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0-12-04 13:3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경의 배경⑩사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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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를 처음 방문 한 것은 1999년이었다. 유다 산악지대를 통과, 라마와 세겜을 거쳐서 가는 길이었다. 여러 개의 이스라엘 군인과 팔레스타인 경찰의 검문소를 통과하여야 했다. 그 당시에는 아랍어를 인사 밖에 모르는 상태였다.

팔레스타인 경찰에게 “아살렘 알레이꿈”이라고 인사를 하자, “알레이꿈 살렘”이라고 한 경찰은 아랍어로 무엇인가를 묻 길래 “꼬리아”라고 했더니 한국이 최고라는 것처럼 무언인가 말하였다. “국적이 어니냐?”라는 질문이었음이 틀림없었다. 나는 다시 “슈크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손을 흔들며 차를 몰고 친구들과 함께 통과하였다. 모든 여행에서 현지 언어는 조금이라도 하는 것이 좋다.   

사마리아는 요한복음 4장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지명중 하나이다. ‘사마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 오므리가 디르사에서 수도를 사마리아로 이전한 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전 870년 세멜에게 은 두 달란트를 주고 산 땅이다. 열왕기상 16장 24절에 “그가 사마리아 산을 세멜에게서 은 두달란트를 주고 사서 그 산에 성을 건축하고, 그 성읍의 이름을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 불렀다”고 적고 있다.

지리적 위치

사마리아는  북쪽은 이스르엘 골짜기, 남쪽은 예루살렘 산악지대, 동쪽은 요단강, 서쪽은 갈멜 산지와 샤론평야와 경계를 이룬다. 그 경계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화가 있었지만, 대략 요단강 서편의 에브라림 지파와 므낫세 반지파의 영토와 일치한다(수 16장 5∼10절, 17장 7∼13절). ‘사마리아’는 문자적으로 ‘전망산’(watch∼mountain) 또는 ‘전망대’(watch∼tower)이다. 세겜의 북서쪽에 위치한 사마리아는 유대 산악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사각형 모양의 긴 언덕으로 홀로 서있어 주변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천연적이 요새이다. 주변에는 포도주와 올리브기름 생산을 위한 좋은 경작지가 둘러싸고 있다.

역 사

북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왕인 호세아왕 때 앗수르가 사마리아를 침공해 도시를 점령하고 사마리아 거주민 3만 여명을 앗수르 제국 내로 이주시켰고(주전 722년), 동시에 바벨론과 쿠다(Cuthah)등지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켰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자신들과 구별해 쿠다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쿳팀”이라는 경멸적이고 모욕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주전 612년에 바벨론의 지방이 되었는데,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유다 또한 바벨론의 통치하에 들어간다. 주전 445년 바사 제국의 아하수에로왕은 느헤미야를 유다의 총독으로 보내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업을 진행할 때 사마리아의 산발랏 등이 그 사업을 반대하였다. 이것이 후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적대적 관계의 원인이 되었다.

물론 엘리 시대에 실로에 산당을 세우는 배교적 행위도 하였고(사무엘상 1:9), 주전 128년에는 하스모니안왕조의 힐카누스가 세겜과 사마리아를 점령함과 동시에 그리심산의 산당을 허물어 버렸다. 주전 63년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차지했을 때에는 시리아 총독의 관할로 들어갔다. 헤롯 대왕은 주전 37년 사마리아를 포함 유다, 이두메 등의 왕이 되었고, 그의 죽음 후 주후 6년 다시 로마의 직접 통치로 들어가지만, 주후 41∼43년까지 짧은 기간 아그립바 1세가 통치한다(사도행전 26장).


보복의 악순환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북으로 67km, 요단강에서 서쪽으로 40km에 위치한 곳으로 요단강과 지중해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유대 산악 지대의 서쪽 능선에 위치한 사마리아는 비옥한 계곡들이 주변에 있으며, 예루살렘과 갈릴리, 뵈니게, 다마섹을 잊는 도로를 내려다 보고 있는 전략적 위치이다.

철기 시대에 세워진 요새인 사마리아는 방어하기가 용이하여, 앗수르의 포위 공격에도 3년이나 견딜 수 있었다(열왕기하 6:24∼7:5).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는 프톨레미가, 그리고 다시 셀루커스 왕조의 통치를 받는 곳이었다. 유명한 건축가인 헤롯 대왕은 사마리아를 그에게 왕권을 준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기리는 의미에서 도시를 제건하고 ‘세바스트’(Sebaste)라 이름 짖는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적대적 관계는 여러 시대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셀루커스 왕조의 통치시기 오니아스(Onias) 대제사장 시기에 사마리아는 유다를 공격하였다(요세푸스 고대사 12, 4). 사마리아인이 할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힐카누스는 헬라화 된 도시의 이방인들처럼 잔인하게 다루었다. 그 보복으로 사마리아인들은 안티오커스 VII 시테스테스(Antiochus VII Sidestes, 주전 138∼129년)를 도와 힐카누스와 싸운다.

코포니우스(Coponius, 주후 6∼9년) 가 총독이었던 시기에 사마리아인들이 유골로 무교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기도 하였다. 쿠마누스(Cumanus, 주후 48∼52년) 총독 시기에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를 살해하자, 그 보복으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의 한마을에서 학살을 자행하는 등 보복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사마리아는 예수님 당시에는 세계적인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합왕의 상아궁이나 로마와 헬라시대의 아름다움은 이미 사라져버렸고, 이곳 저곳의 고대의 기둥들과 한 쪽 구석의 선물가게와 식당이 서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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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배경 (11), 1세기 예수님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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