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칸의 몽골족은 왜 이슬람제국을 초토화시켰을까?〈2>
1242년 봄, 몽골군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철군하면서 유럽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원을 얻게 된다. 이것을 두고 러시아인들은 키예프의 용맹 때문에 몽골군이 겁을 먹은 것이라 하고, 유럽교회의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이라고 외쳐댔다. 물론 이것은 그들만의 착각이었다. 몽골군이 철군한 것은 1241년 겨울에 죽은 오고타이 칸에 대한 소식이 그제서야 원정군 진영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급박하게 후계자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터에 한가롭게 상대도 되지 않는 유럽 미개인(?)과의 전투를 계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럽인들은 몽골을 ‘타타르’라고 부르는데 이는 ‘지옥’을 의미한다. 최종적 파멸은 면했지만 유럽인은 이 때의 공포를 도저히 잊지 못했던 것이다.
칭기스칸에 의해 하레즘이 멸망된 후 이슬람 세계에는 30년의 유예기간이 주어졌다. 4대 칸이 된 몽케(1251-1259년)로부터 이집트 정벌의 명령을 받은 홀라구는 1253년 옥수스 강을 건너 다시 이슬람 세계에 나타났다. 잘 버티던 시아파의 암살단이 섬멸되자 몽골군을 막아낼 세력이 없었다. 1258년 드디어 바그다드가 점령되고 구차하고 질긴 목숨을 연명해오던 압바스왕조 칼리프의 숨통이 끊어졌다. 비록 허울좋은 이름뿐이지만 이슬람의 합법적인 중심이던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죽은 것은 이슬람 역사에서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하지만 칼리프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어차피 칼리프는 오래 전에 실질적 효력을 상실했고, 몽골은 그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유령을 살짝 건드리고, 썩은 문짝을 걷어찬 것에 불과했다.
유럽이 파멸 직전에서 구원받은 것과는 달리 이슬람 세계는 수도 바그다드가 함락되고 칭기스칸의 손자인 홀라구를 초대 칸으로 하는 ‘일 한국’이라는 몽골왕조가 세워졌다. 훌라구의 일 한국은 친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출발했는데 훌라구의 어머니인 도쿠스 카툰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1258년 바그다드가 함락된 후 1주일간 도시 전체가 약탈되고 주민이 학살당할 때 기독교인들은 교회당에 피신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마치 여리고 성이 정복될 때 기생 라합이 구원받은 것을 연상하게 한다.
1258년 몽골군에 바그다드가 함락되면서 이슬람의 무게 중심은 급속히 이집트로 이동했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흐 알딘이 연 아이유브조를 무너뜨린 맘루크조는 1250년 정식으로 출범한다. 터키계 용병인 맘루크 군대는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이끈 십자군을 막아내고 이집트를 구한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술탄이 된 투란샤가 자신들을 핍박하자 그를 암살하고 어머니인 샤자르를 술탄으로 선포한다. 하지만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여자 술탄을 거절하자 맘루크군은 자신들의 총사령관인 아이벡을 샤자르와 결혼시키고 술탄으로 인준받고 맘루크조가 이집트에 출범한 것이다. 무슬림 공동체는 노예 용병들인 이집트의 맘루크조를 무시했지만 그들이 몽골군을 막아내며 이슬람의 마지막 보루가 된 것은 분명 역사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1258년 바그다드를 점령한 훌라구는 최종 목표인 이집트 정벌을 향한 고삐를 당겼다. 1259년 시리아를 접수하고 이집트 관문인 가자까지 내려온 훌라구는 술탄 쿠투즈의 항복을 종용했다. 쿠투즈는 결사항전을 외쳤지만 몽골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바로 이때 몽골의 4대 칸 몽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훌라구가 장례를 위해 주력군을 이동시키자 쿠투즈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남은 몽골군을 섬멸할 묘수를 찾기 시작했다. 이집트군은 보병이고 몽골군은 기병인데, 수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근접전을 펼칠 수 있는 지형으로 몽골군을 유인하기로 했다. 유인 작전은 맘루크 최고의 장군인 바이바르스가 수행했고, 1260년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이집트군은 몽골군에게 최초의 치명적인 타격을 안긴다. 아인 잘루트 전투는 세계전쟁사에 기록된 유명한 전투인데, 이로써 이집트의 맘루크조는 몽골군의 말발굽에서 이슬람 세계를 지켜낸 영광스런 보호자가 된 것이다.
위대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바이바르스(1260-1277)는 내친 김에 술탄을 몰아내고 스스로 술탄이 된다. 맘루크조의 실질적인 창건자인 바이바르스는 바그다드의 마지막 칼리프의 숙부를 이집트로 초청해 무너진 칼리프 제도를 복원한다. 물론 이것은 종교적이기 보다는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했다. 카이로의 망명 칼리프는 새 술탄의 즉위식에 불려가 이를 인준해주는 조건으로 연금을 받는 하급 궁정관리에 불과했다.
맘루크조는 2세기에 걸친 십자군운동에 종지부를 찍으며 1291년 성지 이스라엘에서 십자군 잔당을 완전히 몰아내고 1303년에 있은 몽골군의 2차 침입을 격퇴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이슬람의 맹주가 된다. 이후 맘루크조는 경제적인 번영을 누렸는데 그 바탕은 지중해권과 인도양권을 잇는 해상무역을 위해 자국을 통과할 수밖에 없는 국제무역에 있었다. 맘루크는 자국 통과 상품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붙여 폭리를 취했고, 이 돈으로 막강한 맘루크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 맘루크조 이슬람은 인도양, 동아프리카, 말레이반도, 인도네시아 등에 선교활동을 하며 이슬람의 2차 팽창기를 이끌게 된다. 무력으로 이루어진 7세기 1차 팽창기와 달리 2차 팽창기는 무역상인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세계 첨단의 이슬람 문화를 등에 업고 평화적으로 접근한 맘루크 상인들은 쉽게 현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러한 맘루크의 전성기도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다가마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도착하는 신항로를 개발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자국 통과 물품에 대한 관세로 유지하던 군대도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맘루크조는 1517년 오스만 터키에 멸망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