리아, 동쪽은 압둘라 국왕이 다스리는 요르단, 남쪽은 무함마드 알리의 후손이 다스리는 이집트로 분리되면서 서구 열강의 입맛에 따라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으로 불리는 지역의 경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