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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작성일 : 12-10-20 11:3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오슬로 협정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립(2)


걸프전쟁이 진행되던 한달 이상, 이라크에서 쏘아대는 스커드 미사일은 이스라엘 시민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사이렌이 울리면 2분 내에 방독면을 쓰고 방공호로 들어가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안 이스라엘 시민들은 국가 방위에 대해 전향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전에는 ‘이스라엘은 국토가 작아서 점령지를 돌려주지 않고 완충지대로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는 ‘전략적 중심성’ 이론이 힘을 받았지만,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아무리 점령하고 있어도 날아오는 미사일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라리 점령지를 반환해 주고 아랍국들과 전면적인 평화조약을 맺는 편이 나을 수 있다는 견해가 힘을 얻은 것이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세계 정세도 팔레스타인과의 직접 협상을 위한 압력으로 작용했다. 냉전 시대에 이스라엘은 대 소련 전략을 빌미 삼아 미국으로부터 방대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이스라엘의 전략은 차질을 빚었다. 오히려 걸프 전쟁을 치르며 미국은 이스라엘을 자제시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았고, 이스라엘이 큰 짐이 됨을 느꼈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2∼300만 명의 소련 거주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이스라엘은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주택건설을 위해 100억달러의 자금을 세계상업은행에서 융자를 받아야 했다. 이때 미국이 보증을 서는 조건으로 싼 이율의 융자를 받기로 했는데, 보증을 서는 조건으로 미국 행정부는 이스라엘이 평화협상에 응하도록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외에도 이스라엘 국내에서는 점증하는 이스라엘 원리주의 단체들로 인해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하마스, 이슬람 지하드 등 무슬림 형제단에서 분리되어 나온 단체들은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지 않고 이스라엘과 평화교섭을 추진하는 PLO를 오히려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이들은 PLO와 분명한 선을 긋고 과격한 테러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편에서도 튀니지로 이전한 이후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협상에 나서는 PLO를 팔레스탄이의 협상 파트너로 삼는게 그나마 나은 상황으로 몰린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처한 막다른 골목의 상황은 교착상태에 빠진 마드리드 회의와는 별도로 오슬로 협정으로 불린 비밀 교섭이 극적으로 타결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3년 9월 13일, 이스라엘과 PLO는 ‘잠정적인 자치에 대한 원칙 선언’에 조인함으로 세계를 다시 놀라게 한다. 그 직전 양측은 상호를 승인함으로써 오랜 적대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무슨 일이라도 발생할 수 있는 곳이 중동’이란 말이 있다. 1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라빈 총리는 “테러 조직 PLO와는 절대로 교섭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PLO의 아라파트 의장도 “평화교섭에서 더 이상의 타협은 없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겉으로 뱉는 허언과는 달리 양측이 처한 딜레마가 오슬로 협정을 이끌어 낸 것이다.

오슬로 협정의 실질적인 막후 역할은 노르웨이 응용사회학 연구소 소장인 텔리에 라이센이다. 그는 노르웨이 정부 의뢰로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의 아랍사회 실태를 조사하던 중 워싱턴 공식 채널과는 별도의 사이드 채널이 필요함을 느끼고 이 비밀 교섭을 중재한 것이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가진 오슬로 협정의 최종 조인식에서 미국이 이 교섭의 배후에 있는 듯 행동했지만 실은 완전히 장외에 있었고 클린턴 정권의 센스없는 외교가 여실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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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협정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립(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