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터키는 어떻게 탄생했을까?〈上〉
세계에서 가장 넓은 제국을 건설하고 죽은 ‘세기의 풍운아’ 칭기스칸의 몽골 제국은 그 후계자들에 의해 중국 본토에 자리잡은 원나라를 중심으로 차카타이 한국, 킵차크 한국, 일 한국으로 나뉘어 여전히 세계를 호령했다.
칭기스칸의 손자인 훌라구는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세계를 고스란히 접수하고 일 한국을 세웠다. 이집트의 맘루크군이 몽골군의 진격을 두 차례나 막아내면서 이슬람의 중심은 바그다드에서 카이로로 자연스럽게 이동했다. 그러나 이것은 최후이자 최대의 이슬람 제국으로 등장할 오스만 터키의 탄생을 위한 막간극에 불과했다. 16세기만을 놓고 보면 오스만 터키는 오늘날 미국을 능가하는 수퍼 파워(초강대국)요 위대한 제국이었다.
이슬람 부흥의 마지막 불꽃이 된 오스만 터키의 역사는 몽골이 파괴한 참혹한 잿더미 위에서 타올랐기 때문에 역사에 관심 갖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흥미를 자아낸다.
몽골군의 말발굽이 사나운 먼지를 휘날릴 때 터키족의 한 일파가 소아시아 지방 깊숙이 피신해 들어왔다. 에르토그길을 지도자로 하는 이 그룹은 룸 셀주크의 술탄으로부터 작은 영지를 하사받고 정착했다. 한 때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이슬람의 수호천사가 되었던 셀주크 조는 몽골 침입으로 맥없이 무너졌고, 몇개의 분파 정권 가운데 하나인 룸 셀주크 조가 소아시아 지방의 ‘콘야’를 수도로 삼으며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콘야는 성경에 나오는 ‘이고니온’으로 디모데의 고향이며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 때 방문했던 도시이기도 하다(행 13:51, 14:1).
룸 셀주크의 술탄은 같은 터키족 분파인 이들 도망자 그룹을 용병으로 받아들여 비잔틴 제국과의 접경지인 부르사 근처에 영지를 하사하고 정착시켰다. 술탄의 깊은 뜻은 이들을 방패막이로 삼아 서쪽의 방위를 든든히 한 후 동쪽의 몽골군을 막을 요량이었던 것이다.
1281년 에르토그릴이 죽고 그의 아들 오스만(1281-1326)이 뒤를 잇는데 그의 리름을 따서 훗날 제국의 이름이 ‘오스만 터키’로 불린 것이다. 오스만은 1308년 자신들을 용병으로 고용한 룸 셀주크를 무너뜨리고 초대 술탄이 되었고 1326년 비잔틴 제국의 강력한 성곽도시인 부르사를 점령하고 죽는다.
오르환(1326-1360)은 부르사를 급속히 성장하는 국가의 수도로 삼고 실질적인 국가의 형태를 정비한다. 16세기에 천하를 호령하게 될 오스만 터키는 이렇게 초라하고 소박하게 출발했다.
무라드1세(1360-1389)는 다다넬스 해협을 건너 비잔틴 제국의 본토인 발칸 반도에 상륙했고, 1362년 비잔틴의 2대 도시인 에디르네(아드리아노플)를 정복하고 이곳을 부르사에 이어 터키의 두번째 수도로 삼는다. 내친 김에 그는 1366년 소아시아에서 비잔틴 세력을 일소하고 1371년 마리차 강 전투, 1389년 코소보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발칸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로써 부르사와 에디르네 사이에 샌드위치로 낀 비잔틴 제국은 ‘제국’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로 영토가 줄어들었다. 476년 서로마 멸망 이후 1000년 가까이 이어온 비잔틴의 운명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이 되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외치는 지극히 낙관적인 사람도 이런 상황에서는 절망의 깊은 탄식을 내쉴 수밖에 없다.
비잔틴 황제인 요한네스 5세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오스만 술탄의 봉신이 되며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다. 이제 비잔틴 황제가 비빌 언덕은 그래도 같은 기독교 세력인 로마 교황청 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잔틴을 구원할 백기사는 유럽이 아닌 전혀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