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슬로 협정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립(1)
1989년 몰타 회담으로 냉전 체제가 끝나면서 미소 공동의장에 의한 중동평화회의가 가능해졌다. 아울러 1991년 걸프전쟁 이후 아랍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는 현실주의로 급선회함으로써 90년대 중동의 외교지도는 전혀 새로운 판을 짜게 된다.
1991년 10월 30일,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이스라엘과 아랍측 분쟁당사자가 얼굴을 마주 대했다. 사담 후세인의 진의와는 무관하게 이라크의 이스라엘에 대한 미사일 공격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중동 역내 문제의 핵심으로 강렬한 에너지를 감추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베이커 미국 국무장관은 1991년 3월부터 10월까지 중동을 8차례 순방하면서 마르리드 회의의 3대 장벽인 교섭 방식,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참가 방식,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자결권 문제를 해결했고, 회의의 중재자로 적극적인 외교에 나섰다.
베이커 국무장관의 의욕적인 외교는 협상의 최종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데까지가 전부였다. 말을 물가로 데려올 수 있지만 강제로 물을 마시게 할수는 없지 않은가? 마드리드 회의는 양측이 요구하는 도저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으로 인해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마드리드 회의와는 별도로 오슬로 협정으로 불리는 비밀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 비밀 교섭을 통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합의가 도출되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합의가 도출된 데에는 국내외 정세가 양쪽 모두 서로를 인정하고 협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그들을 몰아갔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PLO
PLO 지도부는 걸프 전쟁 중 이라크를 지지한 정치적 실수를 시급히 만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PLO가 이라크를 지지한 탓에 쿠웨이트 내 40만에 달했던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인 사회는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국외추방과 이라크 협력자로 낙인 찍혀 체포되거나 살해당했다.
튀니지의 PLO 본부는 이라크로부터 받아오던 원조금도 전후 패전국이 된 이라크 자신의 코가 석자가 되자 끊어지고 쿠웨이트 내 팔레스타인 출신 아랍인으로부터 소득세 명목으로 5%를 받아오던 지원금도 못받게 되면서 심각한 재정난에 봉착했다.
이런 상황에서 1987년부터 이스라엘 내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서 인티파다(민중봉기)를 직접 지휘하면서 새롭게 부상한 후세인니, 누세이베와 같은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 지도자들이 튀니지에 망명해 있는 PLO 지도부에 강력한 위협으로 등장했다. 베이커 국무장관도 PLO와는 교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이들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 지도자들과 접촉을 시도함으로써 PLO는 자칫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대표성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고민에 빠진 이스라엘
지난 4차례의 중동전쟁을 치르며 이스라엘은 걸프 전쟁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전쟁을 치르며 국내에 ‘방위논쟁’이 뜨겁게 일어났다. 이전까지의 전쟁은 전방과 후방의 분명한 구분이 있었고 전방에서 싸우는 군인과 달리 후방의 시민은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