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칸의 몽골족은 왜 이슬람제국을 초토화시켰을까?<1>
이슬람 세계의 중동과 기독교 세계의 유럽이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으로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을 때 유라시아 대륙의 구석진 몽골에서는 양쪽 세계를 덮칠 치명적인 먹구름이 일고 있었다. 드넓은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에 흩어져 살던 몽골족이 칭기스 칸으로 알려진 테무진에 의해 통일되고, 세계 정복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몽골 제국은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제국들 가운데 가장 넓은 세계 제국을 이루었다.
같은 유라시아 대륙 초원의 유목민이었던 터키족은 일찌감치 이슬람을 받아들여 중동 세계에 알려져 있었지만 동쪽으로 더 구석진 몽골 초원에서 밀려온 몽골족은 서구와 이슬람 세계 모두에게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칭기스 칸과 함께 그의 후계자들은 당시에 알려진 문명세계인 기독교의 유럽과 이슬람의 중동을 초토화시켰다. 그들에 의해 비록 허울뿐인 존재였지만 바그다드에서 질긴 목숨을 연명해 오던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1258년 종말을 고했다.
몽골족은 왜 이슬람 세게에 진격해 들어온 것일까? 그리고 이집트의 맘루크 군은 어떻게 무적의 몽골군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길 수 있었을까?
칭기스 칸으로 알려진 테무진이 등장할 무렵인 12세기 몽골 고원은 군웅이 할거하는 전국시대였다. 부친이 어릴 적에 독살되어 힘들게 자란 테무진은 부족을 통일하고 1206년 45세 나이에 오논 강변에서 몽골 제국의 ‘칸’(군주)에 오른다.
그는 중국을 정복한 금 나라의 군사제도를 따라 십진법을 토대로 군 조직을 개편했다. 군대를 십호, 백호, 천호, 만호로 나누고 자신의 심복을 각 부대의 장군으로 파견해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군대를 만들었다. 여기에 엄격한 군율을 적용해 순식간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가 출현한 것이다.
테무진은 유목민의 관습대로 농업을 천대했지만 상업을 우대했고 특히 동서 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지배에 관심이 많았다. 1218년까지 동북아시아를 장악한 그는 서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서요(西遼, 카라키타이) 제국을 멸망시킨다. 이로써 완충지가 사라지고 이슬람 세계의 최강자가 된 하레즘과 동쪽의 야생마인 칭기스 칸이 국경을 맞대는 상황이 발생했다.
셀주크 조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이슬람 세계의 맹주가 된 하레즘은 당시 술탄 무함마드가 이끌며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너무 잘 나가던 상황이 무함마드를 교만하게 만든 것일까? 1941년 일본이 진주만 습격으로 중립을 고수하던 미국을 2차 대전에 끌여들여 패망했듯이 ‘바보같은’ 무함마드는 세계 최강의 군대가 된 칭기스 칸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무모한 도발을 했고, 이것은 이슬람 세계의 초토화라는 쓰디쓴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무함마드의 ‘바보 짓’은 이러했다. 하레즘의 국경도시인 오트라르에 450명의 몽골 대상단이 머물렀는데, 그곳의 총독은 이들에게 간첩죄를 적용해 모두 처형하고 상품은 압수했다.
칭기스 칸은 항의하는 사절을 보내고 총독의 신병을 요구하지만 무함마드는 오히려 사절단을 모두 죽임으로 두번째 실수를 범한다. 칭기스 칸의 복수는 신속하고 엄청나게 진행됐다.
1220년 10만의 칭기스 칸 군대는 40만 군대가 지키던 하레즘의 주요 도시인 오트라르, 부하라, 사마르칸트, 마르브, 니샤푸르를 차례로 정복했다. 점령된 도시는 몽골의 관습대로 며칠간 마음껏 약탈되었고 이로써 하레즘은 순식간에 공중분해된 것이다.
무함마드의 바보 짓에서 시작된 칭기스 칸의 ‘서진’(西進)은 세계사에서 한 획을 긋는 엄청난 사건이다. 이슬람 세계뿐 아니라 서구 세계도 몽골군과의 첫 대면을 초래한 초래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레즘의 술탄 무함마드를 추격하러 간 몽골의 두 장군은 무함마드를 잡았지만 회군하지 않고 북진을 계속해 1222년 오합지졸인 러시아 군을 격퇴하고 돌아온다. 세계 최강인 몽골군의 위력을 한번씩 맛본 서구와 이슬람은 1227년 칭기스 칸이 죽으면서 감시의 유예기간이 주어진다.
2년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오고타이가 몽골제국의 2대 칸에 즉위했다. 서구와 이슬람 세계는 한차례씩 세계 최강 몽골군의 맛을 보았지만 그것은 앞으로 펼쳐질 본격적인 재앙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번에는 서구 유럽이 먼저 정벌의 대상이 되었다. 1235년 오고타이는 러시아와 유럽 원정을 결의하고 원정군 총수로 칭기스 칸의 장남인 주치의 아들인 바투를 임명한다.
칸으로부터 ‘몽골군의 말발굽이 닿는 모든 곳’을 영지로 약속받은 바투는 12만 원정군을 이끌고 1237년 볼가강을 건너 유럽에 진입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도시들은 몽골 기마군단의 말발굽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무자비한 학살이 시작됐다. ‘죽은 사람을 위해 울어 줄 사람도 없었다’는 유명한 구절은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잘 대변해 준다. 1240년 ‘러시아의 어머니’로 불리는 키예프도 함락되고 이 소식을 들은 유럽 대륙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다.
1241년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은 2만명의 폴란드-독일 연합군과 조우했다. 전투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연합군은 순식간에 궤멸되었고 몽골군은 적군 중 전사자들의 귀를 잘랐는데 9개의 큰 부대가 가득찰 정도였다고 한다. 유럽은 가공할 위력을 지닌 몽골의 기마군단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그나마 같은 해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죽고 교황 자리마저 2년간 공석이 되었다. 몽골 침략에 직면해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유럽 전체가 몽골군에 유린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